[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지금 대만은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적 주권을 넘어 ‘독립’까지 시사하고 있는 ‘녹색 물결’과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양안(兩岸, 중국과 대만) 간의 협력을 통해 경제적 이익 극대화에 집중해야 한다는 ‘청색 물결’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고 맞부딪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사흘 뒤인 오는 13일 치러질 이번 총통 선거에서 보여지고 있는 ‘녹색’ 민주진보당(민진당)과 ‘청색’ 국민당 간의 차이 두고 국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총통을 선출하기 시작한 지난 1996년 이후 가장 강력한 수준의 대립이라고 한목소리로 지적합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공식 석상에서 수차례 강조하며 ‘대만 무력 통일’까지 공공연하게 입에 담고 있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위협 수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 대만인들을 더 절박하게 만들고 있는 건데요. ‘전쟁’ 위협을 무릅쓰고 주권을 지킬 것이냐, 자존심을 접고 중국과 협력해 실리를 찾느냐의 갈림길에 놓인 대만의 현실이 총통 선거를 통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는 셈입니다.
어느 때보다 전 세계인들이 대만 총통 선거를 지켜보고 있는 이유는 선거 결과에 따라 아시아 지역의 지정학적 상황과 글로벌 공급망 등 주요 문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92공식은 주권 포기” vs “전쟁(민진당) 대신 평화(국민당)”
선거가 임박할 수록 중국과 관계를 둘러 싼 민진당과 국민당 간 의견 차이의 골은 더 깊어지는 모양새죠.
민진당 유세 현장에선 ‘중국의 대만’이란 과거에서 벗어나 ‘세계의 대만’이란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의 업적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보조를 맞추던 대만은 사라질 것이며, 민주·평화의 대만을 건설하기 위한 첫 단추는 주권 수호와 과거의 길(回頭路)로 가지 않는 것”이라고 라이칭더(賴淸德) 민진당 총통 후보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죠.
양안 관계에서 ‘금과옥조’로 여겨졌던 ‘92공식(‘하나의 중국’은 인정하되 양측이 각자 다른 명칭을 쓰기로 한 합의)’을 “주권 포기”라고 강조하며 ‘대만 독립’ 의향을 노골적으로 시사하는 말도 라이칭더의 입에서 나오는 상황입니다.
‘대만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들이 쓰는 ‘궈위(國語)’란 표준어 대신 원래 대만 땅에서 살던 본성인(本省人)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인 ‘타이위(臺語·민난어)’로 유세가 진행된 것도 민진당의 반중·독립 의지를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반면, 국민당 유세 현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발언은 바로 “민진당이 대만을 ‘전쟁’이란 불확실성의 길로 몰고 가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선거 유세를 통해 ‘전쟁(민진당)과 평화(국민당)’ 중 하나를 선택하란 메시지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죠.
허우유이(侯友宜) 국민당 총통 후보는 억제(Deterrence), 대화(Dialogue), 긴장 완화(De-escalation)에 기반을 두고 중국과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이른바 ‘3D’ 공약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與野,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초접전
이번 총통 선거에 참여한 후보는 3명입니다. 집권 여당인 민진당의 라이칭더, 제1야당인 국민당의 허우유이, 제3지대 야당인 민중당의 커윈저(柯文哲)가 그들인데요. 라이칭더와 허우유이의 2파전에 커윈저가 그 뒤를 바짝 추격하는 모양새죠.
초반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던 세 후보 간의 선거전은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라이칭더 1강(强) 대 허우유이·커윈저 2중(中) 양상을 띄며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접어들며 라이칭더의 지지율이 정체된 틈을 타 허우유이가 빠르게 따라 붙으며 민진당과 국민당 간의 전통적인 2파전 양상이 굳어지는 형태로 진행 중입니다.
대만 현지 여론 조사 결과도 2강(强) 후보 간의 초접전 양상이 벌어지는 모양새인데요. 대만 현지방송 ET투데이가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1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라이칭더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38.9%로 35.8%를 기록한 허우유이 후보에 불과 3.1%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다른 대만 현지방송인 TVBS가 지난달 30~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라이칭더(33%)와 허우유이(30%) 간의 지지율 격차가 3%포인트 밖에 나지 않았죠.
사실상 누가 대선 당일 바람몰이로 승리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셈입니다.
美中 대리전, 대만 총통 선거 더 복잡하게 만들어
어느 후보가 대만의 새 총통으로 당선된다 하더라도 양안 관계는 요동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특히, 이번 선거를 두고 벌이고 있는 글로벌 주요 2개국(G2) 미국과 중국 간의 대리전 양상은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시나리오① : 민진당 라이칭더의 승리
선거에 앞서 정찰용으로 의심되는 풍선을 대만 주변에 띄우는 것을 물론, 대(對) 대만 관세 인하를 중단하는 등 군사·경제적 압박을 강화 중인 중국의 강경 움직임 속에 양안 관계는 악화될 수 밖에 없을 전망입니다. 국제 사회의 시선을 의식해 ‘대만 무력 충돌은 없다’고 하는 중국도 고강도 무력 시위에 나서거나 추가 경제 제재 등의 카드를 얼마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만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하는 미국과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라이칭더가 당선될 경우 중국이 대만 인근의 보급로를 일시적으로 장악·차단하거나 인접한 중국 본토인 푸젠(福建)성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중국의 군사적 압박이 심화될 경우 미국은 물론이고, 동맹국(한국, 일본)이 미국 진영에 서서 구체적인 움직임에 나설 경우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왔죠.
시나리오② : 국민당 허우유이의 승리
현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원천 거부 중인 양안 간의 대화 국면이 재개됨에 따라 대만 해협에 드리웠던 군사적 긴장은 다소 누그러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다만, 변수는 대만 내 영향력이 급감하게 되는 미국의 반발이 가시화될 경우 지정학적 변동성이 커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일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닛케이)신문의 분석입니다. 전 세계 해운의 약 3분의 1, 전 세계 무역량의 4분의 1,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60%가 이동하는 대만 주변 등 남중국해 연안 해역에 대한 주도권이 중국에 넘어가게 될 경우 반대로 미국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만 없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 상상 못해…글로벌 공급망 변화 오나
전 세계적으로나 국내 투자자들에게 양안 문제가 큰 관심을 끄는 이유는 바로 ‘미래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때문입니다.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의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시장에서 TSMC의 점유율은 무려 57.9%에 이릅니다. 12.4%의 삼성전자가 2위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대만 없이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이 돌아갈 수 없는 수준인 셈이죠. 인공지능(AI) 개발에 필수적인 7나노 공정 등 최첨단 반도체 시장에서 TSMC가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달할 정도입니다.
일각에선 반도체 생산과 기술력을 둘러싸고 제재 폭탄을 쏟아 부으며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이 대만 총통 선거 결과에 따라 받아 들게 될 득실이 확연히 갈릴 것이란 분석도 내놓고 있습니다.
지난 8일 미래에셋증권은 보고서를 통해 이번 선거가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지형을 어떻게 변화시킬 지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시나리오① : 민진당 라이칭더의 승리
지금보다 더 강화된 미국과 관계를 위해 대만은 미국이 취하고 있는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에 지속적으로 협조적인 자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됩니다. 중국에 대한 TSMC 반도체 설비 투자를 줄이는 대신 미국 내 반도체 시절에 대한 투자를 늘릴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다만, 중국의 공세에 TSMC가 시달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블룸버그통신의 분석도 있습니다. 중국이 대만에 대한 공세를 심화하는 과정에서 TSMC 무력화에 나서거나 핵심 설비 등을 빼앗을 가능성이 크단 것이죠.
시나리오② : 국민당 허우유이의 승리
대만의 반도체 산업 자체와, 그 중심에 선 TSMC가 양안관계 회복의 지렛대로 적극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에 힘이 실립니다. 미국의 고강도 제재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으로서도 글로벌 파운드리 공급망을 지배하고 있는 TSMC에 대한 영향력을 거머쥠으로써 미중 패권 경쟁에서 한숨 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국민당 자오사오캉(趙少康) 부총통 후보가 미국·일본 등에 공장을 건설중인 TSMC를 향해 “대만 이외의 지역에서 투자를 우선시한다”며 비판했던 만큼, 해외 투자엔 소극적으로 돌변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자유주의 가치 중심의 밸류체인을 구성하려는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 ‘칩4(CHIP4, 한국·미국·대만·일본)' 역시 약화될 것이란 전망에도 힘이 실리는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의 경우 야당인 국민당의 집권이 좀 더 유리한 여건 조정에 도움이 될 계기란 다소 파격적(?)인 분석을 미래에셋증권은 내놓기도 했죠. “현재 AI 칩 같은 고사양 칩을 생산할 수 있는 고급 나노 공정을 지닌 파운드리가 TSMC와 삼성전자인 점을 감안하면 삼성전자가 기존 TSMC가 쥐고 있던 파운드리 점유율의 일부를 추가로 점유할 수 있다면 (실적이나 주가 흐름에) 긍정적”이라는 것이 분석의 주된 내용입니다. ‘8만전자(삼성전자 주가 8만원대)’를 넘어 ‘9만전자’를 바라는 567만 삼전개미(삼성전자 주식 소액 개인 투자자)에겐 허우유이 후보가 대만의 차기 총통 자리에 오르는 것이 호재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잘 나가는 K-방산, 양안 갈등은 호재일까? 악재일까?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의 군사적 위기가 고조될 경우 주목 받을 수 있는 국내 투자 섹터는 바로 ‘K-방산’입니다.
최근 한국은 미국과 정치·군사적 밀착 관계가 빠른 속도로 심화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대만에서 민진당이 재집권한 뒤 양안 간의 군사적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미중 간의 군사 대립으로 상황이 확산될 경우 국내 방산주들의 직간접적인 수혜가 예상된다는 것이 증권가의 분석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같은 전망엔 분명한 한계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죠.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가치 동맹을 강조하는 한국 정부일지라도 무역 의존도가 높은 중국과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기 힘들다는 점에서 군사적 지원에 제약이 걸릴 가능성도 높다”면서 “미국과 대만, 일본 등에 대한 직간접적인 군사 지원 시 최악의 경우 중국과 군사적 충돌까지도 빚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방산 섹터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中 대만 침공’이란 파국, 글로벌 경제에 치명상”
민진당 또는 국민당 어느 쪽이 대만 총통 선거에서 승리할 지 여부와 관련 없이 대만 해협의 불안정 리스크가 커지는 것 자체가 국내 산업과 금융투자업계엔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우선 대만 해협이 ‘생명줄’과 같은 한국으로선 군사적 위기 고조가 산업 전체와 투자 시장에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도 있단 평가가 나옵니다. 민진당이 승리할 때는 중국의 압박 강화, 국민당의 승리 시엔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강해짐에 따라 긴장이 고조될 수 있다는 분석을 근거로 한 것이죠. 주로 중동 지역으로부터 석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을 대부분 수입하고 있는 한국 입장에선 반드시 지나칠 수밖에 없는 대만 해협의 불안 심화가 산업 전반에 미칠 타격의 규모가 상상 이상이라는 겁니다. 지난해 기준 약 1440만명에 이르는 국내 주식 투자자 모두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겁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에너지원과 제조업에 필요한 각종 원자재 등의 수입이 불안정해지며 산업 시설의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로 인해 국내 상장사들의 경우 대·중·소형주를 가리지 않고 실적 악화란 직격탄을 맞을 위험성이 높아지고, 높은 수출 의존도로 인해 대외 환경에 특히나 민감한 국내 증시의 변동성이 극대화될 위험도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밖에도 미래에셋증권은 “민진당의 연임이 확정될 경우 지난해 11월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긴장감이 조금씩 완화 중인 미중 관계가 다시 악화될 수 있으며, 일시적으로 전쟁 관련 우려까지 부각될 수 있다”면서 “미중 관계 악화 우려는 증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는데요. 대표적으로 지난 2022년 8월 낸시 펠로시 전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한 이후 중국이 대만을 봉쇄한 채 대만 영공을 통과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초고강도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아시아 주식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을 유사 사례로 들었습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보다 더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죠. 중국과 대만 간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세계경제 국내총생산(GDP)이 10조달러(약 1경3000조원) 감소하는 경제적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건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우려되는 점은 전쟁 발발 시 한국의 GDP가 23.3% 감소하면서 대만(-40%)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피해를 입는 국가가 될 것이란 점입니다. 전쟁 당사국인 중국(-16.7%)보다도 피해가 훨씬 클 것이란 게 눈에 띄었죠. 전 세계 GDP 감소율(-10.2%)과 비교했을 때는 두배가 넘고, 미국(-6.7%)이 입을 피해와 견줘 보면 4배에 육박했습니다.
한국의 예상 GDP 감소율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게 바로 ‘반도체’란 사실도 걱정되는 지점입니다. 반도체 쇼크 만으로 무려 17.8%에 이르는 GDP가 감소할 것이란 분석이 나왔기 때문이죠.
이는 국내 시총 1위 삼성전자와 시총 2위 SK하이닉스를 비롯해 국내 증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반도체 섹터’가 전반적으로 충격파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주가 급락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