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일’ 아닌 창조·공감 전문 영역

과도한 업무·저임금에 질적 저하 우려

고령화로 공백 커지고 양극화도 심각

의사·간병인 등 5년간 현장 생생취재

돌봄은 시장상품 아닌 인간과의 만남

[북적book적]누구나 일어날 수 있는 일, 돌봄 공백 메울 대안은?
“돌봄의 많은 부분은 삶을 편안하고 무사하게 유지해주는 일상적인 일들이며, 너무나 쉽게 당연시되고 우리의 시야에서 미끄러져 사라진다. 그렇더라도 대부분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돌봄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고, 특히 여성이라면 수개월 혹은 수년간 지난하고 지치는 돌봄노동에 관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사랑의 노동’에서)

동네 공원에서 흔히 목격되는 손목을 끈으로 서로 서로 묶고 산책에 나선 유치원 아이들,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창문이 꼭꼭 닫힌 삭막한 요양원….

영국의 얘기이지만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아이와 노인, 장애인 등 돌봄의 현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돌봄공백, 독박돌봄, 돌봄사각지대로 표현되는 뜨거운 이슈인 돌봄 문제는 전통적으로 돌봄을 제공해온 가족제도가 와해되고, 공동체의 네트워크가 무너진 결과다. 이 중심에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인구학적 변화, 장기질환자의 증가 등 사회적 변화가 있다. 돌봄의 사회화가 일정부분 이뤄지고 있지만 돌봄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한계가 있다. 돌봄의 수요는 갈수록 늘어나지만 관련한 사회적 논의는 부족한 게 사실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매들린 번팅은 5년간 종합병원과 호스피스, 시설, 진료소 시민단체 등 돌봄현장을 돌아보고 간병인과 간호사, 의사, 사회복지사,연구자 활동가 등을 폭넓게 취재해 돌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이뤄지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랑의 노동’(반비)에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응급상황에서 갑자기 돌봄이 필요해졌을 때 돌봄의 질을 체감하게 된다. 돌봄은 많은 활동을 필요로 하면서도 세심한 배려가 요구된다. 환자의 목욕이나 식사, 청소, 정리 정돈, 손 잡아주기, 지켜보기 등 돌봄을 이루는 많은 활동들은 나름의 전문 지식과 기술 뿐 아니라 통찰력, 창조력, 공감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돌봄을 제대로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돌봄 접근성의 격차도 크게 벌어지고 있다.

저자는 극적인 사회 변화 속에서 돌봄의 질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며, 돌봄의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자 정치 위기, 윤리 위기라고 지적한다.

돌봄노동의 경제규모는 막대하다.

무급 노인 돌봄은 2006년 미국 경제에 약 350조 달러의 경제적 가치를 산출했으며, 영국 통계청은 무보수 돌봄노동의 가치를 약 94조원으로 추산했다.

영국의 경우 성인 인구 8명 중 1명이 노인 또는 장기 질환자를 돌보고 있는데, 이는 2037년까지 40퍼센트 늘어날 것으로 본다.

돌봄노동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고용분야이기도 하다. 영국에선 돌봄 분야가 전체 고용의 13퍼센트를 차지, 단일 영역으로는 가장 큰 고용 원천이다. 그리고 돌봄 노동의 대부분은 여성의 몫이다.

그런데 돌봄의 가치는 매우 낮게 평가된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돌봄을 인정하지 않게 된 데엔 오랜 역사적 뿌리가 있다며, 돌봄은 값싼 일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긴축으로 임금 삭감이 진행되면서 돌봄서비스가 악화됐다는 것이다. 돌봄의 가치를 표준화하기 어려운 것도 가치를 환산하는 데 걸림돌이다.

책에는 돌봄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사례들이 많다.

그 중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구세군 요양원에서 야간 간병인으로 일한 제임스의 이야기는 눈길을 끈다. 제임스는 늘 누군가 돌봐주는 환경에서 자랐다. 보모가 있었고 청소, 정원 손질을 하는 분이 따로 있었다. 이튼 기숙학교, 케임브리지에서도 침상 정리를 해주는 이가 있었다. 그가 맡은 환자 대부분은 노동자 계급, 유색인종이었는데, 그는 가난과 처한 현실 등 다른 삶에 대해 알게 되는 경험과 함께 이들이 이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병원의 의료보조사로 일한 철학과 학생 라미로는 처음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할 일이 정말 많았고 환자가 계속해서 큰소리로 부르는 상황에 기진맥진했다. 그러나 환자들이 원한 건 약이 아니라 사람과의 접촉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빠듯해서 환자들을 도울 수 없는 걸 안타까워하며, 인간과의 접촉이 환자들의 통증을 잊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돌봄은 인간의 바스러지기 쉬운 취약함, 인간 조건의 한계와 친밀함을 배우는 일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두 아이의 육아 경험을 통해 아이돌봄의 문제와 가정과 직장, 페미니즘 신념 사이의 갈등을 솔직하게 들려주기도 한다. 두 세계의 저글링을 저자는 “아이가 있으면 늘 사건이 생겼고 따라서 늘 계획을 포기하거나 변경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며 “날마다 두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돌봄 수요의 최전선에 있는 병원의 간호사, 간병인들의 현실을 취재하며 수요는 증가하는데 과도한 노동, 낮은 임금, 가치절하 등의 3중고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고한다.

시장화에 대한 우려도 표명한다. 저자는 “돌봄이라는 단어가 관료주의화되면 우리는 인간관계의 중요한 차원을 보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며, 시장화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다.

돌봄의 시장화가 돌봄의 의미와 목적을 갉아먹고 있다며, “돌봄은 소비 상품이 아니라 언제나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의 만남”임을 강조한다.

“돌봄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경험하는 날 것의 질료”라고 강조하는 책은 돌봄의 역사와 전시, 문학, 언어 등 문화 속에서 돌봄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인식됐는지를 살핌으로써 경제 쪽으로 기우는 돌봄 문제를 폭넓게 파악한 점이 돋보인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사랑의 노동/매들링 번팅 지음, 김승진 옮김/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