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윤미 선임기자]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324년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로 수도를 이전한 때, 혹은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395년부터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기까지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당시 동서양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장악했음에도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동서양이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혼종의 역사는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발칸반도의 베오그라드에서 리비아까지, 동쪽으로 140만km에 달했던 영토는 6세기엔 이탈리아와 스페인 남부, 튀니지, 알제리까지 확장됐다. 7세기 말에는 영토의 절반을 잃었지만, 다음 3세기 동안 아랍을 저지하고 발칸반도에서 영토를 회복하기도 했다.
11세기 후반에 이르러선 이탈리아의 노르만인과 셀주크인 때문에 영토가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일부 지역으로 축소됐지만, 1차 십자군 전쟁(1096~1099년)의 여파로 비잔티움은 소아시아와 시리아로 확장하게 된다. 그러나 1204년 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영토를 분할하고 마지막 2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축소되면서 14세기 초에 이르면 오스만제국에 의해 완전히 쪼그라들게 된다.
이 오랜 기간 제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면서 어떻게 각기 다른 나라와 언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위기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리스 출신 중세 사학자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가 쓴 ‘비잔티움의 역사’는 천 년의 역사를 빠르게 섭렵해나가면서 비잔티움을 유럽 역사의 중요 지점으로서 자리매김시킨다.
비잔티움 사람들 “나는 로마인”…지중해의 주인으로 행세
저자는 우선 비잔티움이란 이름에 담긴 복합적 의미를 살피며, 그 정체성을 드러낸다.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이름으로, 나라의 이름으로서의 비잔티움이라는 용어는 16세기 중반 처음 등장한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몽테스키외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중세 로마 제국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제국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이라는 얘기다.
당시 제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겼다. 그러나 발칸반도와 많은 국가들은 그리스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렀다. 이는 800년 프랑크의 사를마뉴가 교황으로부터 ‘로마의 황제’로 대관식을 치른 데 따른 것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제국을 한정함으로써 권위를 축소하고 로마 제국이라는 보편성을 부인하려는 의도였다. 그리스라는 표현 역시 노골적인데, 그리스는 이교도와 동일 시 됐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동로마 제국으로도 불렸다. 이는 동지중해 세계와 레반트에 중점을 둔 명칭으로,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오랜 기간 보여준 존재감을 무시한 것이란 평가다.
제국의 천 년 역사는 여느 제국과 마찬가지로 번영과 역병, 전쟁, 분열로 인한 쇠퇴를 반복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비잔티움만의 독특함이 있다. 즉 급격한 변화 대신 환경과 조건에 맞춰나가면서 포용하고 받아들여 공존을 모색한 것이다.
최대 영토를 확장하며 제국의 기틀을 놓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525~565년)는 영토를 넓히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던 건 아니다. 비잔티움 제국 건축의 상징적 존재인 아야 소피아 성당 등 거대 성당 건축과 로마 법 대전 등 과거 지식을 집대성하며 지중해의 주인으로서 제국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7세기 비잔티움 제국은 자원의 부족과 관리, 역병으로 인한 인구 급감 등으로 중요한 변화에 직면했지만 이주 정책과 인두세 도입, 군대 시스템 정비를 통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제국을 지켜냈다.
전쟁 하면서도 문화 교류 “유럽에는 비잔티움 광풍”
제국이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시기는 비잔티움 전성기(867~1056)인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다. 광활한 영토 확장과 함께 황실의 후원 아래 방대한 양의 서적 편찬 사업 등이 진행됐다. 비잔티움은 과거의 지식들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데 탁월했다. 그리스와 로마,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지식이 유럽에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다.
제1차 십자군 전쟁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처신도 흥미롭다. 제국은 십자군의 승리로 레반트 지역에 세워진 라틴계 식민 국가들과 공존해야 했는데, 때로 전쟁을 치르면서도 수세기 동안 정치·경제· 문화적으로 활발히 교류했다.
바실리오스 2세의 재위가 끝나는 1025년 만 해도 강력하던 제국이 두 세대도 지나지 않아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 붕괴 직전으로 내몰린 배경도 눈길을 끈다. 저자는 당시엔 역병도 없고 인구 증가 경향도 이어졌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그리스 지역과 소아시아 서안의 도시들은 여전히 번성, 전반적으로 호황을 누렸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국가 자체는 주화의 가치 하락으로 큰 위기에 봉착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도 이 도시의 매력은 제국의 적국과 동맹국 모두에 비잔티움 광풍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시칠리아, 베네치아, 키이우, 북쪽의 아이슬란드와 스웨덴의 주요 성당들에 남아있는 비잔티움 예술을 본뜬 모자이크화가 이를 증언한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며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지만, 학자들은 이탈리아로 건너가 학술 활동을 하고 그리스어 문헌을 필사하고 라틴어로 번역, 르네상스의 지적 토양을 제공하게 된다. 프랑스는 기금을 마련, 비잔티움 제국의 모든 시대에 작성된 사료를 한데 모으고 예술품을 수집했다. 그 결과 유럽의 지적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천 년의 방대한 역사를 생동감 있게 서술한 책은 제국의 정치, 군사 뿐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적 특징을 조명, 비잔티움의 정체성에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한다.
비잔티움의 역사/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더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