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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실연당한 사람들은 왜 '비빔밥'·'규동'을 찾을까[채상우의 미담:味談]
왼쪽부터 드라마 '내이름은 김삼순', '사랑이 하고 싶어x3' [각사 방송 캡처]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100g당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송로버섯, 한 점에 수십만원하는 최고급 일본산 소고기, 돈이 있어도 사기 힘든 오래된 와인...

사람들은 '명품'을 좇는다. 그것이 '욕망'이든 '취향'이든. 음식도 예외가 아니다. TV 프로그램에선 평범한 사람들이 기념일에도 맛보기 힘든 음식들을 자랑하듯 선보이고, 이를 동경하듯 우리는 바라본다.

그럴수록 상대적으로 값싼 음식들은 외면받는다. 한국의 '비빔밥'과 일본의 '규동'이 그렇다. 그러나 두 음식은 가격으로는 매길 수 없는 곰국 같은 진한 '위로'를 품고 있다. 손수 지은 밥과 반찬, 그 집밥의 '만만함'이 역설적이게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국민음식' 비빔밥과 규동을 한때 인기 드라마를 통해 재조명해봤다.

이별의 양푼비빔밥 : 아픔까지 비벼 먹는거야

실연당한 사람들은 왜 '비빔밥'·'규동'을 찾을까[채상우의 미담:味談]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MBC캡처]

"인생 뭐 별거 있어? 오늘까지 잘 먹고 내일부터 잘 살면 되지."

연인과의 이별에 이어 실직 그리고 짝사랑의 아픔까지 3단 콤보를 겪은 삼순은 어느 날 밤 뭐에 홀린듯 자다말고 일어나 양푼을 집어든다. 보리밥을 큰 주걱으로 푹푹 푼 뒤 냉장고를 뒤적여 열무김치와 몇가지 나물을 올리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어 쓱쓱 비빔밥을 비빈다. 곁들인 소주 한잔에 그간의 시름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의 한 장면이다. 현실도 드라마와 별반 다르지 않다. 누가 가르쳐준적도 없었는데, 실연당한 한국 여성이 본능적으로 한밤에 비빔밥을 비비는 장면은 굳이 연출하지 않아도 흔하다.

밖에 나갈 힘도 없어 방구석에 틀어박혀, 그와 나눈 문자메시지를 백번도 넘게 다시 읽었다. '나쁜 자식..' 사진 속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밉다. 그런데 보고 싶다. "가시나야 남자 하나 때매 굶어 죽을끼가. 궁상맞게 그르지 말고 나와 밥이나 먹어!" 엄마의 핀잔도 휘휘 손을 저어 무시해버렸다. '꼬르륵' 실연의 아픔은 한밤 중이 돼서야 배고픔 앞에 백기를 들었다. 가족 몰래 눈물젖은 비빔밥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이별 신고식은 완성됐다.

비빔밥을 만드는 건 이들에게 하나의 '의식'이다. 사랑했던 감정, 그와 함께 했던 추억, 보고싶은 그리움을 한 그릇에 비벼 슬픔과 함께 삼키는 것이다. 비빔밥은 따뜻한 위로의 음식이자, 실연을 딛고 일어나겠다는 굳은 의지다.

사랑의 규동 : 싸다고 싸구려는 아니야

실연당한 사람들은 왜 '비빔밥'·'규동'을 찾을까[채상우의 미담:味談]
'사랑이 하고 싶어x3' [유튜브 캡쳐]

"나는 생일에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보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신은 왜 사랑하는 감정 같은 걸 만든 걸까. 그런 것들이 없다면, 이런 쓸쓸한 생각같은 것 하지 않아도 되는데."

24살 생일을 맞은 나카시마 미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스스로를 위한 선물로 평소 갖고 싶었던 예쁜 구두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갔지만, 간발의 차이로 구두는 이미 팔리고 없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그가 향한 곳은 360엔짜리 규동을 파는 작은 식당. 미칸은 그곳에서 자신처럼 쓸쓸해 보이는 남자 아카이 료스케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날 이후 연락처도 모르는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녀는 매일 규동가게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한국에 비빔밥이 있다면, 일본에는 규동이 있다. 규동은 여러모로 비빔밥과 닮은 꼴이다. 서민 음식의 대표주자라는 것도 그렇고, 올라가는 재료에 따라 육회비빔밥, 김치규동 등 이름이 다양해지는 것도 똑같다. 더 들여다 보면 고독한 사람의 쓸쓸한 마음을 대변하는 음식이라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또, 아픈 마음을 다독여 위로하고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는 음식으로도 통한다.

일본 드라마 '사랑이 하고 싶어x3(戀がしたいx3, 2001)'에서 여주인공 미칸에게 규동은 처량한 현실의 메타포이자, 그를 위로하는 유일한 친구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오직 규동만이 묵묵히 그의 곁을 지킨다. 결국에 규동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는 매개체가 된다.

실연당한 사람들은 왜 '비빔밥'·'규동'을 찾을까[채상우의 미담:味談]
영화 '묻지마 사랑'의 두 주인공이 규동 가게에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 [유튜브 캡쳐]

영화 '묻지마 사랑(箱入り息子の恋, 2013)'에서도 규동에 대한 이런 일본인들의 인식이 엿보인다. 영화에서 규동은 인연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35살 시청 공무원 켄타로는 야망도 사랑도 없이 하루 하루를 쳇바퀴 굴러가듯 살아가는 인물이다. 정확히 정해진 시간에 집에서 점심을 먹고 연필깎이, 탁상시계 위치도 같은 자리에 놓아야 하는 켄타로의 삶은 지루해보이기까지 하다. 외식이라곤 프랜차이즈 규동이 전부다.

우연히 다가온 시각장애인 나오코와 사랑에 빠진 후 딱딱했던 그의 삶에도 균열이 생긴다. 규동가게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13년 동안 시도해보지 않은 승진시험에 도전하는 등 소소한 '일탈'을 즐긴다. 둘의 사랑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반대로 이별의 위기에 놓인 나오코는 켄타로와 자주 갔던 규동가게에 간다. 나오코를 몰래 따라온 켄타로도 먼 발치에 자리를 잡는다. 둘은 각자 떨어져 눈물로 범벅된 규동을 먹으며,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는다.

비빔밥과 규동의 화려한 외출

실연당한 사람들은 왜 '비빔밥'·'규동'을 찾을까[채상우의 미담:味談]
아보카도 건강 비빔밥 [출처=서정아의 건강밥상]

쓸쓸하고 처량하고 애틋했던 비빔밥과 규동의 이미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비빔밥과 규동의 변신은 '성형수술' 수준이다. 소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화려하고 색다른 형태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사실 비빔밥이 건강에 좋은 음식은 아니다. 고탄수화물·고나트륨으로 성인병 위험을 높이며 다이어트의 적(敵)으로 불린다.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에게 최근에는 '건강비빔밥'이 인기를 끌고 있다.

밥은 줄이고 아보카도를 듬뿍 올린 아보카도 비빔밥이나, 고추장 대신 기름과 간장 조금으로 맛을 내거나 마늘콩소스를 넣은 비빔밥도 별미다. 동남아에서는 현지화돼 고수를 올려 '서울볼(Seoul Bow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식보다 먼저 정착한 일식의 영향으로 비빔밥을 비비지 않고 덮밥처럼 그대로 떠먹는 경우도 많다. 더 나아가서는 밥을 아예 없애고 갖가지 채소에 고추장 베이스 소스를 비벼 먹는 사실상 샐러드에 가까운 음식도 비빔밥으로 소개돼 해외에서 팔리고 있다.

실연당한 사람들은 왜 '비빔밥'·'규동'을 찾을까[채상우의 미담:味談]
이세규로 만든 1200엔짜리 규동. [출처=부타스테]

규동은 고급화를 택했다. 규동의 가격은 올라가는 소고기가 결정한다. 도쿄에 위치한 스키야키가게에서 파는 규동은 브랜드 소인 '이세규(伊勢牛)'로 만들어 무려 일반 규동의 3배 가격인 1200엔이 넘었다. 히로시마에 있는 규동가게는 일본 최고급 소인 고베규를 올려 1300엔이 넘는 규동을 팔기도 했다.

그렇다고 비빔밥과 규동의 지향점이 '명품'은 아니다. 오랜만에 멋을 내고 기분을 전환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린 결국 비빔밥과 규동이 다시금 평범한 모습으로 작은 식탁 위에 오르기를 기대한다. 화려한 파티를 끝내고 돌아와 깨끗이 화장을 씻어내고 평범한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고 소파에 몸을 기댔을 때 그 편안함처럼 말이다. 수수한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비빔밥과 규동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