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 3월 청산 돌입 미술감정연구센터 설립 놓고 잇단 잡음 화랑협회도 12년 만에 감정 업무 재개 17년간 9000건 감정자료, 폐기 기로에 “공신력 갖춘 전문기구 설립 서둘러야”
# 인사동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A씨는 최근 당혹스런 상황에 처했다. 자신에게서 그림을 구매한 콜렉터 B씨가 그림의 진위가 의심스럽다며 물러달라고 한 것. A씨는 지난 3월까지 문을 열었던 ‘(주)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에서 감정보증서를 받아 판매했으나, B씨가 최근 설립된 ‘(주)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에서 ‘위작’ 의견을 받은 것이다. A씨는 어쩔 수 없이 그림거래를 취소했다. 평가원의 해산으로 더이상 감정보증서의 공신력이 없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미술품감정평가를 놓고 미술시장에서 잡음이 일고 있다. 최근까지 미술품 감정평가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이하 평가원)이 지난 3월 문을 닫았고, 곧이어 새로운 회사인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이하 센터)가 문을 연게 그 발단이다. 한국화랑협회도 21일 오는 8월 중순부터 미술품감정업무를 12년만에 재개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술품 감정 세대교체와 공공성 강화를 외치지만 소송전까지 벌어지며 해묵은 이권 다툼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21일 미술계에 따르면 평가원은 지난해 9월 해산을 결의했다. 평가원이 해산에 관련해 화랑협회에 보낸 문서에는 ‘그동안 평가원과 (사)한국미술품감정협회의 조직과 업무가 일치해 이를 일원화 하자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있었기에, 감정이 공공성을 가진 업무영역에 해당되므로 두 법인의 업무를 사단법인으로 이관 하는데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적시돼 있다.
지난 2002년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로 출범한 평가원은 2012년 사단법인 한국미술품감정협회와 주식회사인 감정평가원으로 분리 운영돼 왔다. 같은 업무를 굳이 두 개 기관이 나눠 한 데에는 당시 사단법인이 영리활동을 추구하는 것이 법인 설립취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는 게 평가원 내부인사의 설명이다.
평가원은 지난 3월 18일 주총을 열고, 공동대표였던 임명석 우림화랑 대표를 청산인으로 지정하며 본격적 청산에 착수했다. 19일 청산을 신고하는 등 순항하는 듯 했던 청산절차는 평가원 주주 일부가 센터 설립에 참여해 불투명해진 상태다. 센터는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과 이호숙 전 서울옥션 스페셜리스트를 대표자로 내세워 신규 회사를 평가원 청산 신고 며칠 뒤인 23일 설립했다.
이에 엄 전 대표를 비롯한 일부 평가원 인사들은 임명석 청산인을 상대로 청산인해임청구소송을 지난달 17일 제기했다. 임명석 청산인은 현재 신규 설립된 센터의 주주다. 소송을 담당한 안서연 법무법인 강남 변호사는 “상법상 경업금지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한 회사에서 이사로 근무하던 중 동일한 업종의 다른 회사를 설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청산인 업무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행하고 있지 않다고 보고있다”며 해임청구의 이유를 밝혔다.
평가원 해산과 센터 설립을 놓고 소송까지 벌어지는 가운데 또 다른 뜨거운 감자는 평가원의 과거 감정자료다. 지난 17년간 축적한 감정자료에 대해 평가원 일부 주주가 폐기 방침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엄 전 대표는 “감정자료는 100% 평가원 것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유족 혹은 작가, 연구기관이 제공한 자료 등 여러 기관이 관여돼 있다”며 폐기 반대 방침을 명확히 했다. 화랑협회측도 지난 4일 평가원 감정자료 등에 대한 가처분 금지신청을 낸 상태다. 윤용철 화랑협회 부회장은 “9000여건에 달하는 감정자료엔 감정 진위의 바탕이 되는 자료는 물론 감정의견서도 포함돼 있다. 앞서 감정한 사람들의 의견을 열람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시장에서는 평가원이 지난 17년간 발행한 ‘감정평가서’에 대한 우려가 비등하고 있다. 평가서를 발급한 법인이 사라졌으니 문서의 법적 효력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화랑협회는 감정자료 확보를 전제로 평가원의 감정서를 보증해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웅철 화랑협회장은 “평가원이 감정서를 발급할 때 화랑협회도 참여했기 때문에,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18일 센터는 출범 기자간담회를 열고 “여러 민간 감정기구가 경쟁해야 발전이 있다”며 “센터는 평가원 해산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새로운 법인이다. 앞으로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돼 감정업무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전문적이고 공신력있는 미술품감정기구의 필요성은 오래된 과제다. 정부도 위작 미술품 유통과 허위감정 등 시장질서 교란을 방지하기 위해 ‘미술품 유통법’ 안을 만들어 지난 2017년 발의했다. 올해 2월에는 김영주 의원이 ‘미술품의 유통 및 감정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 하기도 했다. 두 법안 모두 국가가 특정 기관을 ‘미술품감정연구센터’로 지정하도록 돼있다. 현재 법안은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회부된 상태다.
이한빛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