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국내 증시가 급격한 조정을 겪으면서 개인투자자들의 투자 열기가 빠르게 식고 있다. 한때 140조원에 육박했던 증시 대기자금은 4개월여 만에 51조원 넘게 감소했고, 빚을 내 주식을 사들이는 ‘빚투’ 규모도 급격히 줄었다. 코스피가 7000선에서 5500선까지 밀려난 가운데 국내 증시 대신 미국 주식에 눈을 돌리는 투자자들도 늘고 있다.
25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2일 기준 투자자예탁금은 88조6841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1월 13일 기록한 88조489억원 이후 9개월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증시 대기자금이 빠르게 줄어드는 동시에 개인투자자들의 차입 투자 규모까지 감소하면서 국내 증시의 수급 기반이 약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40조원 육박하던 예탁금 88조원대로…넉 달 새 51조 감소
투자자예탁금은 지난 6월 4일 139조6948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당시 코스피 상승세에 힘입어 개인투자자들의 자금이 증권계좌로 대거 유입된 영향이다.
그러나 이후 증시가 하락세로 돌아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달 14일에는 예탁금이 100조원 아래로 떨어졌고, 지난 21일에는 90조원 선마저 무너졌다. 불과 6거래일 만에 10조원 이상 감소한 것이다.
지난 22일 기준으로는 88조6841억원까지 줄었다. 6월 최고치와 비교하면 51조107억원, 약 36.5%가 감소했다. 이달 들어서만 줄어든 금액도 약 15조원에 이른다.
투자자예탁금은 개인투자자가 증권사 계좌에 넣어둔 돈 가운데 주식 매수에 사용하지 않은 자금을 의미한다. 향후 주식을 사들일 수 있는 대기성 자금인 만큼 증시의 매수 여력을 보여주는 주요 지표로 활용된다.
최근 국내 증시는 가파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이달 초 7000선을 넘나들던 코스피는 지난 22일 5533.77까지 밀려났다. 하루 동안 지수가 3.52% 급락하며 투자심리가 크게 위축됐다.
23일에는 장 초반 5300선까지 내려갔다가 5550.30으로 반등 마감했지만, 시장의 변동성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다만 예탁금 감소액 전체가 국내 증시 밖으로 빠져나간 자금인 것은 아니다. 주식을 사들이는 데 예탁금을 사용해도 잔액은 줄어든다.
실제 지난 6월 4일부터 이달 23일까지 개인투자자는 코스피에서 44조1661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같은 기간 코스닥에서도 3조1456억원어치를 사들였다. 상장지수펀드(ETF) 순매수 규모도 28조2538억원에 달한다.
상당한 규모의 예탁금이 국내 주식과 ETF 매입에 사용된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는 기존 자금이 주식 매수에 투입되는 동안 신규 자금 유입은 크게 둔화했다는 점이다.
상반기 상승장에서는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을 대거 사들여도 증권계좌로 들어오는 신규 자금이 더 많아 예탁금이 증가했다. 최근에는 하락장에서 주식을 매수하는 투자자들이 남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새로운 자금은 충분히 유입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외국인과 기관의 대규모 매도세가 나타날 경우 이를 받아낼 개인투자자의 추가 매수 여력이 약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SK하이닉스 ‘빚투’도 급감…한 달 새 3조원 넘게 줄어
주가 하락이 장기화하면서 신용거래융자 잔고도 감소하고 있다.
신용거래융자는 투자자가 증권사에서 자금을 빌려 주식을 매수한 금액이다. 잔고가 줄어든다는 것은 차입을 활용한 주식 투자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21일 기준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30조271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달 초 33조3901억원과 비교하면 3조1191억원 감소했다.
특히 최근 하락 폭이 컸던 반도체 대형주에서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SK하이닉스의 신용융자 잔고는 지난 13일부터 7거래일 연속 줄어들며 약 6500억원 감소했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에서도 신용융자 잔고가 5000억원 가까이 축소됐다.
주가가 급락하면서 투자자들이 빌린 돈을 상환하거나 보유 주식을 정리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증권사에서 빌린 돈으로 주식을 매수한 경우 주가가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추가 담보를 요구받을 수 있다.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증권사가 주식을 강제로 처분하는 반대매매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매도 물량이 증가하면 주가가 추가로 하락하고, 다시 반대매매를 부르는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
실제 최근 급락장에서는 반대매매가 일시적으로 급증하기도 했다. 다만 지난 21일 위탁매매 미수금 대비 반대매매 금액은 129억원으로 전 거래일 226억원보다 감소했다.
신용융자 잔고가 줄어드는 과정에는 강제청산뿐 아니라 투자자의 자발적인 대출 상환도 반영된다.
시장에서는 차입 투자 축소와 예탁금 감소가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주가 하락을 추가 매수 기회로 삼기보다 투자 규모와 위험 부담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장 열정 식었다”…미국 주식으로 이동하는 개미들
국내 증시의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개인투자자들의 관심은 해외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 통계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들은 지난 7월 미국 주식을 약 46억4000만달러 순매수했다. 4~5월 순매도에서 6월 순매수로 전환한 이후 미국 주식 매입 규모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8~9월에는 매수세가 다소 주춤했지만, 이달 들어 다시 확대되면서 지난 21일까지 미국 주식 순매수 규모가 약 48억달러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국내 증시에서 나타난 급격한 등락과 외국인의 대규모 매도세가 투자자들의 피로감을 높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식 매수 대기자금 역할을 하는 고객예탁금은 코스피 흐름에 비해 유입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며 “국내 증시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고 평가했다.
강혜성 상상인증권 연구원도 “7월 이후 개인자금은 국내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8월 이후 원화 강세가 달러 환전 수요를 자극하고 국내 투자 매력도를 떨어뜨렸다”고 분석했다.
국내 증시의 향후 수급 전망도 투자심리 회복 여부에 달려 있다는 평가다.
최근 외국인 매도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개인투자자들의 신규 자금 유입까지 둔화하면서 증시 반등을 뒷받침할 매수 기반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종의 실적 개선과 함께 향후 성장 전망에 대한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재승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국내 증시의 향후 반등 조건과 관련해 2027년 기업 이익 전망치의 상향 조정과 2028년 이익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국내 증시는 기존 투자자들의 대규모 순매수에도 주가 하락이 이어지면서 신규 투자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주식으로 향하는 자금이 늘어나는 가운데 개인투자자들이 다시 국내 시장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만한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가 향후 증시 회복의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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