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반도체는 석유나 다름 없다. 반도체가 세상 모든 것의 동력을 제공하게 됐다.”(벤자민 로 ASM 대표)
지금 전세계에서는 2가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총 없이 기술로 싸우는 ‘반도체 전쟁’입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미국의 통상 규제에 중국도 대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미중 갈등이 길게는 20~30년 동안 이어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중국에 중요한 메모리 반도체 생산 거점을 둔 우리 기업들은 어떤 대책을 세워야할까요?
오늘 칩만사는 본격화된 반도체 전쟁 속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돼버린 한국의 미래를 다뤄보겠습니다.
“반도체는 미래의 석유”…2025년 수요 폭발 전망
글로벌 반도체 장비업체 ASM은 23일 국내 첫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벤자민 로 CEO는 반도체 시장의 긍정적인 전망에 대해 설명하며 아주 흥미로운 발언을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반도체를 새로운 석유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동력을 제공하는 새로운 원자재이기 때문이다.”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웨이퍼 팹 장비(WFE) 시장은 2025년부터 폭발 성장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올해는 글로벌 경기 침체 및 인플레이션 등 거시 경제 악화로 전년 동기 대비 14% 감소하며 한차례 꺾일 전망이지만, 2024년 반등에 성공한 후 2025년에는 2022년 수준을 상회할 정도로 회복할 것으로 관측됩니다. 이후 꾸준히 우상향 곡선을 이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인공지능(AI) 서비스, 자율주행차 등이 보편화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생활 가전에도 반도체가 탑재되기 시작하면서 반도체는 모든 제품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거에 석유가 핵심 원자재로 부상한 것과 같은 이유죠.
우리는 역사적으로 석유 때문에 벌어졌던 나라 간 갈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국제 정세도, 반도체를 둘러싸고 비슷한 일이 벌어지려고 합니다.
미중 반도체 갈등, 지금부터가 진짜…삼성·SK 단기 수혜?
최근 중국 정부는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의 제품에 대해 “심각한 네트워크 보안 위험이 발견됐다”며 대규모 구매 금지 조치에 나섰습니다. 중국이 미국 주요 반도체 기업에 대한 구체적인 제재를 가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죠. 미국 상무부는 지난 21일(현지시간) “근거 없는 제재에 단호히 반대한다”며 “문제 해결을 위해 동맹국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반발했습니다.
마이크론은 중국에서 연간 30억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전체 매출의 11% 정도입니다. 미국, 대만에 이은 세번째 주력 수출 시장으로 두고 있습니다.
중국의 이번 조치는 지난해부터 계속된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대한 ‘맞불’로 풀이됩니다. 지난해 10월 미국은 중국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 등을 무역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등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도입했습니다.
이후 중국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지만, 올 들어 마이크론을 상대로 사이버 보안 심사를 진행하며 긴장감을 키웠습니다.
중국의 대응이 나오자 반도체 업계는 이제 양국간 대립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지적합니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직후 중국이 이런 조치를 내놓으면서, 반도체를 포함한 미국과 중국의 경제 대립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에 한국 기업들은 제대로 난처한 입장에 처해버렸습니다.
우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내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메워 단기적인 수혜를 입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금융투자업계는 중국 기업들이 중국 정부의 마이크론 제재가 현실화되기 전에 재고축적을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부터 단기 주문을 늘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도 23일 “중국의 사실상 마이크론 제품 판매 금지로 인해 고객들이 한국·중국 기업 등 대체 공급업체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고 보도했죠.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기회로 중국 시장에서의 매출을 늘리기에는 동맹국인 미국의 눈치가 보입니다. 미국은 한국 기업들이 마이크론의 공백을 메울 수 없도록 압박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실제로 앞서 외신들은 지난달 미국이 한국에 이러한 내용을 요청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미국과 각별한 동맹국이기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중국의 단속을 피하거나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서 전체 생산량의 절반에 가까운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 중입니다. 중국의 제재가 가해지면 큰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그 누구에게도 밉보일 수 없는, 아주 복잡한 머리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30년 넘게 이어질수도”…韓 반도체 희망은
중장기적으로 미중 반도체 갈등은 한국 기업들에게는 불안정성을 키우는 가장 큰 리스크입니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 간 반도체 갈등이 30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며 “불안한 국제 정세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며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에 주력하는 모습입니다.
당장 중국 공장에서의 장기적인 생산이 불확실해진 만큼, 국내 공급망 확충에 나섰습니다.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에 메모리 반도체 팹(공장)을 증설 중입니다. 여기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향후 300조원을 투자해 5개의 시스템 반도체 생산 라인을 구축할 예정이죠. SK하이닉스도 용인에 2025년을 시작으로 10년 동안 4개 팹(Fab)을 지을 계획입니다.
지정학적인 불안정성이 큰 중국의 의존도를 서서히 줄이려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희망이라고 강조합니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국제 정세 갈등에서 줄타기를 하려면 핵심은 양측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며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한국 반도체 기술력이 없어서는 안 될 정도의 포지션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