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이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 디자인
과거의 상식 파괴하고 영감찾아 소통
디자인은 진화를 거듭하는 인간 본성
車·광고·패션·건축·미디어 등 총망라
코로나로 미래의 디자인 속도 빨라져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거대한 파도가 쏟아졌다. 일명 ‘삼성동 파도’(‘WAVE(파도)’·이성호 디스트릭트홀딩스 대표 작). 쉴 새 없이 몰아친 ‘가상 파도’는 도시인들에게 코로나19로 잊혀진 시원한 여름 바다를 돌려줬다. 시대와 소통한 ‘디자인 혁명’이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의 마음을 훔친 ‘로버 체어(1981·론 아라드 작)’는 고물 처리장에 버려진 카 시트로 만들었고, 열지 않고도 거울을 보는 슬라이딩 팩트(이노디자인 김영세 대표 작)는 ‘동작의 순서’를 줄이며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크리스 뱅글 전 BMW그룹 디자인 총괄의 4세대 7시리즈는 대형 세단의 전형성을 버리며 전 세계 자동차 디자인의 판도를 바꾼 혁신 사례로 꼽힌다.
디자인은 “진화를 거듭하는 인간의 본성”(카림 라시드)이다. 과거의 상식을 파괴하고, 한발 앞서 미래를 발견하며, 영감을 찾아 소통한다. 진화는 혁신과 동의어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의 본질은 혁신(이노베이션)이며, 혁신의 모든 과정은 디자인”(김민규 건축가)이라고 봤다. 디자인은 모든 분야를 막론해 미래로 향하고, 우리의 현재를 바꾼다. “혁신은 이 세계를 지속하는 힘”(크리스 뱅글)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의 변화에는 과거에서 겪은 일상의 불편과 진화를 향한 갈망, 현재에서의 새로운 발견이 담겨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헤럴드디자인포럼은 모든 영역의 디자인이 급진적 변화의 기로에 선 현재,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해보고자 한다.
▶혁신의 중심에 선 디자인, 미래를 앞당기다=2011년 헤럴드디자인포럼의 첫 연사로 참석하기도 했던 세계 3대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는 “과거에는 고객들이 새로운 것과 변화를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기업도 과거엔 변화보다는 안정과 익숙함을 택했다. 하지만 시대는 디자인의 변화를 빠르게 이끌었다. 카림 라시드는 “수많은 정보와 지식에 노출된 소비자들은 이미 새로운 디자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고 했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디자인 명사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변화를 포착한다. 패션을 비롯해 미술, 공연,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영역에서 활동 중인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이미 예측해왔던 것들이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을 맞으며 속도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변화는 정보의 홍수, 기술의 혁신과 함께 왔고, 전대미문의 감염병으로 가속화됐다. 또한 모든 영역의 디자인은 기능과 심미적 요소를 뛰어넘어 ‘가치’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미디어는 기술의 변화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라는 개념이 태동하던 때와 2020년은 전혀 다른 시대다. 이성호 대표는 “1990년대는 디지털 미디어를 이야기하기엔 어색한 시대였다면, 현재는 실감 미디어 기술과 결합해 점점 고도화되는 때”라며 “디지털 미디어는 점차 인간의 ‘현실경험’을 대체하는 수준의 ‘가상경험’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봤다.
광고의 변화를 이끈 것도 소비자였다. 신우석 돌고래유괴단 대표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소비자가 광고를 선택하게 됐다. 이는 광고의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할 정도의 거대한 사건이다”라며 “이로 인해 광고의 제작방식과 목표가 달라지고, 시장도 변화한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다”라고 강조했다.
기술의 도입과 확산은 디자인의 방식과 목적 역시 바꾸고 있다. 일례로 ‘명함 디자인’의 변화는 일상으로 들어온 기술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다. 복순도가 대표인 김민규 건축가는 “이전에는 글자가 잘 보이고, 글의 정보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면, 이젠 어플에서 한 번에 찍힐 수 있는 디자인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건축도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있다. 김찬중 건축가(더시스템랩 대표)는 “과거엔 크기, 층고 등 숫자로 계측하는 것을 우선했다면, 지금은 공간의 스토리, 톤앤매너, 느낌 등을 훨씬 더 중요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봤다.
▶디자인의 미래…세상에 없던 것들의 등장=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꿈은 오늘이 됐고, 오늘의 상상은 내일이 된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 관장은 “디자인의 미래” 역시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그려온 과거와 현재의 상상이 미래의 문을 연다.
디자이너들은 꾸준히 미래를 전망했다. 정구호는 “10년 단위로 미래 예측”을 해왔다. 그는 “디지털화의 엄청난 변화가 있으리라는 전망은 이전부터 나오고 있다. 그런 만큼 아날로그에 대한 가치는 계속해서 올라갈 것”이라며 “맨메이드와 핸드메이드의 가치는 사라질 수 없다. 세상과 기계, 기술이 발전할수록 상승할 것”이라고 봤다.
기술 혁신과 시대의 변화가 디자인의 대대적인 변화를 이끌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디자인이 등장하리라는 견해다.
김민규 건축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디자인이 바뀔 것이다. 지금은 제품과 건물을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보화·디지털 시대가 되고, 이커머스 시대가 도래하며 심리, 정보 등 유형에서 무형의 디자인이 등장하리라 본다”고 전망했다. 이성호 대표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통해 ‘현실경험’을 대체하는 완벽한 ‘가상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는 많은 산업분야에서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보의 시각화가 건축에 가져올 변화는 상상 속 미래를 불러왔다. 김찬중 건축가는 “현재의 우리는 지식 생산을 재조작해 제3의 것도 만들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며 “애니메이션, 홀로그램 등 정보 시각화 기술이 발달하면서 한국에 있으면서 폴란드나 남극에 다녀온 것 같은 가상공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고승희·김유진·홍태화·이민경·김용재·신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