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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절도를 벌이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 사회의 무관심과 허술한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현대판 장발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실제 사건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굶주린 5살 손자…할머니는 라면을 훔쳤다
"할머니 배고파."
"사발면 남은 거 다 뭇나...할미가 찾아보께."
다섯 살 손자의 등을 다독인 뒤 허리를 굽혀 여인숙 방 안을 헤맸다. 두 평 남짓한 작은 방. 살림이라고는 아기 옷 몇벌과 중고로도 팔리지 않을만큼 낡은 장난감이 전부였다. 앉은 자리에서 눈으로만 훑어도 사발면이 있는지 없는지는 단숨에 알 터였다.
그렇지만, 그리도 오래 이곳저곳을 땀까지 흘려가며 찾아 헤맸다. 혹시라도 숨겨진 곳에서 사발면이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이 순간이 괴로워 숨고 싶은 마음이 뒤섞였다.
다섯살배기 손자와 함께 지방의 한 여인숙 달방에서 살고 있다. 외국인 며느리는 어린 아이를 두고 사라졌다. 아들이 타지에서 일용직을 하면서 돈을 부쳐주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데다가 금액도 일정치 않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월셋집에 살았지만 그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작은 모텔 방으로 들어왔다.
삼시세끼를 먹는 건 욕심이다. 손자의 또래 아이들은 부모와 돼지갈비며 돈까스며 맛있는 것들을 먹는다는데 라면 한 그릇 제대로 먹이지 못해 미안했다. 다음 달 숙박비는 낼 수 있을까, 이러다 정말 아이를 끌어 안고 길바닥에 내려앉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다음날 동네 슈퍼마켓을 갔다. 눈이 침침한 80대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였다. 이곳에서 라면 3봉지와 과자 하나를 가방에 황급히 쓸어담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늙은 주인이 눈치챈 건 아닐까' '뭐라고 변명을 하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행이 걸리지 않았다. 값을 지불한 생수 한병을 나무 그늘에 서서 냉큼 마셨다. 가방 안에 라면을 확인했다. 여전히 심장은 두근거렸지만, 손주에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도둑질은 한 달 간 지속됐다. 폐쇄회로(CC)TV가 없는 슈퍼마켓을 타겟으로 삼았다. 남의 밭에서 농작물을 훔치기도 했다. 계속되는 범행에 슈퍼마켓 주인의 경계가 느껴지자 대담하게 근처의 대형 마트로 옮겨 생필품을 훔쳤다. 그렇게 훔친 생필품 가격만 100만원이 넘었다. 늘 불안감과 죄책감에 휩싸였지만, 아이를 굶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경찰입니다. 최근에 마트에서 물건 훔치셨죠. 경찰서 가셔서 조사를 좀 받으셔야겠습니다."
어느날 여인숙으로 돌아가는 길에 경찰이 불러 세웠다. 대형마트에서 도둑질을 한 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도둑질은 막을 내렸다. 죄책감과 동시에 더 큰 막막함이 파도처럼 마음을 집어 삼켰다.
늘어가는 생계형 범죄…1~5월 절도 전년동기比 12%↑
경제규모는 급성장했지만, 생계형 범죄는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 생계형 범죄로 손꼽히는 절도는 계속해서 증가 추세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절도의 26.1%가 생계형 범죄에 준한다.
헤럴드경제가 경찰청으로부터 제공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5월 절도 신고 접수 건수는 11만4726건으로 전년 동기(10만1960건)대비 약 12% 증가했다.
특히 경제 능력이 가장 낮은 18세 이하·61세 이상 여성의 비율이 높았다. 경찰청 '2021 범죄통계'에 따르면, 전체 절도 범죄자 중 18세 이하·61세 이상 여성의 비율은 약 13%에 달한다. 전체 절도 범죄의 21%는 슈퍼마켓, 상점, 편의점 등 생필품이 판매되는 장소에서 발생했다.
지난 14일에는 6살 딸에게 훔친 방울토마토를 먹이고 남은 것을 들고 경찰서를 찾아가 사실을 실토한 40대 싱글맘이 입건됐다. 그는 혼자 아이를 키우며 생활고에 시달렸고, 방울토마토가 먹고 싶다던 딸의 말에 마트에서 절도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상황을 고려해 훈방조치로 사건을 종결했다.
지난 3월에는 강원도 원주시 대형마트에서 생후 2개월된 신생아에게 줄 분유와 기저귀를 훔친 40대 미혼모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그는 "아이 아빠는 도망갔고, 두 달된 신생아에게 먹일 분유가 떨어져 범행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생계형 범죄라고 봐줄 순 없어"…찾아가는 복지시스템 시급
비록 생계형 범죄라고 하더라도 이를 용인해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생계형 범죄를 묵인하게 되면,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거나 생계형 범죄로 시작해 상습 범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액의 생계형범죄인 경우 피해규모, 피의자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경미범죄심사위원회'에서 감경 또는 형사 처벌 대신 피해 구제 방안을 논의하기도 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생계형 범죄라할지라도 사회가 이를 용인하고 묵인하면, 악용하는 범죄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며 "합당한 처벌 및 피해액 변제와 함께 재발 방지를 위한 보호 장치 마련이 동반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생계형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다 촘촘한 복지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 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불우한 이웃들에 관심을 가지도록 환경의 변화도 절실하다는 진단이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수많은 기관이 한국 사회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런 사건이 발생하는 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기관이 실적에만 매달려 실제 복지가 필요한 이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며 "기관별로 강점들이 있는데, 서로 실적 경쟁에만 매몰돼 시너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어떤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정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삶에 쫓겨 정보를 찾기조차 쉽지 않지만, 현재의 복지 정책은 이런 수급자가 혜택을 찾아야 하는 수동적 모델에 가깝다.
노 교수는 "복지 기관 등에서 직접 나가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없는지 묻는 등 적극적인 현장 활동이 필요하다"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찾아오는 것이 아닌, 찾아가는 복지 정책이 실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