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대표 국민주로 꼽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주주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반도체 업종 주가가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불황에 빠져있던 반도체 시장 개선 시점에도 이목이 쏠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반도체 재고율은 역대 최고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하반기 업황 개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왜 주가는 상승가도를 달리는 걸까요? 오늘 칩만사는 반도체 업종 주가의 급등 원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역대 최고 수준 재고율에, 가격도 떨어졌는데…주가 폭발한 삼성·SK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4월 우리나라 반도체 생산은 0.5% 증가했지만 출하가 20.3% 감소했습니다. 공장은 돌아가지만, 제품이 팔리지 않으니 재고는 그대로 쌓이고 있습니다. 반도체 재고율은 267.9%로, 이는 1997년 3월(289.3%) 이후 26년 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재고율이란 재고지수를 출하지수로 나눈 값인데요. 재고율이 100%를 넘는다는 것은 공장 밖으로 출하된 물건보다 재고로 쌓인 물건이 더 많다는 의미입니다. 재고율이 거의 270%에 달하니, 반도체가 아직 얼마나 팔리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가격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의 5월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전월보다 3.45% 내린 1.40달러로 집계됐습니다. D램 가격은 지난 4월 19.89% 급락했는데 이보다 더 떨어진 셈입니다.
그럼에도 대표 반도체 기업들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훨훨 날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2일 전일대비 1.83% 오른 7만2200원으로 마감했습니다. 이번 달에만 10% 가까이 올랐고, 올 초와 비교해서는 수익률이 30%가 넘습니다.
SK하이닉스의 상승세는 더 가파릅니다. SK하이닉스 주가는 2일 기준 11만300원으로, 한달 전과 비교해 22.3% 가량 급등했습니다.
엔비디아가 쏘아올린 공…‘반도체 슈퍼사이클’ 기대감 ↑
아직 시장이 회복됐다는 시그널도 없는데 도대체 삼성·SK 주가는 왜 폭등한 것일까요?
먼저, 일반적으로 반도체 기업의 주가는 6개월 정도 선행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주가 상승 현상은 앞으로 6개월 뒤 반도체 업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감을 반영하는 셈입니다.
그 배경에는 엔비디아가 있습니다. AI 시장 성장에 따른 반도체 업계의 수혜가 엔비디아를 통해 구체화됐기 때문입니다. 엔비디아는 지난달 말 시장 컨센서스를 상회하는 깜짝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엔비디아 주가는 하루만에 24.3% 폭등했고,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은 국내 반도체주들로 번졌습니다.
엔비디아는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AI) 서비스 붐의 최대 수혜자로 꼽히는 기업입니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가 구동되려면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가 필요한데, 엔비디아는 전세계 GPU의 90% 이상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는 올해만 주가가 160% 이상 폭등했습니다. 지금은 주가가 지나치게 과열됐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다소 떨어진 상태지만,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올 것이란 확신을 주기에는 충분한 방아쇠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영민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외 반도체 주가의 가파른 반등이 확인된 가운데 엔비디아의 실적 발표가 폭발적인 방아쇠가 됐다”며 “주가 반등 강도를 볼 때 업황 반등을 위한 조건인 추가적인 수요 둔화 종료와 공급 축소 효과 점진적 확대는 이미 충족됐다는 점을 재확신하기 충분하다”고 밝혔습니다.
삼성전자보다 SK하이닉스의 주가 상승세가 더 가파른 것도 엔비디아 영향이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챗GPT 등 생성형 AI에 탑재되는 D램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과반 가량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 GPU인 ‘A100’과 ‘H100’에 각각 HBM2E와 HBM3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HBM 분야에서는 삼성전자보다도 한 발 앞섰다는 평가입니다. 앞으로 생성형 AI가 더욱 확대된다면, SK하이닉스의 영향력도 커질 전망입니다.
다만, 일각에서는 단기적으로 주가가 조정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박유악 키움증권 연구원은 “AI 서버용 고용량 DDR5 출하 비중이 아직 1% 수준에 불과해 현재의 단기 주가 급등은 부담”이라며 “예상보다 저조한 판매량 속에서 단기적으로 주가 되돌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AI 서버 투자는 증가하지만 한정된 설비투자(캐펙스·CAPEX) 내에서 AI 서버 증가는 기존 퍼블릭 클라우드에 대한 투자 축소를 야기한다”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