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마에스트로’ 역할에 대한 공방
예술은 기본, 비즈니스도 관심 가져
모금 1달러당 지출 비용 계산해야
하나의 무대가 만들어지기까진 수많은 이야기가 담깁니다. 스포트라이트는 무대 위의 ‘주인공’에게 쏟아지나, 그 뒤엔 자신의 이름을 감춘 무명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가장 완벽한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물질하며 자신만의 숨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갑니다. 무대 뒤의 모든 존재를 담아 들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라마다 지휘자의 역할이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근데 (저한테) 미국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어요. 한국에선 행정만 같이 한다 정도로 봤는데, 미국은 직접 돈도 벌어야 한다는 인식이 컸어요. 연단에 올라 ‘10만 달러를 기부해 주세요’라고 말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최근 열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지휘자 워크숍에서 ‘최우수 지휘자’로 뽑힌 최재혁(32)이 한 말이다.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루체른 페스티벌 아카데미 오케스트라, 베를린 신포니에타, 톤할레 오케스터 취리히 등을 지휘하며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그에게도 미국 오케스트라는 미지의 세계다.
클래식 음악계 안팎에는 미국 톱티어 교향악단에 대한 뿌리 깊은 통념이 하나 있다. 미국에서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 되려면 ‘음악만 잘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 오케스트라에선 지휘자가 직접 거액의 기부금을 유치하거나 후원회를 찾아다니며 세일즈를 펼쳐야 한다는 인식이다.
국공립 악단이 전무하고 단체 재정의 60% 이상을 민간 후원금과 기본재산 운용 수익에 의존하는 미국 오케스트라의 시장주의적 환경이 낳은 대표적인 오해다.
킴 놀테미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최고경영자는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나 “미국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그런(세일즈) 능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휘자가 경영엔 ‘문외한’이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놀테미 대표는 “예술적 문제가 최우선이나, 오케스트라는 현실 세계에서 운영되는 조직이니 비즈니스 측면도 중요하다”며 “다만 그것이 지휘자의 첫 번째 관심사일 필요는 없다”고 귀띔했다.
돈 벌어야 하는 지휘자? 본업 잘 해야 자산가 지갑 연다
미국의 지휘자들에겐 왜 ‘자본 동원력’이 주요 역량으로 평가된다는 인식이 자리했을까.
사실 이러한 오해는 역할의 차이를 확대 해석된 것에서 비롯됐다. 미국에서 지휘자는 직접 장부를 들고 다니는 ‘영업 행위’가 아니라,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의 모금 활동에 강력한 정당성과 예술적 명분을 부여하는 ‘예술적 보증인’이자 기부자 스튜어드십의 구심점으로 존재한다.
킴 놀테미 대표는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선발 심사에서 비즈니스 수완이나 모금 이력은 평가 잣대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역할도 구분돼 있다. LA필하모닉에서 킴 놀테미는대표이자 CEO로 조직을 진두지휘하고, 두다멜을 잇는 차기 지휘자인 다니엘 하딩은 2027/28시즌부터 음악감독을 맡는다. 하딩은 오케스트라의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할리우드 볼, 포드의 공연을 비롯해 로스앤젤레스 유스 오케스트라(YOLA, Youth Orchestra Los Angeles), 신작 위촉, 투어와 국제 협업 등을 이끌게 된다. 반면 기부 업무는 별도의 전문 조직이 맡는다. LA필하모닉은 2025년 최고 기부책임자로 미치 배시언을 임명했다.
지휘자에게 요구되는 1순위 기준은 무대 위에서 단원들을 장악하고 앙상블의 소리를 조탁해 내는 음악적 능력이다. 아무리 화려한 정·재계 네트워크를 보유한 지휘자라 할지라도, 무대 위 음악적 카리스마와 해석력이 부족하다면 톱티어 악단의 최종 후보군에선 ‘아웃’이다. 지휘자의 음악적 탁월함이 ‘초고액 자산가’를 움직이는 후광이기 때문이다.
미국 오케스트라연맹의 2023 회계연도 자료에 따르면 오케스트라의 평균 운영 수입 가운데 민간 후원이 4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티켓 판매가 27%, 기금 운용 인출·이전이 12%, 기타 수입 8%, 정부 지원 6% 등이였다.
LA필하모닉을 비롯한 미국 악단에 따르면, 지난 몇 년 사이 기업 협찬이 위축되면서 미국 교향악단의 기금 개발은 25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 이상을 쾌척하는 초고액 자산가 대상의 ‘메이저 기프트’로 재편됐다.
이들 자산가는 전문 모금가의 행정 서류가 아니라 세계적인 거장과 나누는 사적 교감과 문화적 연대감에 매료돼 지갑을 연다. 지휘자는 정규 연주회 직후 후원자 리셉션에 참석해 음악적 비전을 공유하고, 시즌 오프닝 갈라의 대표 호스트로 나서며 거액의 기부를 매듭짓는 결정적 기폭제가 된다.
킴 놀테미 대표는 “우리는 음악을 사랑하는 부유층, 본인이 아니라도 자녀나 부모가 음악을 사랑하는 부유층과 관계를 쌓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며 “LA의 경우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많아 이 지점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LA뿐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스타 지휘자를 가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역시 마찬가지다. 야닉 네제-세갱은 이사회와 긴밀히 공조하며 악단의 예술적 비전을 확신시켜 익명 후원자로부터 5500만 달러(한화 약 750억 원)라는 단일 최대 규모의 기부금을 받아냈다.
중요한 것은 음악감독의 진정한 ‘경영적 기여’는 포디엄 밖이 아니라 포디움 위에서 판가름 된다는 점이다. 사실 지휘자에게 ‘재정적 부담’이 더해진다는 선입견이 생긴 것은 자본주의 대국 미국에선 오케스트라의 모든 일이 ‘재정’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악단이 연주하는 무대 위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 오케스트라는 프로그램 기획력이 악단의 후원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나치게 학구적이거나 예술성만을 좇는 레퍼토리만 고집하면 지휘자는 ‘조직의 재정’을 잠식할 수 있다.
LA 필하모닉과 17년을 함께 한 구스타보 두다멜은 ‘모범 답안’이라 할만하다. 두다멜은 말러와 베토벤의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라틴 음악, 현대음악 위촉, 영화음악을 과감히 결합해 1만8000석 규모의 할리우드 볼에서 순수 클래식 공연 관객 수 기록을 경신했다. 영리한 프로그래밍으로 관객을 개발, 저변을 넓히는 것 자체가 티켓 파워와 민간 후원금 확대로 직결되는 최고 수준의 경영 행위다.
킴 놀테미 대표는 다니엘 하딩을 선임한 것 역시 “그가 새로운 관객을 끌어들이고 참여시키려는 열정, 글로벌한 시각, 신진 예술가를 키우는 능력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정말로 미국은 돈, 유럽은 예술 지향?
사실 미국 오케스트라와 아시아, 유럽 악단의 가장 큰 차이는 ‘재정 확보’에 대한 접근법이다. 그렇다고 일간의 통념처럼 ‘미국은 돈, 유럽은 예술’을 지향한다는 이분법적 도식도 맞지 않는다. 다만 오케스트라의 운영 체계는 사회가 예술을 대하는 재정 조달 방식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서유럽 악단은 국가와 지자체가 예산의 60~80% 이상을 책임진다.
독일의 경우 연방정부 지원(약 1.3%)보다 주정부(약 42%)와 기초지자체(약 57%)가 재정의 절대다수를 분담하는 문화 연방주의를 지향한다. 공공 재정이 생존을 보장하므로 지휘자는 ‘티켓 판매’나 ‘모금 스트레스’에서 해방된다.
빈 필하모닉은 음악감독 직책 없이 단원 자치 협동조합으로 운영된다. 베를린 필하모닉 역시 단원 무기명 비밀 투표로만 수장을 선출한다. 여기서 지휘자는 ‘경영 간섭’을 받지 않고 음악의 완성도를 조율하는 예술적 파트너로 존재한다.
반면 국가 보조금이 1~2%(전미예술기금 직접 지원)에 불과한 미국 교향악단은 ‘세금 감면’ 혜택을 무기 삼아 민간 기부금을 유치하는 ‘비영리 민간 법인’ 체제다.
덕분에 예술적 비전을 세우는 ‘음악감독’과 재무·마케팅·모금을 총괄하는 ‘최고경영자(CEO)’가 대등하게 이사회에 보고하는 이원적 리더십 구조가 자리 잡았다. CEO가 무대 뒤에서 자본 조달과 조직 내 갈등 조율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면, 지휘자는 포디움 위에서 예술 세계를 직조하며 재정 확보에 힘을 싣는 수평적 동반자다.
한국은 주요 오케스트라인 서울시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등이 대부분 지방자치단체나 국가 공공기관, 공영방송사의 출연금과 재정 지원에 기반한 재단법인 형태로 존재한다. 직함상으로는 미국의 ‘음악감독’ 명칭을 채택하고 단원 평가와 레퍼토리 선정에서 상당한 전결권을 부여받지만, 운영의 실질적인 축은 지자체 조례와 공공 감사, 엄격한 공무원식 행정 절차에 종속돼 있다.
일본의 오케스트라 생태계는 공영방송 조직의 일부로 출발한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기업 메세나 및 민간 후원에 기대는 도쿄 필하모닉 등 민간 악단 군으로 양립된다. NHK 심포니는 미국식 음악감독 명칭 대신 파비오 루이지 등 유럽 지휘자들을 ‘수석 지휘자’로 영입해 순수 음악적 완성도를 유지하는 전통을 지킨다. 일본 민간 악단 역시 개인 고액 모금보다는 대기업의 정기 메세나 협찬과 장기 회원제를 주된 재원으로 삼아 지휘자의 사적 펀드레이징 개입은 제한적이다.
두다멜 38억원 vs 단원 2억7800만원…천문학적 연봉差
미국 지휘자 대 단원 연봉 8~13.9 : 1
LA필하모닉을 17년간 이끈 두다멜의 연봉은 278만3661달러(약 38억원, 미국 국세청 비영리 공시 자료 IRS Form 990 기준). 반면 이 악단 단원의 초임 기본급은 20만 달러(약 2억7800만원)를 웃돈다. LA필하모닉의 대표인 킴 놀테미의 연봉 역시 100만 달러 선이다. “모든 것이 재정으로 통한다”는 미국 오케스트라에선 예술과 경영의 최정점에 선 리더들에게 천문학적 보상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가혹한 성과 책임 역시 짊어져야 한다.
냉혹한 성과주의의 성패를 가르는 뇌관은 ‘모금 1달러당 지출 비용’이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리카르도 무티 체제 아래 단 6.3센트를 투입해 1달러의 기부금을 유치하는 전미 최고의 모금 생산성을 기록했다. 무티의 연간 보수는 전성기 300만 달러(약 41억600만원) 이상에서 임기 후반 62만 8175달러(약 8억7000만원)로 조정됐고, 제프 알렉산더 CEO는 95만3469달러(약 13억2341만원)의 연봉을 받으며 약 19만 8000달러(약 2억7000만원) 수준인 단원 기본급과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시카고는 도심 전용 홀인 심포니 센터 중심의 압축적 모금 전략을 통해 초우량 ‘재정 건전성’을 다졌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역시 프란츠 벨저-뫼스트 음악감독(연 보수 171만3698달러, 약 23억7861만원)과 앙드레 그레밀레 CEO(116만7666달러, 약 16억2000만원)의 20년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모금 비용을 9.0센트로 방어했다. 단원 초임이 약 15만5000달러(약 2억1500만원) 선인 클리블랜드는 제조업 침체 지역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장기 흑자 기조를 지켜냈다.
반면 모금 비용이 1달러당 20센트 안팎으로 치솟은 악단들은 영락없이 파국을 맞이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는 단원 초임 기본급이 20만5920달러(약 2억8600만원)로 전미 1위에 달하고 매튜 스파이비 CEO가 77만3823달러(약 10억7400만원)의 연봉을 받았으나, 모금 1달러당 20.5센트라는 과도한 비용을 지출하며 공식 회계연도 기준 1250만 달러(약 170억 원) 규모의 누적 운영 적자에 직면했다. 결국 경영진이 에사-페카 살로넨의 혁신 프로젝트 예산을 일방적으로 삭감하자 살로넨은 “비전을 공유할 수 없다”며 사임을 선언, 악단은 내홍에 휩싸였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역시 안드리스 넬손스 감독(약 170만 달러, 약 23억6000만원)과 차드 스미스 CEO(약 150만 달러, 20 8000만원), 단원 기본급 약 20만3000달러(2억8000만원)의 고비용 구조 속에서 모금 1달러당 19.5센트를 지출해 660만 달러(91억6000만원)의 운영 적자를 기록했다.
물론 보스턴 심포니의 모금 비용이 유독 높게 잡히는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약 61만 평에 달하는 탱글우드 페스티벌 부지 관리비와 교육 아카데미 장학금이 모금 지출 항목에 함께 묶여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덩이처럼 불어난 적자는 결국 신임 최고경영자(CEO)가 넬손스 감독과 맺어오던 자동 연장 계약을 끝내는 결정적 도화선이 됐다.
美 새 후계 구도…조련파와 강력한 스타 지휘자
지난 몇 년 사이 미국 톱티어 교향악단들은 후계 구도에서 새로운 전략을 찾아가고 있다. 지금껏 미국의 지휘자는 늘 ‘셀러브리티의 역할’(킴 놀테미 CEO)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셀러브리티 시대’를 유지하되, 악단별 생애주기에 따른 정교한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LA필하모닉은 구스타보 두다멜의 후임으로 영국의 명지휘자 다니엘 하딩을 6년 계약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공식 선임했다. 하딩은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파리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정밀한 오케스트라 빌딩 역량을 입증해 온 정통파다. LA필은 “하딩과 함께 2029년 혹은 2030년 서울을 포함한 대규모 아시아 투어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놀테미 CEO는 귀띔했다.
사실 LA필은 주빈 메타, 에사-페카 살로넨, 구스타보 두다멜 등 지난 50년간 20~30대 젊은 유망주를 발굴해 세계적 거장으로 키워왔다. 하지만 이 같은 전통은 이번 음악감독 인선에서 단원들의 반대로 깨졌다. 단원들이 차기 감독 선발 위원회에서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충분히 유망주를 키워왔다”며 “이제는 또 다른 라이징 스타가 아니라, 이미 입증된 최고의 지휘자를 원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니엘 하딩의 선임 배경엔 지난 17년간 화려한 미디어 노출과 대중적 확장을 일군 뒤 음향적 정밀성을 재건한 ‘오케스트라 빌더’에 대한 현장의 갈망이 있었던 셈이다.
반면 시카고 심포니가 1996년생 신예 클라우스 메켈레를 낙점한 이유는 정반대다. 시카고는 리카르도 무티 체제 아래 13년간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훈련을 거치며 사운드의 기틀을 완벽하게 다졌다. 이미 조련된 사운드 위에서 시카고에 시급했던 과제는 침체한 관객층을 환기하고 글로벌 음반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차세대 슈퍼스타의 티켓 파워와 마케팅 파급력이었다.
결국 “미국에서 지휘하려면 돈을 벌어와야 한다”는 명제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미국에서도 ‘마에스트로의 본령’은 무대 위에서 대체 불가능한 음악적 마법을 빚어내는 장인인 것이다. 미국에서 악단을 경험한 한 음악계 관계자는 “미국이라는 독특한 자본 생태계 속 지휘자는 자기 예술성만 과시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예술적 비전이 냉혹한 비즈니스 메커니즘과 유기적으로 호흡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며 “그러면서 CEO의 모금 생태계를 자신의 예술적 권위와 역량으로 방어해 내는, 현실 감각을 갖춘 최상의 파트너여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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