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의 세 시간 원맨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온수 파이프 수리비 50달러, 세탁기 수리비 90달러. 매달 16달러씩 내던 지긋지긋하던 할부가 끝이 난 냉장고는 기어이 쓸모까지 내놓고 만다. 낡음과 늙음이 공존한다. 낡아가는 것들 옆에 늙어가는 자들이 존재한다.
“아버진, 돈을 엄청나게 벌어본 적도 없고, 신문에 이름이 난 적도 없지만, 한 인간이야. 관심을 가지라고. 36년이나 돼. 회사에 다닌 거. 이제 늙었다고 봉급을 안 준대. 아버지한테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어.” (윌리의 아내 린다 로먼의 대사 중)
꼰대 같은 아버지는 늙어갈수록 잔소리가 늘었다. 어릴적과 달리 부자 관계는 나날이 냉랭해졌다. 부쩍 실수가 잦은 아버지의 모습이 혈기왕성한 아들들에겐 답답하고 한심하기만 하다.
대단한 ‘삶의 혁명’ 같은 것은 없었다. 평범하고, 성실한 욕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니 어느덧 나이테가 늘었다. 무대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돌아본다. 현대 희곡의 거장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1949년 미국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퓰리처상, 토니상을 휩쓸었다.
이 작품은 배우 박근형의 연기 인생 60주년을 축하하는 연극으로 관객과 만났다. 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박근형은 평범한 중산층 가장 윌리 로먼 역을 맡아 세 시간 내내 한 사람의 삶을 그린다.
무대의 배경은 미국 대공황기. 모든 것이 변화를 맞는 시기에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새로운 치즈를 맛보는 것조차 싫어하는 사람. 그 사람의 직업은 세일즈맨이다. 세상의 모든 물건을 파는 사람. 물건을 팔기 위해 감언이설로 사람의 마음을 살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말을 아껴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당당해야 하고, 때로는 허리를 굽힐 주 알아야 한다. 일평생 돈을 벌었다. 부자가 된 적은 없던 그의 삶은 많은 순간 고단했다. 그만큼 행복도 감격도 많았지만, 시간과 삶의 무게에 무뎌진 감정이다.
시대도 배경도 다른 공간의 이야기이지만, 박제된 무대는 현재의 관객들이 공감할 만한 동시대성과 보편성을 담았다. 연극이 그리는 부자의 갈등, 가장의 무게, 세일즈맨으로 대표되는 직장인의 쓸모…. 시간이 쌓이면 낡고 늙어 쓸모가 사라지는 모든 존재의 비애가 이 연극에 담겼다.
무대로 돌아온 박근형의 연기는 TV 화면을 찢고 나온 것처럼 흡인력이 높았다. 세 시간 내내 무대 위에서 가장 많은 대사를 소화하면서도 정확한 전달력과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을 보여줬다.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해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는 윌리의 모습을 그려가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스스로의 부족을 감추기 위해 자신감과 허세로 무장한 젊은 시절, 고집불통 꼰대가 돼버린 현재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자체 플래시백’을 만들어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결심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한 번도 속죄하지 못한 아버지는 아들의 용서와 사랑을 확인한 뒤 회한과 기쁨을 마주하고, 그런 아들에게 사망 보험금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어리석은 확신으로 안도하고, 그러면서도 떨쳐낼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과 생에 대한 미련이 뒤엉킨다. 박근형을 위한 무대였다. 무거운 이야기는 능청스러운 둘째 아들의 연기와 대사가 웃음을 더하며 극의 분위기를 바꾼다. 세 시간의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