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book적]“인생은 고기서 고기”…조선에도 불어닥친 쇠고기 열풍
“법은 소의 도축과 쇠고기의 판매와 식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준행된 적은 없었다. 지배계급부터 쇠고기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법은 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없애지 않는 한 적용될 수 없었다.”(‘노비와 쇠고기’에서) 사진은 성균관의 유생들이 생활했던 기숙사 동재

[헤럴드경제=이윤미 선임기자]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자 왕조의 이데올로기 수호자인 성균관엔 딸린 공노비들이 있었다. 반인(泮人)이라 불린 이들은 성균관을 유지하는 온갖 일 외에 쇠고기 푸줏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도축과 판매가 가능한 유일한 신분이었다. 농사도 장사도 할 수 없는 이들의 생계를 위해 나라가 쇠고기 파는 현방을 허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마저도 극심한 수탈의 대상이 됐다.

지난 2003년 저서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통해 반인을 소개한 바 있는 강명관 부산대 교수가 이들을 본격적으로 다룬 700여 쪽의 묵직한 ‘노비와 쇠고기’를 펴냈다. 노비와 쇠고기의 이질적인 조합이야말로 반인의 정체성 그대로다. 강 교수는 한 마디로 성균관의 버팀목은 쇠고기 팔던 노비들의 피와 땀, 세금이었다고 말한다.

‘도축 금지’ 조선에서 쇠고기가 판매?!

조선은 도축을 금했던 불교의 나라 고려와 마찬가지로 우마(牛馬)의 도축을 금했고, 소를 판 사람과 산 사람 모두 처벌했다. 그러나 점차 소비가 늘어 개경에서 한양으로 신(新) 백정들이 옮겨오자 축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축이 다시 성행, 처벌이 강화되는 일들이 반복됐다.

조선시대 쇠고기의 주 소비층은 조정의 고위 관료와 사족들이었다. 쇠고기는 관료들 사이 뇌물로도 사용됐다. 수요가 늘다 보니 저절로 죽은 소로 위장한 도축 소가 공공연하게 거래되고 양민과 전문 도축업자인 거골장이 출현했다. 그만큼 물 좋은 장사였다는 얘기다. 강력 단속은 그때 뿐, 얼마 못 가 의금부 앞에서 버젓이 도축이 이뤄졌다. 쇠고기 식용 통제는 그만큼 어려웠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쇠고기 열풍에 17세기 정계 거목 송시열은 1683년 숙종에게 올린 상소문 12조목에 쇠고기 먹는 것을 절제하자고 제안했을 정도였다.

도축과 판매는 반인들이 경영했던 현방이 독점했다. 현방은 소의 도축이 불법인 것을 전제로 벌금, 즉 속전을 형조·사헌부·한성부 등에 내고 공식적으로 도축과 판매를 허가 받은 점포다. 속전이 일종의 영업세인 셈이다. 현방 만이 영업할 수 있는 독점권이 있었고 그것도 서울에 한정했다. 불법 도축은 사도라 불렀다.

쇠고기 열풍에 불법 도축 성행

쇠고기 공급이 달리니 사도가 성행했다. 사도는 권력자와 사족이 단속반인 금리와 짜고 이뤄졌고, 금리 역시 사도를 했다. 불법 도축은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줬기에 막을 수 없었다.

사도는 불법이었지만 종종 합법의 외피를 쓰기도 했다. 지방관들이 세금을 걷어 관청의 비용을 쓴다는 명분으로 각 시장과 가로에 도사의 설치를 허가한 것이다. 사도를 빙자해 개인이 속전을 횡령, 착복하는 일도 수없이 벌어졌다.

[북적book적]“인생은 고기서 고기”…조선에도 불어닥친 쇠고기 열풍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소가 도축됐을까? 18세기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그리고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쇠고기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고 했을 정도로 조선 후기는 쇠고기가 대유행 했다.

‘쇠고기 매매’ 허가 받은 반인, 수탈의 대상으로

이런 쇠고기 유통의 중심엔 반인이 있다. 반인(泮人)은 반촌 거주인이란 뜻으로, 성균관 노비들의 집단 거주지이다.

200명 정원의 성균관 유생을 위한 모든 노역과 잡역, 건물 유지, 관리, 음식 조달, 조리까지 모든 일은 반인의 몫이었다. 과거 때가 되면 많은 유생들이 숙식, 정보를 해결하기 위해 반촌에 머물렀고. 성균관 유생들도 상당수가 평소에 기숙하지 않고 반주인 집에 머물렀다. 또한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 벼슬살이를 하는 경우에도 반주인집을 선호했다. 반주인과 개인 사족은 이해관계가 맞았다. 반주인은 노비는 아니었지만 사족 개인의 일을 도맡아했고, 금전 거래도 했다. 이는 관료로 출세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염두에 둔 것으로 둘은 이해관계로 묶여 있었다.

성균관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반인이 서울 시내에서 소의 도축과 쇠고기 판매업을 독점하개 된 내력은 확실치 않다. 저자는 봄과 가을 성균관 석전 때 소를 잡아 제물로 쓰는 데서 연원을 찾는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로 쇠고기가 제공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된다. 저자는 처음 쇠고기 푸주간인 현방이 등장한 때를 면밀히 추적, 1648년 이후 1953년 이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방은 21개까지 늘어났지만 문제는 성균관 뿐 아니라 삼법사인 형조·사헌부·한성부의 극심한 수탈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다. 1724년 성균관과 삼법사가 현방에서 수탈하는 돈의 총량은 8300냥에 달했다. 속전을 감당하지 못해 현방은 돈을 빌려 소를 사서 팔았고 그 판 돈을 다시 속전으로 털렸다. 현방에게서 돈을 받아 운영해온 성균관 역시 재정적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자 대사성 조지빈이 나서 영조에게 고질적 문제를 보고하기에 이른다.

수많은 문헌과 사료를 섭렵, 정교한 짜맞추기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소수자 반인과 현방을 오롯이 구축해낸 점이 돋보인다. 성균관에 딸린 노비로서 백정과는 다른 도축자로서 경제활동을 하고, 문식층을 형성, 성균관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수탈에 저항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새롭고 흥미롭다.

노비와 쇠고기/강명관 지음/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