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일까지ㆍ연극 ‘나무 위의 군대’
태평양 전쟁의 실제 이야기 무대로
독특한 캐릭터 해석ㆍ웃음 코드 더해
드라마 보듯 자연스러운 손석구 연기
일부 불분명한 대사ㆍ빈약한 감정 전달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태평양 전쟁 막바지, 거대한 가쥬마루 나무가 수호신처럼 자리잡은 오키나와. 어릴적 함께 노닐던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신병이 상관에게 지난 추억 하나를 꺼낸다.
“친구 한 명이 신발을 잃어버려 같이 찾아주고 있었어요. (죽은 병사를 바라보며) 그런데 그 모습을 온종일 지켜보던 저 친구가 집에 불러 밥을 줬어요. 정말 착한 친구였어요.”
신병의 이야기를 듣던 상관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중간부터 얘기가 이상해잖아. 이 이야기에서 제일 착한 사람은 신발을 같이 찾아주던 너야.” 신병이 씨익 웃으며 대꾸한다. “그걸 이제 아셨어요? 제가 그 얘기 하고 싶었어요.” 무해한 얼굴을 한 신병은 묘하게 알 수 없는 캐릭터다. 상관이 결국 한 마디 한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나무 위에 단 두 사람만의 군대가 있다. 1945년 4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전쟁이 끝난지도 모른 채 나무 위에 숨어 살던 두 병사의 실화. 연극 ‘나무 위의 군대’(8월 12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다. 이 작품은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이노우에 히사시의 미완작을 젊은 작가 호라이 류타가 완성해 만들었다.
연극은 개막 전부터 화제였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JTBC)를 통해 이른바 ‘구씨 신드롬’을 일으킨 손석구가 9년 만에 등판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350석의 소극장 무대는 TV와 스크린에서 만나던 손석구를 보다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객석은 매회 매진을 기록, 제작사는 일찌감치 일주일 연장을 확정했다. 공연장 역시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한다. K-팝 그룹의 공연장에서 보던 응원봉과 손석구 이름이 적힌 머리띠까지 하고 온 관객들로 가득 찼다.
손석구가 연기하는 신병은 그가 나고 자란 섬 오키나와를 지키기 위해 전쟁의 한복판으로 들어온 소년병이다. 그는 본토에서 파견 나온 상관(김용준 이도엽)과 나무 위에서 전쟁의 한복판을 살아간다. 포로가 돼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선택한 일본군의 행동규범 ‘전진훈(戰陣訓)’은 두 병사를 나무 위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2인극이나, 정령(최희서)이 등장해 해설자 역할을 한다.
나무 위에서 치르는 전쟁은 환각같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상관은 나무 위에 올라온 것은 도피가 아닌 적군을 감시하는 ‘잠복’이라 하고, 적군의 식량을 먹자는 신병의 제안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거부한다.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신념을 깊이 새긴 인물이다. 전쟁을 경험한 적 없는 신병은 해맑다. 나고 자란 섬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전쟁터에 나온 신병은 상관을 의지하면서도, 장기간 숨어지내는 상황을 답답해한다.
마을을 지키려는 신병과 달리 자신의 안위를 더 우위에 두는 것 같은 상관에 대한 의심이 싹트고, 이 둘 사이엔 균열이 생긴다. 상관에게 신병은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다. 자신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하고, “왜 싸우지 않고 나무에 숨어 있냐”고 묻는 신병은 상관의 가슴 깊이 자리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분노가 치민다. 신병 역시 믿고 따르는 상관의 행동이 과연 옳은 길인지 끈질기게 되묻는다. 때로는 그 티 없는 의문과 의심이 살의를 느끼게 할 정도다.
연극은 전쟁이 야기한 비극의 한복판에서 부딪히는 인간의 존엄과 두 인물의 신념을 이야기한다.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나무 위의 군대’는 전쟁 속 실제 이야기를 담았지만,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부조리를 마주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선택과 가치관, 신념의 충돌을 들여다 보게 한다.
하지만 관객들이 이 무거운 이야기와 전쟁의 비극을 받아들이기엔 인물의 심리 묘사나 감정 전달이 치밀하진 않다. 지독한 전쟁 속에서 상관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군인이라기 보다 제 목숨 하나를 건사하고자 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보인다. 그런 상관을 바라보는 신병의 의구심과 갈등, 전쟁에 대한 환멸이 분명하게 전달되진 않는다. 게다가 무대는 전쟁의 무거움에 잠식되기 보다 전쟁 속에서 인간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웃음 코드’로 삼는다. 적군의 식량을 맹렬히 거부하는 상관의 속내를 정령이 읊어준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상관 옆에서 “고기, 환장했다”라고 말하자, 여지없이 웃음이 터진다. 손석구가 해석하는 신병 캐릭터의 독특함도 이 작품의 유머러스함에 일조한다. SNS나 개그 프로그램이 그리는 MZ세대를 보는 것처럼 황당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신병에게선 전쟁통에서의 갈등과 고뇌가 비치지 않는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이점은 소극장이지만 모든 배우가 마이크를 착용하고 무대에 선다는 것이다. 마이크의 사용은 다른 연극과의 차별된 지점을 만든다. 연극 무대에서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한 연극의 본질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연극성을 중시하는 배우와 제작자들은 마이크의 사용이 대사 전달에는 도움이 되나, 감정 전달에는 방해가 된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한다.
‘나무 위의 군대’의 경우 마이크의 사용이 손석구의 연기 스타일을 살리는 장점이 됐다. 그는 안방에서 TV를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드라마 연기를 보여준다. 나른하게 힘을 뺀 연기와 일상의 대화를 하는 듯한 자연스러운 말투가 무대에서도 이어진다. 때로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CF 속 대사를 듣는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손석구다. 마이크가 없었다면, 분명히 전달되지 않았을 대사를 인공 장치의 도움으로 살려낸 셈이다. 그럼에도 몇몇 대사들은 웅얼거리는 발성으로 인해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고, 툭툭 내뱉는 무심한 언어 사이로 신병의 감정이 충분히 전달되진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손석구는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본에선) 속삭이라고 하는데, 그럴 거면 마이크를 붙여주든지 무대에선 속삭이는 연기를 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 가짜 연기를 시키는 것 같아 연극을 그만두고 매체로 오게 됐다”며 “지금의 내 연기가 통할지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험의 당락을 가리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