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1.8나노 웨이퍼 공개의 의미
삼성·TSMC에 대한 선전포고
필수 장비 아직 공급 안됐는데…“진짜 맞아?” 의문도
‘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저게 바로 1.8나노 반도체 웨이퍼?”
원조 ‘반도체 거인’ 인텔이 업계를 웅성이게 하는 깜짝 발표를 했습니다. 무려 1.8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웨이퍼(반도체 원판)을 공개한 겁니다.
삼성전자와 TSMC는 2025년에서야 2나노 공정 기반의 반도체를 양산할 계획인데, 아직 시제품이긴 하더라도 인텔이 벌써 1.8나노 웨이퍼를 공개한 것이 놀랍습니다. 이제 반도체 업계의 경쟁이 1나노를 넘어 0.1나노 차이 싸움으로 심화되는 모습입니다.
반도체 파운드리에서 0.1나노 차이는 도대체 어느 정도 성능 격차를 만드는 걸까요? 인텔의 도발로 시작된 전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나노 싸움. 오늘 칩만사에서 살펴봅니다.
“머리카락 굵기 100만분의 1”…초초(超超)미세 싸움된 파운드리
‘0.1나노’ 차이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파운드리, 즉 반도체 위탁생산 과정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파운드리 업체는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이 설계한 반도체 제품을 위탁 받아 생산 및 공급하는 업체를 말합니다.
반도체 생산에는 집적 회로 장치가 쓰입니다. 통상 파운드리 공정의 수준을 의미하는 ‘나노’는 이 회로들 사이의 폭을 의미합니다. 3나노 공정 기반의 반도체라는 건, 회로 간 폭을 3나노로 줄여 만든 반도체라는 의미입니다.
회로 간 폭이 좁아지면 무엇이 좋을까요? 우선, 같은 웨이퍼 면적에 더 많은 회로를 심을 수 있어 더욱 정밀한 고성능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전력 소모도 줄어들고, 한번에 만들 수 있는 반도체의 양도 늘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1나노를 줄이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1나노는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입니다. 0.1나노면 100만분의 1입니다. 현존하는 기술 중에 최첨단 공정 기술이 지난해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양산을 시작한 3나노 공정인데, 여기서 더 줄이는게 쉽지가 않습니다. 초미세 파운드리 공정별 최초 양산 시기를 살펴보면 ▷2016년 10나노 ▷2019년 7나노 ▷2020년 5나노 ▷2022년 3나노 순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인텔이 1.8나노 기반 웨이퍼를 들고 나왔으니, 다들 놀랄 만하죠.
삼성·TSMC보다 빠르다?…일종의 선전포고
지난 19일(현지시간) 열린 인텔의 연례 개발자 행사 ‘인텔 이노베이션(Intel Innovation)’에서 팻 겔싱어 인텔 CEO는 1.8나노 웨이퍼를 손에 들고 “내년 1분기에 (1.8나노) 반도체 설계를 공정으로 보낼 예정”이라며 “인텔이 제시했던 4년 내 5단계 공정 도약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인텔은 지난 2021년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하면서 5가지 공정 개발 로드맵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 중 1.8나노 공정이 마지막 단계입니다.
팻 겔싱어 CEO의 말이 실현된다면, 인텔은 삼성전자나 TSMC보다 먼저 2나노 미만의 초미세 공정 개발에 성공해 고객사 확보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될 전망입니다. 사실상 이번 공개로 ‘우리가 세계 최초 타이틀을 따겠다’며 삼성과 TSMC에게 선전포고를 한 셈입니다.
삼성전자와 TSMC는 2025년부터 2나노 반도체를 양산할 예정입니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고객사를 대상으로 개최한 올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23’에서, 오는 2025년 2나노 공정 양산에 들어간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22’에서는 2027년 1.4나노 공정 양산에 들어간다고 밝혔습니다.
“진짜 1.8나노 웨이퍼 맞아?”…의문스런 시선도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번 인텔의 1.8나노 기반 웨이퍼가 진짜 제품이 맞냐는 의심어린 목소리도 나옵니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인텔의 기술력입니다. 현재 삼성전자와 TSMC는 3나노 공정 기반 반도체를 양산하고 있지만, 인텔은 7나노 기반에 그칩니다. 아직 선두업체들의 현재 기술도 따라잡지 못했는데, 이 둘을 앞지른다고 하니 진정성에 대한 의심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둘째는 1.8나노 공정 반도체를 실현하는데 꼭 필요한 장비가 아직 시장에 도입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8나노 공정 기반 반도체를 양산하려면,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의 ‘하이 뉴메리컬어퍼처(이하 하이NA)’ EUV(극자외선) 노광장비가 필수적입니다. 차세대 EUV 장비로 불리는 하이NA는 기존 EUV보다 렌즈와 반사경 크기를 키워 더 미세한 회로를 새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ASML이 아직 파일럿(시범) 제품조차 고객사들에게 보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이NA 장비가 있어야 1.8나노 공정 기반 제품을 만들 수 있는데 어떻게 시제품 웨이퍼를 공개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ASML이 연말 쯤 고객사들에게 파일럿 제품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그 후에도 몇 달의 조정 기간을 거칠 것으로 보여지는데, 당장 내년 1분기부터 양산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게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2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 경쟁이 심화될수록 ASML 하이NA 장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질 전망입니다. 하이NA 1대의 가격은 3억~3억5000만 유로, 한화로 약 4300억~5000억원 정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ASML은 하이NA 장비를 2027년까지 연간 20대까지 제조하겠다는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