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머나먼 우주에서 시공간을 뒤틀고(인터스텔라), 제 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테넷)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시계’ 만큼 중요한 물건이 있을까? 분초를 다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에 놓인 천재 과학자 오펜하이머라면 또 어떨까.
시계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서 언제나 의미심장한 소품이다. 그런 놀란 영화에 3연속 등장한 시계 브랜드가 탄생했다. 할리우드가 사랑하고, 미국 펜실베니아에 뿌리를 둔 ‘해밀턴’(Hamilton)이다.
놀란 감독은 20세기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의 손목에 어떤 시계를 채웠을까. 세계 최초로 핵무기를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배우 킬리언 머피의 손목에 3개의 시계가 채워졌다.
천재·불륜·자살·전쟁…비범했던 그 남자 위해 공수한 시계는?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 킬리언 머피(Cillian Murphy)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40년에 걸친 영화에서 세 개의 서로 다른 해밀턴 시계를 착용했다.
킬리언 머피가 착용한 시계는 수집가들로부터 공수한 빈티지 제품이다. 영화 속 모델은 쿠션 비(Cushion B), 렉싱턴(Lexington), 엔디콧(Endicott) 등이다. 모두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30~1940년대 생산됐던 제품이다.
다른 배우들이 착용한 시계들 역시 지금은 구하기 힘든 그 시절 물건이다.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 오펜하이머 역의 에밀리 블런트는 1947년 출시된 14K ‘레이디 해밀턴 A-2’을 차고 등장한다. 부유하고 화려하면서도 지적이고 유별난 극중 캐릭터와 어울리는 모델이다.
맷 데이먼(Matt Damon)이 연기한 레슬리 그로브스 주니어(Leslie Groves, Jr.) 중장의 시계는 1920년대 생산된 클래식한 ‘파이핑 록’(Piping Rock)과 1940년대 출시된 ‘밀리터리 오드넌스’(Military Ordonance)로 거칠지만 인간적인 극중 캐릭터와 어울리는 디자인이다.
인터스텔라·테넷 그 시계, 놀란 감독 영화마다 해밀턴…왜?
해밀턴은 영화 제작의 초기 단계부터 영화 관계자와 긴밀하게 협력해 영화에 어울리는 시계를 선정하거나 자체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속 해밀턴 시계는 단순 간접광고(PPL)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영화 속 인물의 특징과 스토리에 부합하기 위해 디자인부터 개발까지 수 개월의 협업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아서다.
놀란 감독 전작인 ‘인터스텔라’(Interstellar), ‘테넷’(Tenet)에도 영화를 위해 일부러 제작한 모델이 등장한다. 신작 오펜하이머에서 엄청난 스케일의 트리니티 핵 실험조차 컴퓨터그래픽(CG)이 아닌 실사 촬영을 고집한 놀란 감독의 뚝심 탓에 영화 속 시계 역시 요령없이 실제 설계를 그대로 반영해 구현했다는 후문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전 미 항공우주국(NASA) 조종사로 설정된 쿠퍼가 착용한 시계는 기성품인 카키 파일럿 데이 데이트(Hamilton Khaki Pilot Day Date)다. 단, 딸인 머피가 차게 될 시계는 달랐다.
인터스텔라 소품 제작을 총괄한 리치 크레머(Ritchie Kremer)에 따르면, 쿠퍼가 딸 머피에게 건네준 시계는 케이스와 다이얼, 핸즈, 인덱스(숫자 표시) 등을 모두 새롭게 조합한 전에 없던 모델이었다. 해밀턴은 의뢰 받은 디자인에 맞춰 실제로 작동하는 같은 디자인의 시계를 총 10개 제작했다. 딸 머피의 극중 애칭에서 따온 ‘머프’(Murph) 시계가 탄생한 순간이다.
주인공 부녀가 시계 초침으로 소통한다는 설정 덕에 영화 속 머프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다만, 인터스텔라가 글로벌 흥행 끝에 9000억원 가까운 수익을 낸 뒤에도 영화 팬들은 한동안 머프를 손에 쥘 수 없었다. 머프는 양산형 모델이 아닌 소품용 시계였기 때문이다. 머프는 5년에 걸친 끝없는 제작요청이 있고 난 2019년에야 직경 42㎜ 사이즈 제품으로 출시됐다.
제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 ‘테넷’(2020)에는 영화 속 설정을 위해 특수 기능을 첨가한 해밀턴 카키 네이비 빌로우제로가 등장한다. 영화 속 특정 장면을 위해 기존 모델에 없던 디지털 스크린을 추가했다. 다른 감독이었다면 CG로 처리할 수도 있었던 디지털 스크린 부분은 놀란의 아날로그 정신에 맞게 실제 소품으로 구현됐다. 반면 테넷을 기념한 스페셜 에디션인 빌로우제로는 기성품 오토매틱 무브먼트 디자인 그대로다.
美현대사, 영화 같은 순간마다 등장…‘국민 시계’ 꿰찼다
스위스가 주름 잡은 럭셔리 시계 시장에서 해밀턴은 미국적 뿌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몇 안 되는 브랜드다. 해밀턴의 브랜드 히스토리에서 눈에 띄는 건 롤렉스나 오메가 등 고급 명품(하이엔드 럭셔리)이 채울 수 없는 빈틈을 미국식 실용주의로 파고들어 일찌감치 국민 브랜드 반열에 오른 지점이다.
해밀턴은 1892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터에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130년이 넘게 이어져 내려온 역사는 미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마다 함께했다. 지난달 문을 연 랭커스터 매장도 1892년 당시의 미국 제 1호 매장을 그대로 재현한 빈티지 컨셉으로, ‘아메리칸 헤리티지’를 놓치지 않고 강조한다. 미국 육해공을 가로지르며 활약한 해밀턴의 히스토리를 소개하기 위한 장소다
해밀턴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영화 오펜하이머 속 배경이 된 제 2차 세계대전이다. 레일로드 시계회사로 시작한 해밀턴은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군용 시계 제작에 두각을 나타냈다. 전쟁 중인 1942년엔 시판용 시계 제작을 접고 미 군수품 공급에만 몰두하며 ‘애국 기업’으로 급부상했다. 해밀턴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시계는 손목시계와 해양 크로노미터를 포함해 총 백만 개가 넘는다. 당시 미 해군 잠수 특공대 대원들에게 공급했던 군용 손목시계 ‘캔틴’은 해밀턴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기도 했다.
전쟁 후 해밀턴의 실용주의는 롤렉스나 오메가 등이 등한시한 전자시계와 디지털 시계로 뻗어나갔다. 1957년엔 ‘세계 최초’ 전자 배터리 시계를 내놨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착용해 글로벌 히트 모델이 된 삼각 케이스의 벤츄라(Ventura)다.
1970년 공개된 ‘세계 최초’ LED 디지털 시계 펄사(Pulsar)도 해밀턴이 만들었다.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1973)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로 분한 로저 무어가 착용했던 모델이다.
“널 좋아해, 진심이야”…영화 향한 해밀턴의 도전은 ‘계속’
해밀턴은 영화 제작 뒤편의 스태프들을 위한 어워드를 개최해왔다. 2006년부터 열린 ‘해밀턴 비하인드 더 카메라 어워드’(Hamilton Behind the Camera Awards)는 어느새 18년째를 맞이했다.
해밀턴은 배우나 감독이 아닌, 스태프를 시상식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무대 디자이너, 시나리오 작가, 소품 마스터, 시각효과 전문가, 의상 디자이너 등을 위해 상을 준다. 해밀턴이 영화 속 소품 시계를 제작하기 위해 협업한 바로 그 직군들이다.
이같은 헌신은 해밀턴이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든든한 파트너인 동시에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후원사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을 듣게 했다. 세계적 거장으로 올라선 놀란 감독과 세 작품을 연달아 협업할 수 있었던 배경엔 이런 ‘의리’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소품 하나만 집어들어도, 그 안에 영화가 담겨 있어야 한다”. 2016년 영화 ‘아가씨’로 한국인 최초 칸 영화제 벌칸상(촬영·편집·미술·음향 등 아티스트에게 주는 번외 상)을 수상한 류성희 미술감독의 말이다. 하나의 순간이 모여 전체를 이루듯, 작은 소품과 그 안에 들어간 노력이 한 편의 걸작을 만든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견고히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식 시계의 내부와 닮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