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서울국제음악제 폐막 공연
류재준 ‘트럼펫 협주곡’ 세계 초연
신비한 세계로 떠난 모험의 장면들
불안, 암흑, 신비, 기쁨, 희망 버무려
뛰어난 기본기ㆍ음악성 빛난 악단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빠르되 활기차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합창석 위 모니터로 1악장의 시작을 알리는 지시어가 뜨자, 관객들은 세계 초연곡에 숨을 죽였다.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의 초연곡을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영광과 긴장이 교차된다. 곡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고, 다시 들을 날을 기약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다. 2023 서울국제음악제의 폐악 음악회(10월 14일)에선 축제의 예술감독인 작곡가 류재준의 ‘트럼펫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 울려 퍼졌다.
올해로 15회를 맞은 2023 서울국제음악제는 ‘낭만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지난 7일부터 7일간의 여정을 이어갔다. ‘낭만에 관하여’는 감염병, 참사, 전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온 관객들에게 위안과 행복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담아낸 주제다.
폐막 연주회를 통해 세계 초연한 ‘트럼펫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여러모로 생경했다. 협주곡으로는 익숙치 않은 악기가 트럼펫이기 때문이다. 사실 트럼펫은 중세엔 가장 인기있는 악기 중 하나였고, 현대에 와선 ‘재즈 황금시대’를 열어온 악기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트럼펫의 음성을 좋아하는 애호가들도 적지 않지만, 반대로 트럼펫이라는 악기에 대한 편견도 많다. 남성적인 저음에 소리만 지르는 시끄러운 악기라는 선입견도 공존한다.
류재준의 ‘트럼펫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무엇을 상상하든, 트럼펫에 대한 편견을 지운 곡이었다. 음악회에선 로열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인 바실리 페트렌코가 SIMF(서울국제음악제, 심프)오케스트라를 이끌었고, 트럼펫 연주자 가보르 볼도츠키가 초연곡을 책임졌다.
협주곡은 ‘이상한 나라’로 향하는 누군가의 모험을 들려주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유려한 바이올린 선율과 클라리넷으로 시작한 트럼펫 협주곡은 관객들을 미지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다.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어 음표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그려갔다. 발을 딛는 곳마다 익숙지 않은 화음들이 등장해 긴장감은 고조됐다. 그러다 서서히 들려온 부드러운 트럼펫 선율과 그 아래로 바람을 일으키는 듯한 현의 노래가 신비로운 조화를 이뤘다.
모험은 ‘게임의 세계’처럼 다채롭고 변화무쌍했다. 긴장과 두려움을 싣고 내디딘 발걸음이 익숙해지자, 어느덧 아름다운 나무와 사랑스러운 동물들이 가득찬 신비로운 공간으로 당도한다. 남성적인 트럼펫과 여성적인 하프가 만나 왈츠를 추는 순간이었다. 페트렌코는 유연한 선율에 맞춰 귀여운 날갯짓으로 음악을 표현했다. 하프는 ‘도롱도롱’ 하며 물방울 소리를 냈고, 트럼펫은 장난스럽게 ‘닷 다다다닷’하며 달려나갔다.
곡의 구성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다. 게임에서 ‘레벨업’을 할 때처럼 짜릿했다. 하지만 게임은 순조롭지 않다. 재치있는 트럼펫 소리의 향연은 이내 얼굴색을 바꿨다. 약음기를 끼고 연주한 먹먹한 소리들이 이어지다 섬세하고 화려한 트럼펫 카덴차에 귀가 홀려버린다. 그러다가도 끝날 듯 끝나지 않은 비극적 사건을 불러오는 것처럼 불안은 다시 시작된다.
곡은 예측불허의 장면들을 그려가면서도, 절묘하게 각 악장마다 연결고리를 맺었다. 카덴차 이후 돌입한 2악장에선 암흑과 슬픔, 그러다 발견한 빛 한 줄기의 희망이 도사렸다. 섬세한 트럼펫 선율과 현악기의 피치카토가 등장하면 이번 모험은 ‘해피엔딩’이 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이 곡은 트럼펫을 위한 곡이면서, 무엇보다 트럼펫 연주자의 뛰어난 연주력을 요하는 곡이었다. 지구력과 체력도 중요했다. 연주를 마친 뒤의 가보르 볼도츠키는 마라톤에 완주한 것처럼 보였다.
협주곡은 서울국제음악제의 주제와도 안성맞춤이었다. 어두운 터널 속 삶을 빠져나와 희망을 마주하는 노래였다. 당연히 과정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길 위에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엔 상상도 못한 만남이 있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 있었다. 류재준의 음악은 특정한 상황도 설명도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상상하는 음악이었다. 특히 현대곡 임에도 어렵지 않고, 고전음악을 듣는 것처럼 귀에 착 감기는 선율이 인상적이다. 거부감 없이 다가오면서 다채로운 구성으로 신선한 재미를 더한다.
이 음악을 완성한 것은 지난 SIMF 오케스트라였다. 2010년 창단한 앙상블 오푸스에서 확장해 서울국제음악제 오케스트라로 뭉친 연주자들의 오랜 합이 초연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앙상블 오푸스는 음악감독 류재준, 리더 백주영을 필두로 비올리스트 김상진 이한나, 첼리스트 김민지 심준호,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 호르니스트 김홍박, 트럼페터 최인혁, 퍼커셔니스트 한문경 등 쟁쟁한 음악가들이 몸 담고 있다. “우리의 지향점은 음악”(비올리스트 김상진)이라며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뭉친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10여년간 호흡을 맞춰왔다. 이들을 필두로 확장한 SIMF오케스트라는 숱한 ‘축제 오케스트라’가 가진 앙상블의 한계를 극복하며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진가는 폐막 음악회의 대미를 장식한 브람스 교향곡 1번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최근 한국을 찾은 굵직한 해외 오케스트라들이 줄줄이 들려준 곡이었다. 에드워드 가드너가 이끄는 런던필하모닉(10월 7일),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취리히 톤할레(10월 13일)도 연주한 곡이다.
평균 연령으로 치자면 꽤나 젊은 오케스트라 축에 드는 SIMF오케스트라의 브람스 교향곡 1번은 만추의 서정이 곳곳에 묻어났다.
뛰어난 기본기를 탑재한 ‘교수님’ 음악가들의 음악성이 페트렌코의 손 끝에서 버무려졌다. 명장면은 두 번 나왔다. 악장 백주영의 바이올린 솔로 연주와 김홍박의 호른이었다. 백주영의 솔로는 이날 브람스 교향곡 1번의 색깔을 결정했다. 내리긋는 활끝마다 무르익은 가을의 애수가 실려 관객들의 마음을 매만졌다.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낸 악장은 솔로 연주를 마친 뒤엔 너무도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 안으로 안착해 악단을 이끌었다. 선명하고 깔끔한 음색의 호른을 비롯한 금관 악기와 적재적소에서 안정감있게 들려오는 타악기 등 각각의 파트들이 완전한 호흡으로 그려낸 ‘가을의 낭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