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소연 기자]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아직 전쟁의 후유증으로 정신 없었던 1945년의 영국 런던. 14세 소년 너새니얼과 그보다 두 살 많은 누나 레이철은 아버지가 싱가포르로 발령이 났다며 다락방에 세 들어 사는 중년의 남성 ‘나방’에게 맡겨진다. 물론 아이들은 주로 기숙학교에 머물게 되겠지만, 생면 부지의 남성의 돌봄을 받게 된 아이들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캐나다의 세계적인 작가 마이클 온다치가 장편 ‘기억의 빛’으로 돌아왔다. 혼란스러운 2차 세계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너새니얼이라는 소년과 그의 가족, 그리고 오누이를 보호하기 위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은 온다치에게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인 듯 하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준 '잉글리시 페이션트' 역시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온다치는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지난 1992년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았으며, 이후 동명의 영화로 제작돼 오스카 상을 휩쓸었다. 2018년에는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 최고의 작품에 수여하는 황금 부커상을 받기도 했다.
이번에 국내에 소개된 신작 '기억의 빛' 역시 2018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음지에서 국가를 위해 싸우는 스파이들의 입체적인 삶을 흥미롭게 묘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극 중에서 갑자기 싱가포르로 떠난 너새니얼의 부모는 알고보니 2차 세계대전 중 암약한 스파이었다. 어머니 로즈를 비롯해 부모의 숨겨진 삶을 추적하는 너새니얼 역시 어른이 된 후 정보국 요원이 된다.
아버지를 따라 싱가포르에 간다며 짐을 쌌던 어머니 로즈는 그녀의 짐이 지하 창고에서 발견되며 거짓말을 한 것으로 밝혀진다. 아이들은 엄마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여기며 원망이 커진다. 이에 답답한 기숙 학교에서 나와 수상쩍은 나방과 동거를 시작한다. 괴한에게 납치된 오누이,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스파이로 활약하는 엄마를 만났지만, 그리움 만큼이나 커져버린 원망 때문에 어머니와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 없다.
하지만 너새니얼은 정보국 요원이 된 후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면서 어머니의 잠적은 사실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함임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오누이를 맡긴 나방과 그를 만나러 그들의 집을 방문했던 화살, 올리브, 디자이너, 양봉업자 등도 사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낸 동료들이었다. 이와 함께 여성 요원으로서 로즈의 삶에 대한 사실과 오해가 반전이 되어 펼쳐진다.
이 소설의 원제는 '워라이트'(Warlight)다. 전시 상황에서 등화관제로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울 때 길을 밝히기 위해 쓰이는 희미한 빛을 뜻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개인의 욕망, 국가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묵묵히 간 어머니와 아들의 삶을 비유하는 듯 하다.
기억의 빛/마이클 온다치 지음·김지현 옮김/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