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매진
헨델, 브람스, 구바이둘리나까지
낭만·현대 등 시대 넘나들며 연주
익숙함과 낯섦의 조화 인상적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쾅, 쾅, 쾅.’
천둥처럼 쏟아져 내린 난폭한 음표에 온 무게가 실렸다. 건반으로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앞에서 그는 이전엔 본 적 없던 ‘실험적 음악가’였다. ‘건반 위의 음유시인’은 낭만적인 아르페지오를 내려놓고, 난해하고 복잡다단한 현대음악을 풀어냈다. 비스듬히 서있는 어깨는 맹렬한 기세로 건반 위에 다이빙하며 심연의 어둠을 끌어왔다. 구바이둘리나의 ‘샤콘’은 이날의 백미였다.
눈앞을 가리는 폭우에도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2500명의 관객으로 가득찼다. 2년 만의 전국 리사이틀로 돌아온 조성진의 무대가 시작된 첫 날이기 때문이다. 콘서트홀 주차장은 이미 공연 시작 30여분 전부터 만차를 기록했고, 프로그램북 1800부는 공연 전 다 팔려나갔다.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지켜온 ‘클래식계의 슈퍼스타’ 자리는 굳건했다.
이날의 리사이틀에서 조성진은 지난 2월 발매한 신보 ‘헨델 프로젝트’의 수록곡 중 헨델 ‘건반 모음곡 5번’과 브람스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를 선곡했다. 사실 이 공연은 ‘헨델 프로젝트’ 발매 전이었던 지난해 10월 조성진이 성남아트센터에서 ‘유일’하게 열었던 리사이틀 무대 프로그램 중 세 곡을 가져왔다. 당시 조성진은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Op. 13’을 비롯해 이 두 곡을 연주했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새롭게 선보인 곡은 구바이둘리나의 ‘샤콘’과 브람스 피아노 소품이었다.
프로그램의 ‘전략적 구성’이 흥미로웠다. 바로크 시대를 상징하는 헨델로 시작해 올해로 92세를 맞은 현대 음악가 구바이둘리나가 배치됐고, 그 뒤로 브람스 변주곡이 이어지며 1부가 막을 내렸다. 그런 다음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과 슈만으로 낭만성을 끌어올렸다. 1, 2부의 마지막 곡인 브람스와 슈만은 모두 “변주곡인 동시에 오케스트라의 효과를 내는 곡”(허명현 음악평론가)이라는 점에서 음악가 조성진의 ‘구조적 설계’가 눈에 띄는 지점이었다.
첫 리사이틀은 ‘익숙한 조성진’과 ‘낯선 조성진’의 조화였다. 단 한 번의 페달링도 없이 이어진 헨델의 ‘건반 모음곡 5번’은 무겁고 묵직하면서도 때로는 둔탁했다. 그러면서도 살랑거리는 즐거움이 간간이 고개를 내밀어 분위기를 바꿨다. 과장 없이 헨델의 묘미를 살린 연주였다. 이 곡은 헨델이 하프시코드를 위해 작곡했다. 현을 뜯어 소리를 내는 건반 악기인 하프시코드 대신 피아노로 연주한 헨델에선 직관적이면서도 다채로운 음색을 만날 수 있었다. 누른 듯 만 듯한 터치로 손가락을 내려놓으면서도 단 하나의 음도 뭉개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물기를 먹은 듯한 음표들의 향연이 이어졌다.
첫 곡을 마친 이후 조성진은 숨을 골랐다. 늘 그랬듯, 손수건으로 피아노를 닦아낸 뒤 한 번의 호흡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헨델에서 브람스로 이어지는 중간 단계에 끼어든 구바이둘리나는 이해하기 힘든 현대음악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피아노라는 악기 하나로 만들어내는 ‘불협의 세계’가 기묘했다. 흑백 무성영화를 만나는 것처럼 불안하고 불길하다가도 블랙홀처럼 빨려 들었다. 온 힘을 쏟아내는 격정적인 몸부림은 조성진 안에 자라난 괴물을 끄집어낸 것처럼 들렸다. 낯설지만, 자꾸 보고 싶은 조성진의 모습이었다.
브람스와 슈만은 익숙한 조성진이었다. 두 개의 변주곡은 샤콘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 각각의 변주곡들이 유연하게 연결되고, 그러면서도 저마다의 개성을 살렸다.
사뿐사뿐 나비가 날아오르듯 것처럼 시작된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브람스가 직조한 음악 구조 안에서 조성진은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모든 음표와 성부에 의미를 부여해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이 곡은 조성진이라는 피아니스트의 엄청난 기량과 색깔, 곡에 대한 해석 능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브람스의 세계는 조성진을 만나 더 견고해졌다.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에선 2곡 카프리치오가 인상적이었다. 무수히 많은 수수께끼가 내던져진 미로 속으로 안내하는 삐에로 같기도 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야 하는 도로시 같기도 했다. 5곡으로 접어들면 낭만주의 구바이둘리나를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브람스를 마친 뒤 쉼없이 이어진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에선 조성진의 장기가 또 한 번 이어졌다. 여러 악기로 빌드업 하듯 소리 하나하나를 차분히 쌓아올렸다. 그 소리 안으로 새겨진 감정의 조각들이 만나 증폭되면, 음악은 피아노로 듣는 오케스트라처럼 풍성해졌다. 아름다운 오른손의 선율이 투명하게 이어지고, 반복되는 선율은 변주에 변주를 거듭해 극적인 순간들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미련 없이 마침표를 찍어내는 단호함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앙코르는 조성진이 앞으로 이어갈 리사이틀에서 들려줄 또 다른 프로그램의 힌트였다. 그는 라벨의 ‘거울’ 중 세 번째 곡과 네 번째 곡을 들려줬다. 물 위를 노니는 요정이 만들어낸 청아한 음률에 놀랄 새도 없이 음악은 격렬한 파동을 일으켰다. 라벨의 ‘거울’은 조성진이 리사이틀에서 처음 연주하는 곡으로 5일 예술의전당, 8일 대전 예술의전당, 9일 부천아트센터 프로그램에 속해있다. 여러 번의 커튼콜 이후 조성진은 두 번째 손가락으로 ‘1’을 만든 뒤, 마지막 앙코르 곡인 헨델의 ‘B플랫 장조 사라방드’를 들려줬다.
리사이틀에선 흔치 않던 명장면도 많이 나왔다. 인터미션 때는 이종열 명장이 피아노 조율을 마치자, 관객들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커튼콜에서 조성진은 무대 오른쪽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 자신과 가장 멀리 있던 관객들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며 인사를 나눴다. 퇴장 전 1열에선 조성진의 멘토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무대 앞으로 나와 포옹을 했다. 두 사람이 양손을 잡고 으싸으싸 하는 모습에 객석에선 웃음이 터졌고, 무대 위에선 좀처럼 볼 수 없던 조성진의 함박웃음까지 만날 수 있었다. 공연 이후엔 우아한 흰 꽃을 들고 분주히 걸음을 옮기는 박찬욱 감독도 목격됐다. 조성진의 ‘소문난 팬’인 박 감독과 그의 인증샷은 공연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최고의 인기 사진’으로 공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