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설계한 민현준 대표
“건축은 수많은 사람들의 합의를 거치는 과정”
현대차 연수원에는 ‘대기업-하청’ 조화 담기도
“한계보다 자유로움…공원 같은 건축이 지향점”
[헤럴드경제=유오상 기자] “건축은 서로 다른 의견을 합일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설계부터 완성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과 조율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 속에 많은 의견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방을 산다고 하면 물건을 보고 바로 구매를 결정할 수 있겠지만, 건축은 결과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산으로 가기 쉽습니다. 중심을 잃지 않고 하나의 결과로 합일하는 과정, 그것이 건축입니다.”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종친부, 국군서울지구병원과 기무사령부가 있던 자리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탈바꿈시킨 건축가 민현준 엠피아트 대표(홍익대 건축학부 교수)는 건축 설계의 과정을 “양보와 합의”라고 거듭 강조했다. 국립현대미술관뿐만 아니라 성거산 성지 성당과 현대 자동차그룹 글로벌 상생협력센터 등의 작품을 선보인 그는 지난 2014년에는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지난 2020년에는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사무실에서 만난 민 대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대지의 역사, 굴곡진 근현대사 흔적들의 조율’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장 종친부는 형상이 강한 전통 건물이고 미술관이 들어서는 자리에 위치했던 기무사령부 건물은 일제 강점기의 건물 형태로 조화하기 어려웠다”라며 “설계 당시 다르면서도 주변과 조화할 수 있는 느낌을 주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민 대표의 생각이 담긴 미술관의 외벽은 특별히 제작한 기와 모양의 테라코타 패널로 제작됐다. 기와와 같이 흙을 구운 소재로 만들어진 각 패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4개의 색으로 구성돼 햇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다른 무늬가 나타난다. 전통적인 한옥의 기왓장과 같은 모습은 바로 옆 경복궁과 다르면서도 조화로운 느낌을 준다.
그는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땅에 미래 지향적인 예술을 소개하는 공간을 계획해야 했다. 설계 당시 가장 많은 분야 사람들과 합의를 하며 설계했고, 결국은 바로 옆 경복궁과 형상을 다르게 가져가면서도 전통과 조화할 수 있는 건축을 완성할 수 있었다”라며 “눈을 뜨고 보면 검은 기와와 하얀 테라코타가 다르게 보이지만, 눈을 감고 만져본다면 같은 느낌을 받도록 했다” 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민 대표의 작품 중에는 벽돌을 사용한 작품이 많다. 형상보다는 물성을 더 중요시하는 평소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지난 2014년 리모델링을 통해 완성한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 역시 붉은 벽돌을 이용해 주변 환경과의 조화에 성공했다.
그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강한 형상은 자제하는 편”이라며 “형상이 너무 강하면 그곳에만 시선이 머무른다. 공간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쓰고 어떤 역사를 축적하는 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처음으로 DMZ 내에 설립된 복합 문화예술공간인 ‘uni마루’ 역시 민 대표가 말하는 ‘합의’의 산물이다. 지난 2003년 남북이 철도를 연결한 후 임시 출경사무소로 쓰였던 공간으로, 기존의 철골 구조를 남기고 옥상 난간에는 붉은 강판을 사용해 분단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제유했다.
분단의 역사를 상징했던 공간에 대해 민 대표는 “막상 현장에 가보니 건물이 평범했으나 역사적 사건을 간진학 증인이었다. 외부는 가능한 유지하고 내부는 전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낮은 천장을 뜯어내고 철골구조를 노출해 개방감을 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북한 철탑이 모두 보이는옥상을 장소특정형 전시장으로 제안하고 녹슨 철판을 추가했다”고 말했다.
민 대표는 “오래 버틴 건축물이 좋은 건축”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오래된 건물은 많은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고, 건축에 이야기가 다의적이어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며 공간과의 소통을 즐기게 된다”라며 “새로운 건축도 오래된 건물처럼 많은 이야기가 담기고 그 터의 역사에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도록 계획한다”고 했다.
오랜 역사를 지닐수록 그 속에 이야기가 담기고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담긴 장소일수록 여러 의미를 담아 만들어야만 한다. 건축에 이야기가 많아야 사람들도 방문하며 즐기기 좋다”라며 “그 때문에 ‘설계가 좋지 않았더라도 오래 버틴 건물은 좋은 건물’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민 대표가 설계한 성거산 성지 성당 역시 역사적 장소에 지어진 작품이다.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은 성당은 신유박해부터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해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유서 깊은 7개의 교우촌이 자리했던 곳에 지어졌다. 박해시대 동굴성당에서 모티브를 얻은 성당은 역사를 반영하듯 첨탑이 하늘로 솟는 대신 자연 속에 묻힌 형태를 취한다. 지붕의 모습은 도심 속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성당의 모습 보다는 순교자 무덤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건축에 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을수록 좋은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 가능하고, 유행을 타지 않는 건축물을 만들려고 한다”라며 “성거산 성지 성당의 경우, 자리 자체가 문화재였고, 문화재 측에서 첨탑을 원하지 않았기에 동굴의 형태로 합의하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합일’을 강조한 민 대표의 건축 철학은 지난 2020년 완성된 현대자동차그룹 영남권 교육시설에서도 드러난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를 위한 인재개발원 경주캠퍼스와 협력사 직원들을 위한 글로벌 상생협력센터 2개의 연수원을 네모 모양으로 묶어 하나의 공간으로 설계했다. 법적 한계 탓에 두 연수원을 하나의 건물로 합칠 수 없다는 까다로운 조건에 민 대표는 다른 건물이면서도 서로 문을 열면 하나로 통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연수원 사이의 공간은 서로가 공유할 수도 있다. 대기업과 하청이라는 사회적 갈등이나 계층의 갈등이 건축 공간 안에서만큼은 풀어지도록 한 것이다.
내부 구조는 기업의 연수원보다는 리조트에 가까울 정도로 편안함을 강조했다. 특히 외장에 사용되는 재료가 그대로 내부에 사용돼 도시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칫 업무시설이 줄 수 있는 답답함을 없애고 공원을 거니는 것 같은 편안함을 주기 위함이다. 모두 민 대표가 추구하는 ‘공원 같은 건축’이라는 의도가 반영된 공간이다.
“공원 같은 건축을 하고 싶다”고 거듭 강조한 그는 “미국은 건축과 조경을 같이 설계한다. 건축은 당장 법적 한계 등이 명확하지만, 조경은 비교적 자유롭다. 고급 레스토랑을 방문할 때는 위축되는 느낌이 들지만, 공원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주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이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역시 공원처럼 느슨하게 설계했다. 도심 속을 걷다보면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주 방문하다보면 익숙해지고 애착이 생기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라며 “전시 관람의 관점에서 보통의 건축은 방문객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모두 정해주기 때문에 주입식 교육을 받는 것처럼 수동적이 된다. 길을 헤매다가도 새로운 작품을 마주쳤을 때의 미적 쾌감을 제공하고자 전시장 공간을 설계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