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자금세탁 속 ‘은행 중개’ 선택한 미국

디지털자산 기존 금융시스템 흡수 정책 판단

한국서 은행은 법에 없는 ‘금가분리’에 발목

디지털자산 중개, 이자수익 탈피 신규 사업

시장 내 법인 참여 유도 ‘규제 샌드박스’ 제언

미 통화감독청(Office of the Comptroller of Currency·OCC) [게티이미지뱅크]
미 통화감독청(Office of the Comptroller of Currency·OCC) [게티이미지뱅크]

[헤럴드경제=경예은 기자] 미국 통화감독청이 은행의 디지털자산 중개를 공식 허용하며 전통 금융권과 디지털자산 시장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반면 한국은 ‘금가분리’ 원칙에 따라 은행의 역할이 제한돼 있어 양국 간 제도적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모습이다.

美 OCC “은행의 디지털자산 중개, 전통적 은행업무 범위”

1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9일(현지시간) 미 통화감독청(OCC)은 미국 내 은행이 ‘무위험 자체매매’(riskless principal) 방식으로 디지털자산 거래를 수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한 고객에게서 자산을 매수하는 동시에 다른 고객에게 즉시 매도하는 구조로 은행이 디지털자산을 재고로 보유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OCC는 이 같은 거래 구조에 대해 “은행이 사실상 브로커 역할을 수행하며 시장 위험을 최소화한다”고 설명했다. 디지털자산 중개가 기존 증권 브로커리지 업무와 성격상 유사하며 은행의 전통적 기능 범위에 포함되는 합법적 은행업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당국은 무위험 자체매매 거래의 핵심 리스크로 ‘결제 오류’를 지목했지만, 이는 기존 증권 중개 과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위험으로 디지털자산만의 특수한 리스크는 아니라는 판단이다. 은행이 이미 디지털자산 수탁(커스터디)이나 네트워크 수수료 처리 등 일부 디지털자산 업무를 수행해 왔고 분산원장(DLT) 기반 결제 역시 기존 결제 시스템과 작동 원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이번 결정은 미국이 은행의 디지털자산을 기존 금융 시스템 안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적 판단이 깔려 있다. 이미 미국 내에서는 자산운용사와 기관투자자를 중심으로 디지털자산 수요가 형성된 상황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최근 고객에게 포트폴리오의 1~4%를 디지털자산에 편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피델리티, 블랙록, 모건스탠리 등도 이미 고객의 제한적 디지털자산 투자를 허용한 바 있어 미 은행권의 디지털자산 수용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미국 핀테크 기업 소파이(SoFi)는 지난달 은행권 가운데 가장 먼저 디지털자산 거래 서비스를 도입해 비트코인·이더리움·솔라나 등 주요 디지털자산을 매매·보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출시했다. 현재는 개인 투자자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향후 기관 투자자로까지 대상을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밝힌 상태다.

디지털사잔을 형상화한 이미지. [로이터]
디지털사잔을 형상화한 이미지. [로이터]

해킹·자금 세탁 우려 큰 디지털자산, 은행이 맡으면 다를까

미국이 디지털자산 유통을 전통 금융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이용자 보호와 시장 관리 측면에서 모두 합리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글로벌 디지털자산 시장은 거래소의 법적 소재지나 자금 흐름이 불투명한 사업자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이날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세계 최대 거래소 바이낸스의 현물 거래량은 최근 24시간 평균 123억달러(18조1700억원)에 달하며, 주간 방문자 수는 1000만명을 웃돈다. 그러나 바이낸스는 아일랜드·프랑스·싱가포르 등지에 거점 사무실을 두고 사업을 전개해 왔을 뿐 글로벌 본사 위치나 단일한 법적 소재지는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해킹과 자금 세탁 논란 역시 디지털자산 수용의 주요 걸림돌로 꼽힌다. 지난 2022년 3월 발생한 로닌(Ronin) 네트워크 해킹 사건에서는 약 6억달러 규모의 디지털자산이 탈취됐다. 당시 미 정부는 사건 배후로 북한 해킹 조직 ‘라자루스’를 지목했다. 같은 해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해킹 자금 세탁에 활용된 토네이도 캐시를 제재 대상에 포함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례는 디지털자산이 불법 자금 조달이나 국가 안보 문제와 직결될 수 있다는 우려를 키웠다.

그럼에도 미국 내 디지털자산 거래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TRM 랩스(TRM Labs)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미국의 디지털자산 거래량은 전년 동기 대비 약 50% 증가해 1조달러를 넘어섰다. 거래량 기준으로 미국이 세계 최대 디지털자산 시장이라는 점이 더욱 공고해진 셈이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해킹과 자금세탁 논란이 반복되며 신뢰가 흔들린 상황에서 은행이 중개 역할을 맡을 경우 이용자들이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거래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 은행의 경우 엄격한 자금세탁방지(AML)·고객확인(KYC) 체계 아래 놓여 있어 해외 거래소를 경유한 불법 자금 유입이나 제재 회피 우려를 상당 부분 차단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국내 4대 금융지주 본사 모습 [각 사 제공]
국내 4대 금융지주 본사 모습 [각 사 제공]

먹거리 부족한 전통금융에 디지털자산 편입은 ‘기회’

은행 수익 구조 측면에서도 디지털자산 중개는 매력적인 카드로 꼽힌다. 은행의 전통적인 수익원인 예대마진은 기준금리와 대출 규제에 민감한 구조로 금리 인하 국면에서는 수익성이 빠르게 위축되는 한계를 안고 있다. 반면 디지털자산 중개는 거래량에 연동된 수수료 기반 사업으로, 금리 환경 변화와 무관하게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사업이 된다.

아울러 은행은 디지털자산 중개를 통해 자금 이탈을 방어하는 동시에 거래 인프라를 제공하는 역할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무위험 자체매매(riskless principal) 구조를 전제로 할 경우 가격 변동에 따른 직접적인 시장 리스크도 제한된다. 은행이 디지털자산을 직접 보유하지 않고 거래를 중개하는 만큼, 수익의 핵심은 가격 방향성이 아니라 거래량과 인프라 운영에 맞춰진다.

국내 은행 역시 핵심 수익원인 이자이익에만 의존하기 어려운 국면이다. 저금리·저성장 환경이 굳어지면서 예대마진 중심의 사업 구조는 그 자체로 성장성이 제한되는 데다, 금융당국의 ‘이자장사’ 비판과 가계대출 규제까지 겹치며 여신 사업 확대에도 제약이 커지고 있다.

실제 순이자마진(NIM)은 하락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은행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기준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의 평균 NIM은 1.57%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0.05%포인트 개선됐으나 2023년 3분기보다는 0.08%포인트 낮은 수치다. 2022년 같은 시기와 비교해도 하락한 수준이다. 은행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수익성 자체는 점차 둔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로 인해 은행들은 이자이익을 보완할 수 있는 비이자수익 확대에 힘을 싣고 있다. 증권·펀드·신탁 중개, 방카슈랑스(은행연계보험) 판매 등 수수료 기반 사업이 대표적이다. 실제 4대 은행의 올해 3분기 누적 수수료이익은 3조3241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2% 증가하며 비이자이익 성장을 견인했다. 같은 기간 전체 은행권의 이자이익 증가율이 1% 미만에 그친 것과 대비된다.

[금융위원회 제공]
[금융위원회 제공]

‘금가분리’ 벽에 막힌 국내 은행…“개인 중심 디지털자산 구조부터 바꿔야”

다만 시장 전문가들은 국내 ‘금가분리’(금융과 가상자산의 분리) 기조가 오랫동안 유지돼 온 데다, 디지털자산 시장 성숙도와 참여 구조의 차이로 인해 한국에도 동일한 접근법을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디지털자산을 둘러싼 사건·사고가 반복되며 ‘투자자 보호’가 규제의 최우선 기준으로 작동해 왔다. 기술과 시장 구조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이 급격히 팽창했고, 테라·루나 사태와 FTX 파산 등 대규모 투자자 피해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규제의 무게중심도 자연스럽게 ‘시장 활성화’보다는 ‘리스크 차단’에 놓였다는 분석이다.

현재 디지털자산 시장을 규율하는 법 체계는 특금법(특별금융정보법)과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두 가지다. 다만 금가분리는 법률에 명시된 금지 규정보다는 금융당국의 해석과 감독 관행이 누적되며 형성된 정책 기조에 가깝다. 디지털자산을 금융상품으로 볼지, 고위험 투자 대상으로 분류할지를 둘러싼 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가운데 은행 등 전통 금융기관의 직접적인 거래 관여는 제도적으로 제한돼 왔다.

한서희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글로벌 금융강국 도약을 위한 디지털자산 정책 대전환’ 세미나에서 “지난 2017년 디지털자산 가격 급등과 함께 다단계 사기 등 각종 사건이 이어지며 당국의 우려가 본격화됐고 이 과정에서 ICO(Initial Coin Offering, 가상자산 공개)와 파생상품 거래 금지·금융기관 투자 제한이 도입됐다”며 “당시 형성된 인식이 지금도 유효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시장 성숙도와 디지털자산 시장 구조 역시 핵심적인 제약 요인으로 꼽힌다. 이종섭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은 시장의 자정 능력이 발달한 반면 한국은 시장 경험과 유동성의 깊이가 충분하지 않다”며 “특히 국내 디지털자산 시장은 개인 투자자 중심 구조로, 거래량에 비해 유동성의 질이 떨어져 ‘펌프 앤 덤프’에 취약하다”고 말했다. 펌프 앤 덤프(pump and dump)는 가격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뒤 고점에서 대량 매도하는 시세 조작 수법을 의미한다.

실제 트래픽·거래량·보고 신뢰도 등을 종합 평가하는 코인마켓캡 글로벌 거래소 순위에서 업비트와 빗썸은 각각 3위와 19위에 올라 있다. 다만 외형적 지표와 달리 시장 안정성 측면에서는 여전히 구조적 한계가 남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태경 보험연수원장도 최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크립토 시장의 문제로 기업 간(B2B) 거래 부재를 지목했다. 하 원장은 “B2B 크립토 비즈니스를 전부 막아놓고 개인 거래만 열어놓은 것이 한국 크립토 시장”이라며 “가장 리스크가 큰 영역에만 국민을 노출시켜 놓은 셈”이라고 비판했다. 변동성이 큰 디지털자산은 법인과 기관이 먼저 참여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개인 투자자는 크립토 펀드 등 간접투자를 통해 위험을 분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글로벌 금융강국 도약을 위한 디지털자산 정책 대전환’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경예은 기자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글로벌 금융강국 도약을 위한 디지털자산 정책 대전환’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경예은 기자

디지털자산기본법 추진하는 與…은행 역할은 ‘발행’에 머물러

현재 정치권은 디지털자산의 제도권 편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자산 태스크포스(TF)는 지난 11일 금융위원회와 비공개 회의를 열고 당 차원에서 디지털자산기본법(2단계 법안)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다만 논의의 초점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와 정책협의체 구성 등에 맞춰져 있다. 올해 국회에 발의된 8건의 디지털자산 관련 법안에서도 은행은 주로 ‘발행기관’으로만 언급될 뿐 디지털자산 거래·중개와 관련한 역할은 아직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은 디지털자산 생태계 전반을 함께 고민해야 할 단계”라며 “제도적으로 거래 단계에서부터 은행의 역할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누가, 어떤 형태로 거래에 참여할 것인지부터 규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은행의 역할 확대가 시장 구조를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황석진 교수는 “은행이 디지털자산 유통에 참여하면 상장지수펀드(ETF) 등 다양한 금융상품으로 확장될 수 있고, 보안과 신뢰 측면에서도 시장이 한층 견고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국내 가상자산사업자가 약 27곳에 불과한 상황에서 은행을 열어주는 것은 시장의 질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규제 샌드박스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이종섭 교수는 “법인 계좌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며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법인 플레이어의 시장 참여를 허용하면 시장 내 가격 발견 기능이 개선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인 참여가 확대될수록 정보 비대칭성이 완화돼 정보력이 부족한 투자자가 구조적으로 불리해질 가능성도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거래소들도 법인 수요 확대를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있다. 업비트·빗썸·코인원은 최근 ‘비즈(Biz)’ 형태의 법인 대상 서비스를 개시했다. 이 가운데 빗썸은 12월 기준 약 100여개 법인이 가입을 마쳤다. 업비트 역시 11월 기준 160개 넘는 법인이 회원 등록을 했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비영리법인이나 공공기관에 머물러 있다. 업계에서는 디지털자산기본법과 후속 가이드라인을 통해 법인 거래가 본격 허용돼야 시장 구조 전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