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23년전 영유권 주장하며 암초 위에 난파선 올려둬
중국엔 해양패권 요충지, 미국엔 중국과 최전방 전선
15일 바이든·시진핑 정상회담…“진짜 외교는 암초 위에서 열릴 것”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남중국해 세컨드 토마스 암초(Second Thomas Shoal) 위에 놓인 2차 세계대전 때의 난파선을 두고 중국과 필리핀, 미국, 일본이 기싸움을 벌였다. 녹이 잔뜩 슨 배는 남중국해 주변 국가들 사이의 영유권 다툼과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중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갈등이 합쳐져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필리핀은 지난 10일 남중국해 필리핀령 세컨드 토마스 암초 위에 정박해있는 난파선 BRP 시에라 마드레(Sierra Madre)를 수리하러 떠나는 항해길에 블룸버그 통신, AP통신 등 외신기자를 초청했다.
언론 외에도 미국 해군 항공기가 상공을 맴돌며 감시했고, 일본에서 건조된 필리핀 해안경비대 선박 3척이 보급선을 엄호했다.
중국 해안경비대가 나타나 물대포를 쏘고 항로를 가로막으며 필리핀 보급선을 방해했지만 성공적으로 암초와 배에 다다를 수 있었다.
녹슨 난파선 하나를 보수하는 일을 두고 네 나라가 달려든 까닭은 이 암초가 남중국해의 영토 분쟁의 한 축이자,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가두려는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 암초가 대만해협에 이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두번째로 큰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필리핀은 지난 1999년 암초의 물리적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녹슨 군함을 일부러 올려다 놓았다.
그러나 암초에 주둔하는 군대는 정기적으로 재보급을 받아야 하며, 중국은 이러한 보급품이 도착하는 것을 막아 필리핀을 이 해역에서 밀어내고자 한다.
1~2주 동안 생필품 공급이 끊기면 암초에 주둔한 필리핀 병사들은 스스로 섬을 떠날 것이고, 군대가 한 번 떠난 후에는 새롭게 자리를 잡기가 힘들어진다.
이를 아는 중국은 필리핀이 물자를 보급하거나 배를 수리하기 위해 배를 보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중국은 그동안 필리핀에 시에라 마드레호를 수리하지 말 것을 경고하며, 배를 견인할 것을 거듭 촉구했다.
보급선에 물대포 등 공격을 서슴지 않았으며 지난 2월에는 고출력 레이저를 사용해 암초 근처에 있는 필리핀 해안경비대 선원들의 눈을 멀게 하는 일까지 벌였다.
하지만 녹이 심각하게 확산되면서 선체 곳곳에 구멍이 뚫려 계속 방치할 경우 선박이 주저앉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자 필리핀 정부는 수리 인력과 보급품을 급파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중국의 만행을 세계에 보여주겠다며 외신기자들을 여정에 초청한 것이다.
합동 작전과 언론 초청에는 미국에 깊이 연관돼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쟁지역에 블룸버그 등 미국 매체를 초청하는 데에 필리핀이 사전에 미국과 조율을 하지 않았을 수 없다.
또, 합동작전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관계 개선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날 것을 결정짓기 단 하루 전에 실행된 점 역시 미국이 이 암초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에게는 세컨드 토마스 암초가 중국과의 최전선에서 우방을 방어하는 상징적인 전선이다.
중국이 필리핀에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며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자 미국이 곧바로 나서서 변호한 점도 같은 맥락이다.
워싱턴은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반복적인 괴롭힘에 맞서 필리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며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공공선박에 대해 공격을 가할 시 미국은 필리핀과의 상호방위조약을 가동하겠다고 맞대응했다.
일본도 힘을 실었다. 이달 초 마닐라를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3자 협력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과연 순순히 물러날 수 있을까. 이 지역 해양 패권을 차지하려는 중국에게도 세컨드 토마스 암초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지점이다.
힐 브랜드 미국 국무부 외교정책위원회 위원은 “중국은 아마도 전면 충돌을 원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 암초를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미 중동과 유럽에서 두 개의 전선을 마주한 미국에게 남중국해의 일이 성가신 일이 되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만에 하나 미국이 이곳을 포기한다면 필리핀을 비롯한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들에게 안보 불신을 안겨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브랜드 위원은 “시진핑과 바이든은 곧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지만 진정한 외교는 수천 마일 떨어진 서태평양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