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역사편. 조피 대공비
황궁의 악녀·최악 시어머니 악명
압박감과 책임감이 불러온 비극
아들·며느리·손주까지 다 잃고
황실 부흥 꿈꿨지만 몰락만 자극
편집자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이번 기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깁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남편 대신 아들을 황제로,
대공비의 결단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그러니까,
당신 말고,
당신보다 똑똑한 우리 아들을 황위에 올리세요.
조피 프레데리케 대공비가 말했다. 남편 프란츠 카를 대공은 반박하지 못했다.
조피 말이 맞았다. 프란츠 카를은 어눌했다. 타고나길 어리숙했다. 그는 이곳,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인 프란츠 1세의 셋째 아들이었다. 다만, 단지 그뿐이었다.
순리라면 이제 그가 황제에 오를 차례이긴 했다. 프란츠 카를의 첫째 형 페르디난트 1세가 직전의 황제였다. 그런 그가 막 퇴위했다. 그 역시 유약한 인간이었다. 좋아하는 살구 페이스트리가 없으면 곧잘 성을 내던 그는, 정작 유럽 땅을 흔든 1848년 혁명 앞에선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상 왕정 회귀(回歸)를 꾀한 빈 체제에 맞서 터진 이 자유주의 운동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직을 내려놓은 건 이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프란츠 카를의 둘째 형 요제프 프란츠 레오폴트는 고작 여덟 살 나이로 요절한 상황이었다. 이러니 원래대로라면 셋째인 프란츠 카를이 빈 왕좌를 차지해야 마땅했다. 황실 보수파를 등에 업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일지, 혁명 세력에 숨통을 터주며 포용력 있는 개혁 군주의 면을 보일지 결단해야 했다.
그런데, 프란츠 카를은 어느 쪽도 해낼 수 없을 듯했다.
그 또한 자기 형처럼 좋아하는 디저트나 찾다가 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아내 조피가 승부수를 띄운 건 이 때문이었다.
“나와 당신 사이 장남, 프란츠 요제프를 대신 황제로 올리자”는 것. 흔들리는 제국을 위해선 어수룩한 당신 대신, ‘멀쩡한’ 이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는 괜찮은 묘책이었다.
황실 입장에선 어쨌건 황가의 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혁명 세력에게는 이를 구태의연한 황위 계승 관행을 무너뜨리는, 일종의 돌이킬 수 없는 진보로 내세울 수 있었다. 게다가 프란츠 요제프는 이제 겨우 열여덟이었다. 그는 어리고, 신선하고, 참신해보였다. 이토록 젊은 군주라면 지금의 낡은 체제를 털어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심어줄 수 있었다.
1848년, 12월2일. 새로운 황제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이름으로 왕좌에 앉았다.
고개를 든 그는… 아버지 프란츠 카를이 아닌, 아들 프란츠 요제프였다.
조피의 구상대로였다. 이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름을 단 앳된 얼굴의 그는, 뚜껑을 열어보니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군주의 권리는 신으로부터 받은 것)을 의식하는 완고한 황실파였다. 개혁 진영은 혈기왕성한 늑대가 서려 있기를 바랐지만, 의외로 이 소년의 껍데기 안에 있는 건 늙은 호랑이였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황실의 판을 깰 진보 정책을 앞세울 뜻이 없어보였다. 타협 여지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매 순간 통곡의 벽을 떠올리게 할 만큼 꼿꼿한 태도를 보였다. 개혁파가 수싸움에서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페르디난트 1세를 몰아낼 때와 같은 동력도, 명분도 없었다. 분통을 삼키며 따르는 수밖에. 이러한 흐름 또한, 황실을 지키기 위한 조피의 계획대로였다.
“황궁의 유일한 장군”
가문의 등불로 나섰지만…
화려한 머리 장식에 오프숄더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인, 조피.
그녀가 앳된 아들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함께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알 굵은 보석 귀걸이와 목걸이를 한 채 흰색 레이스 숄까지 두른 그녀는 금박의 궁정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코르셋으로 조인 허리를 곧추세운 그녀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가정의 여신 헤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래의 황제를 무릎에 올린 채 자랑하듯 들어올린 자세 또한 의미심장하다.
단연 시선을 끄는 건 조피의 형형한 눈빛. 이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얼굴과 흰 가운, 순수를 뜻하는 작은 꽃다발마저 흐릿하게 할 만큼 존재감을 내보인다. 궁정화가 요제프 카를 슈틸러의 작품, <바이에른의 공주 조피와 그의 아들 프란츠>다.
조피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황궁의 유일한 장군(사내)”이라고 불릴 만큼 기가 셌다.
차츰 저물어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일원으로 똑똑하고, 야심 있고, 실행력까지 갖춘 조피는 가문 내 유일한 등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아들을 황제로 올리며 권력까지 거머쥐었다. 그녀 또한 황후가 될 기회를 버리고 대공비 자리에 만족해야 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원한 건 직보다는 영향력이었으니.
조피는 황가를 지키고 싶었다.
물러터진 사내 녀석들이 할 수 없다면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 주도의 황실 부흥이 시작되는가. 결말부터 말하자면, 그러지 못했다. 조피는 나름대로 애썼다. 자신이 해야 한다고 여긴 모든 영역에서 최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본인이 속한 세계를 위해 분투할수록, 그녀는 손을 대는 모든 곳을 폐허로 이끌 뿐이었다. 진실로 전혀, 맹세코 절대 파멸을 바란 적이 없었으나 결과는 늘 가혹했다. 대체 왜…?
출중한 외모, 타고난 추진력…
막후 실세로 자리 잡다
조피는 1805년 바이에른 왕국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카롤리네 공녀 사이에서 출생했다.
조피는 날 때부터 외모가 출중했다. 푸른 눈동자는 반짝였고, 턱선은 군더더기 없이 갸름했다. 풍성한 머리숱에 허리도 탄탄했다. 소문도 자자했다. 가까운 미래, 루트비히 1세(바이에른 2대 국왕)는 동시대 미녀 초상화를 모은 일명 ‘미인 갤러리’에 그녀의 얼굴 그림을 걸어두기도 했다. 조피는 욕심도 있었다. 그 욕심에 어울리는 강단이 있고, 추진력도 쥐고 있었다. 원하는 바는 반드시 가져야 하는 성질도 갖췄다. 부모는 그녀의 이러한 면을 매력적으로 봤다. 기실 왕국의 공주라면 그 정도 성깔은 있어야 한다고 봤다. 실제로 부모가 여섯 자식 중 가장 아낀 이 또한 그녀였다.
조피는 1824년 열아홉 나이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카를 대공과 연을 맺었다.
정략결혼이었다. 처음에는 싫었다. 한탄스러웠다. 심약하고 둔감한 이 남자가 성에 찰 리 없었다.
조피는 울었다. 그리고, 다 울고선 다시 권력판을 봤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였던 페르디난트 1세. 조피에게선 아주버님이 되는 이 인간은 그때부터도 얼빠진 면을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식을 만들어낼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런 그가 후사 없이 일찍 죽거나 물러나면? 당연히 그의 동생인 남편이 다음 순번이 될 터였다. 그때는 그녀 또한 입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공비가 아닌, 황후의 묵직한 옷감을.
조피는 아내 역할에 성실히 임했다.
아들도 넷이나 낳아 눈치 볼 일도 없었다. 자식 교육에도 열을 올렸다. 첫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몸에 일찌감치 늙은 호랑이를 들인 것 또한 그녀였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찰싹 붙어 황실의 역사와 예법을 가르친 결과였다. 그사이 시간이 흘렀다. 1848년 혁명이 발발하고, 살구 페이스트리나 찾던 페르디난트 1세는 예상대로 못 버텨 퇴위하고….
문제도 있긴 했다. 이번 격랑이 아주버님만이 아닌, 자칫하면 황궁 전체를 집어삼킬 만큼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이 와중에, 남편은 조피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무능력한 면만 보이고 있었다. 조피는 또 한 번 판을 보고, 이번에는 직접 판을 짰다. 기나긴 불면의 밤이었다. 결심이 서자 남편을 불러다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보다 똑똑한 우리 아들을 황위에 올리세요”라는 그 권유 같은 강요를.
작전은 통했다. 황궁의 무기력함도, 혁명 세력의 기세와 압박도 일단은 잠재웠다. 이제 조피는 한때 꿈꿨던 황후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대공비였다. 말이 대공비일 뿐, 실제로는 황후보다도 영향력이 큰 막후의 실세였다.
악의 아닌 선의였지만,
너무 힘을 줬다
후세에 남은 모든 나쁜 본보기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를 갖고 생겨난 것이었다.
Omnia mala exempla ex rebus bonis orta sunt.
조피가 이끈 비극은 악의가 아닌, 외려 그녀의 책임감이 일군 것이었다.
실세가 된 조피는 본인을 황궁의 질서를 지킬 마지막 방파제로 여겼다. 그러나 너무 힘을 줬다. 그것을 너무도 높고 단단하게 두려고 했다. 모든 문제는 이 때문에 발생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분명 좋았는데
뜻하지 않은 ‘막장 드라마’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무사히 황위에 올린 조피는 다음 할 일을 생각했다.
내 아들 황제에게 맞는, 보다 정확히는 제국에 어울리는 황후를 고르는 게 그것이었다.
조피가 일찌감치 찍어둔 신붓감은 있었다.
친정 조카 헬레네였다. 그녀의 외모는 평범했다. 성격도 약간 까다로웠다. 그래도 예법에 밝았다. 지배층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 눈치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꽂힌 건 헬레네가 아닌 그녀의 말괄량이 여동생, 엘리자베트-훗날 시씨(Sisi·Sissi)로 불릴 소녀였다. 시씨는 놀라울 만큼 예쁘고 깜찍한 아이였다. 웬만하면 조피 뜻을 따르던 프란츠 요제프 1세마저 “시씨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억지를 부릴 지경이었다.
1854년, 4월. 스물넷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열일곱의 시씨가 결혼식을 올렸다.
조피도 미소를 지었다. 계산한 상황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렴 괜찮을 듯싶었다. 꽉 막힌 아들에겐 귀염성 있는 아내가 있는 게 되레 나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을 터였다.
시씨가 손수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을 봤어.
나 또한 그 고상함과 우아함에 빠지고 말았지.
조피는 자매에게 이런 편지를 쓸 만큼 본인 또한 시씨를 좋게 보고 있었다.
그 아이를 위축시킨 건 수많은 사람이었어.
사교계라는 큰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기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했을 게 분명해.
심지어, 시씨가 공식 행사에서 거듭 어색한 모습을 보일 때도 이렇게 변호하곤 했다. 하지만….
황궁으로 온 시씨는 매일 울었다.
참 많이도 울었다. 시씨는 아직 어렸다. 타고나길 여리고 예민했다. 평생을 자유분방하게 자란 그녀에게 손 흔드는 법조차 통제하는 황실의 규범은 결코 쉽지 않았다. 조피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가기 시작했다. 조피는 울보 황후를 원치 않았다. 필요로 한 건 나라를 다독일 수 있는 성숙한 황후였다. 그래서, 조피는 본인이 나서 시씨를 어른스럽게 만들 생각을 품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조피는 시씨에게도 바짝 붙었다.
표정과 말투, 걸음걸이, 식사 습관과 치아 위생, 궁정 사람과의 교제 방식까지 가르치고자 했다. 본인이 함께할 수 없을 때는 궁녀를 붙여 시씨의 일상을 보고하게 했다. 조피는 시씨가 강해지길 바랐다. 그러나 시씨에게 깃든 건 우울증이었다. 좁은 복도에 있으면 벌벌 떠는 폐소 공포증, 조피 특유의 당찬 발소리가 들리면 식은땀을 흘리는 공황도 겪었다. 조피는 조피대로 실망하고, 시씨는 시씨대로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악순환이었다.
그런 시씨가 의심스러웠을까.
조피는 시씨가 낳은 첫딸을 자기 처소 옆방으로 데려왔다. 뒤이어 낳은 둘째 딸에게도 같은 조치를 했다. 조피와 궁정 가정교사가 아이들의 양육을 주도했다. 원래도 황실에선 왕자든 공주든 모두가 달라붙어 키우는 게 맞긴 했다. 하지만, 시씨와 시씨의 아이들에게는 이 관례를 유독 가혹하게 적용했다. 시씨는 어느덧 두 딸을 보기 위해선 책임자의 허락부터 받아야 했다고 한다. 다름 아닌, 자기가 직접 낳은 자식들이었는데도.
그러다 일이 터지고 만다. 시씨는 조피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딸과 함께 헝가리 왕국을 찾았다. 그쯤부터 첫째, 조피가 직접 자기 이름을 따 붙인 아기 조피가 고열과 복통을 앓았다. 숨이 넘어갈 듯 앙앙 울던 아이는 결국 사망했다. 1857년의 어느 날, 나이는 고작 두 살이었다.
조피도 땅을 치고, 시씨도 바닥을 쳤다. 둘 다 서로를 노려봤다. 조피는 시씨를 자기 딸 하나 챙기지 못한 철부지로, 시씨는 조피에 대해 나를 자식 죽인 어미로 만든(애초 딸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으면 고집도 피우지 않았을 터라는 생각에) 냉혈한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시씨는 황궁 모두가 기다려온 아들 루돌프를 낳았다. 프란츠 요제프 1세에 이어 황실을 이끌 적통 후계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조피가 어떻게 했겠는가. 이번에도 당연한 듯 핏덩이를 안고 데려갔다. 시씨는? 반항할 힘도 없어보였다. 시씨는 이 무렵부터 평생 빈 밖을 떠돌았다. 우울과 방황의 늪에서 황후로도, 어머니로도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런 시씨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조피는 시씨를 뜻대로 이끌지 못했다.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방랑하는 황후, 황족 간 파탄 난 관계는 제국의 또 다른 불안 요소로 뿌리내렸다.
죽어가는 황태자의 정신,
육신이 뒤늦게 따르다
애석하게도, 조피는 손자 루돌프 황태자 또한 원하는 대로 이끌지 못했다.
이 또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루돌프는 꽃을 피우기도 전 스스로 삶의 줄을 끊어버렸다.
루돌프는 어머니 시씨만큼 여렸다. 감성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결코 권총 소리로 아침 잠을 깨우거나, 눈길 속 밤새 행군을 시키는 식으로 키우면 안 될 아이였다.
루돌프는 일곱 살때부터 원치 않는 고강도 제왕 수업을 받았다. 할머니 조피의 묵인, 아울러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주도하에 매번 일정표를 꽉 채워야 했다. 독일어, 프랑스어, 폴란드어, 헝가리어, 심지어 라틴어와 그리스어…. 책상에 앉아선 이와 함께 법학, 역사, 지리, 수학까지 함께 배웠다. 책상 밖에서는 찬물을 맞고, 사냥을 하고, 덤불을 파헤치고, 빙판을 걸어야 했다. 이를 두고 본 조피는 손자가 강해지길 바랐을 것이다. 모든 날을 견디고 단단해져 제국의 권위를 높이는 차기 지도자가 되길 원했을 것이다. 다만 그럴수록 루돌프는 어머니 시씨처럼 반감을 갖고, 기운은 잃을 뿐이었다.
결과는 파국이었다. 루돌프는 사냥용 별장에서 죽었다. 내연녀와 함께 생을 마쳤다. 물론 이는 조피가 세상을 등지고 한참 후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루돌프의 정신은 이미 어릴 적부터 죽어가고 있었다. 미처 떠나지 못한 육신이 그날 뒤늦게 따라갔을 뿐이었다.
제국은 그렇게 가장 정통성 있는 황태자를 잃었다. 조피만의 잘못이라곤 결코 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권력 구도상으로도 여러 이유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오판이 컸다. 다만 루돌프가 ‘닳아 없어지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비상식적 교육, 여기에 있어선 조피가 가장 입김 센 동조자이자 방관자이기는 했다. 비극은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가장 크고 묵직한 한 방이 남아 있었다. 조피는 더 울어야 했다. 더 길게 흐느껴야 했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마저
허무하게 잃고
조피가 가장 사랑한 자식은 둘째 아들 막시밀리안이었다.
조피와 첫째 프란츠 요제프 1세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있었다. 분명 서로를 사랑하는 모자 관계였지만, 막후 실세와 젊은 황제 간의 신경전 또한 없지 않았다.
그런 조피에게 막시밀리안은 함께 있기 편한 아이였다. 얽힌 게 없으니 아낌없이 사랑을 줘도 되는 자식이었다. 막시밀리안 또한 형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달리 귀염성이 있었다. 그 엄한 조피가 막시밀리안만큼은 감싸고 돈 만큼, 궁정에선 한때 기이한 소문도 돌았다. 조피의 얼빠진 남편 프란츠 카를이 아닌, 잘 생기고 분위기도 있는 나폴레옹 2세(당시 그는 아버지 나폴레옹 1세의 몰락 후 피신 격으로 빈에 와 있었다)가 막시밀리안의 진짜 아버지라는 게 그것이었다. 실제로 조피는 나폴레옹 2세의 병간호를 직접 해줄 만큼 그를 각별히 여겼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이 점점 더 친아버지 프란츠 카를의 외모와 판박이가 됐기에, 추측은 맥없이 사라졌다.
막시밀리안은 해군복을 입었다.
한때 해군 총사령관으로 있었으며, 짧게나마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총독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삶은 딱 이 정도 길을 걸을 듯했다. 형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건재한 만큼 그 이상은 바랄 것도, 바랄 수도 없을 법했다. 괜찮아보였다. 이 또한 충분히 황족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악마의 속삭임과 같은 권유에 귀를 기울이고 만다.
그것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제안이었다. 멕시코. 왕당파와 자유파가 격한 충돌을 벌이는 그곳의 황제가 돼보라는 것이었다. 그 나라 왕당파를 등에 업고 구원자 역할을 해보라는 얘기였다. “유럽을 싹다 뒤지며 적임자를 찾아봤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는 황족은 오직 당신밖에 없었소.” 이 말 또한 괜히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막시밀리안도 처음에는 거절했다. 조피는 아예 분노한 듯 날뛰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프랑스가 막시밀리안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 아이를 꼭두각시 삼아 이권이나 챙기려 할 것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더 길길이 반대했다. 황궁에 남아 우리 제국의 제위 계승자나 많이 낳고 기르는 게 너의 의무라는 식으로 다독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결국 이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프랑스의 허울뿐인 군사 지원을 믿고 만 것이었다. 프랑스 측 주도로 조작한 멕시코 내 가짜 여론조사에 속고 만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만년 이인자에서 벗어나 형처럼 군림하고 싶다는 욕망 또한 분명 있기는 했을 터였다.
무구한 환상의 대가는 가혹했다. 돌아온 건 총살형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멕시코의 막시밀리아노 1세가 돼 황위에 올랐다. 다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는 순진한 낙하산이었다. 어느 세력의 마음도 얻지 못했다. 미국이 막시밀리아노 1세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불안감만 더 커졌다. 혼란에 질린 프랑스는 망설임 없이 군을 돌렸다. 약속 따위는 구겨진 종이조각이었다. 정신 차려보니 혼자였다. 눈앞에는 자유파 진영 군대의 총구가 있었다. 그는 죽기 전 병사에게 금화를 건네며 부탁했다. 나의 어머니, 조피가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얼굴만은 쏘지 말라고. 그는 그렇게 죽었다. 어떻게 손 쓸 도리도 없이, 그냥 그렇게 죽어버렸다. 1864년 6월 서른두 살로 즉위한 그는 1867년 6월 서른다섯 살에 삶을 마쳤다. 고작 3년 만에.
소식을 받아든 조피는 곧 졸도할 듯 흐느꼈다. 그간에도 울 순간이야 많았지만, 이번에는 피까지 함께 쏟는 느낌이었다.
조피는 후회했다. 더 강하게 막아서지 않은 데 대해 뼈저리게 자책했다. 그리고, 이쯤 두 아들을 키운 방식을 돌아봤을지도 모른다.
결과가 이랬다.
군주로의 엄격함만 강요한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메마른 관료가 돼 있었다. 일 중독자라고 불릴 만큼 성실한 지도자로 키울 수 있었지만, 일 아닌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선 무감각한 태도를 갖추게끔 만들었다. 실제로 그는 아내 시씨의 방황도 사실상 방관했다. 동생이 기어코 멕시코로 가겠다고 하자 다독이긴커녕, 대공의 권리와 제위 계승권을 모두 박탈하겠다며 외려 더 몰아세우기나 했다. 이렇듯 일(이조차도 성과를 놓곤 평가가 분분하지만) 말고는 모든 면에서 서툰 존재가 되고 만 것이었다.
반대로 애정을 쏟은 차남 막시밀리안은? 현실 감각 없는 이상주의자가 돼 알아서 파멸했다. 그러니까, 조피는 형제를 극과 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서로를 사랑하는 한편 가지지 못한 것을 질투하게 하고,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라이벌 관계로 이끌고 말았다. 물론 이 또한 조피의 행보만을 비극 원인으로 지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두 자식 모두 천성이 다르고, 자리가 다르고, 각자 처한 상황과 환경마저 달랐던 일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뿌리를 찾아가 보니 역시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교육이었다. 교육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일그러짐의 시작을 찾다보면 많은 경우 걸리는 게 어린 시절 양육과 가르침인 법이다.
손바닥 펴보니,
잡히는 건 잿가루뿐
1872년.
예순일곱의 조피는 혼자서는 침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조피는 차남 막시밀리안의 총살 후 급격하게 기력을 잃었다. “궁정의 유일한 장군감”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수시로 폐렴을 앓았다. 뇌졸중을 겪고, 언젠가부터는 숨이 옅어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조피가 바란 건 나라의 부흥과 황가의 재기였다. 이를 이루기 위한 야심과 결단력도 있었다. 긴긴 세월, 손바닥을 펴보니 잡히는 건 금빛 영광 아닌 잿가루뿐이었다.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주.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려고 한 모든 존재가 저마다의 지옥을 겪는 데 일조했다. 너무 꽉 쥐고 말았다. 그렇게 망가뜨리기를 반복했고, 종국에는 자신조차 망가지고 말았다.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조피는 그해 5월28일 영영 눈을 감았다.
세상은 그녀에 대고 모든 것을 파멸로 몰고 간 “악녀(boese Frau)”라고 부르기도 했다. 황궁의 마녀 또는 최악의 시어머니로 칭해지기도 했다. 그럴 뜻은 전혀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녀는 5년 전 죽은 막시밀리안과 같은 납골당에 묻혔다. 선악과 상관없이, 조피가 죽은 후 황궁에는 그녀만큼 무게중심을 잡아줄 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무심한 제국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참고자료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까치
Ehrlich, Anna., Bauer, Christa., Erzherzogin Sophie, Wien: Amalthea Signum Verlag.
Bled, Jean-Paul., Sophie de Habsbourg, Paris: Perrin
Van der Kiste, John., Emperor Francis Joseph: Life, death and the fall of the Hapsburg Empire., Thrupp, Stroud, Gloucestershire: Sutton
yul@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