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윤미 선임기자]우리는 하루 종일 인터넷 동영상서비스(OTT)와 커뮤니티, 책, 뉴스 등 이야기의 바다에 푹 빠져 살고 있지만, 이야기가 유독(遺毒)하다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이야기에 대체로 호의적이고, 무해하다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과학적 인문학 운동의 선두주자인 조너선 갓셜 워싱턴 제퍼슨 대 영문학과 연구원은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에서 인간의 본성인 이야기의 힘과 흑마술의 양면성을 꼼꼼하게 살피며 불온한 가설을 내세운다.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위대한 희곡과 창조 신화까지 장엄한 종류의 스토리텔링 조차 유익보다 해악이 많은 것 아닐까?’
2400년 전 플라톤도 간파한 이야기의 '어두운 힘'
인간이 이야기를 통해 진화하고 정보를 전달하며 문명을 일궈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영장류 학자 로빈 던바에 따르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인간 언어가 처음 진화한 목적은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누가 부족의 규칙을 따르고 누가 그러지 않는지 뒷담화를 주고받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던바는 이야기의 능력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는데, 피험자들은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드라마를 본 뒤에 엔도르핀 수치가 높아지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유대감과 소속감이 더 커졌다. 즉 스토리텔링이 노래와 춤 같은 예술 형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집단으로 묶고, 뇌에서 유대감 호로몬을 자극하고, 집단 연대감을 강화한다. 이야기가 부족을 만들어낸다.
이야기의 힘은 워낙 강력해서 아무리 막아도 어느 틈으론가 빠져나가 확산한다. 그래서 나치 독일을 비롯한 21세기 모든 전체주의적 성향을 가진 나라에서 스토리텔링을 통제하고 독점하는 이유다. 이야기는 공감과 이해, 연대 및 평화를 증진시키지만, 한편으론 분열과 갈등, 증오를 확산시키기도 한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야기가 부리는 어두운 힘이다. ‘‘정치적 양극화, 환경 파괴, 무책임한 선동, 전쟁, 증오 뒤에는 똑같이 마음을 미혹하는 이야기가 있다”는게 그의 핵심 인식이다.
플라톤은 일찍이 이를 간파했다. 2400년 전 전쟁과 분열 등 아태네의 혼돈을 목도하며 쓴 ‘국가’에서 플라톤은 이야기꾼들이 대중을 감정에 빠트려 제대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봤다. 따라서 그가 바라는 이성국가, 유토피아를 만들려면 이야기꾼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플라톤의 해법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플라톤이 제기하는 진짜 문제를 간과해선 안된다는 입장이다. 즉 이야기를 바라보는 우리 눈에는 커다란 맹점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의 목적은 ‘사람을 움직이는 것’
이야기는 그것이 하나마나한 허접한 것이든 정치적 메시지 혹은 기업 광고든 모두 한 가지 의도를 갖는다. 저자는 이를 “타인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 최종적으로 행동을 내가 바라는 쪽으로 하게 구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에 빠진 뇌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야기 과학’ 연구자인 저자가 들려주는 메커니즘은 이렇다.
이야기와 만나면 우리 뇌는 순간적으로 ‘서사이동’이 일어난다. 즉 책을 펼치거나 텔레비전을 켜고 일상에서 벗어나 대안적 이야기 세계로 정신적 순간이동을 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현실 세계 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분리된다. 그럼으로써 이야기의 주인공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잊는다. 또한 이를 통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이야기에 빠진다.
스토리텔링이 강력할수록 사람들은 주인공에 이입, 강렬한 감정과 함께 행동으로 옮긴다. 가령 영미권에서 드라마 ‘뿌리’의 쿤타킨테를 보고 흑인에 관대해지고 ‘해리포터’를 보고 소외된 타자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줄어든 현상 등이 한 예다.
이 때 이야기의 어두운 면도 함께 작동하는데, 인간의 합리적 판단을 무력화시켜 믿음과 정보를 주입하는 게 가능하다. 음모론, 사이비 종교 등은 이런 흑마술을 좋아한다.
이야기에 감동한다는 것은 감정을 느껴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뿌려진 이야기는 우리의 감정을 바꿔 생각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소비하고 투표하고 관심을 표하는 방식을 바꾼다. 이 감정이 결국 의사 결정의 핵심 요소인 셈이다.
스토리텔링 본능이 집단간 갈등 불러와
저자는 여느 구슬림 도구보다 스토리텔링을 더 우려해야 하는 이유는 이야기꾼들이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더 유능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수렵채집 시절이나 이야기 홍수 시대인 지금, 이야기의 재료는 같다. 험난한 여정을 거치는 내용과 권선징악으로 귀결된다. 원시 시대부터 집단에 주입된 스토리텔링은 이타적 인간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런 강력한 판타지가 있는 집단은 결속력으로 다른 집단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우리는 그 유전자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우리의 오래된 스토리텔링 본능이 현대 사회의 빠른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서 사회 내 극심한 부족적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저자의 통찰이다. 과거 혈연·언어·민족 중심의 공동체에서 다문화·다민족 사회로 변하면서 부족과 부족을 서로 대립시켰던 해묵은 스토리텔링이 사회 내집단과 외집단 간의 극심한 갈등·분열·내전 같은 참사를 불러오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 사회학, 철학, 진화심리학, 신경생물학 등을 넘나들며 신선한 비유와 통찰로 이야기에 중독된 인간, ‘호모 픽투스(Homo Fictus)’의 여정을 따라가는 책은 오늘날 사회적 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