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회사채 쏟아지는데 자금 수요 한정
결국 ‘할인표’는 금리…팔려면 이자 더 줘야
日 금리 상승에 미 국채 수요 약화 우려
빚으로 짓는 AI, 그 빚이 AI 짓누르는 역설
인플레이션까지 겹치면 금리 조절 불가능
[헤럴드경제=홍태화 기자] 같은 물건이라도 파는 사람이 갑자기 늘면 값을 깎아줘야 팔린다. 요즘 채권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딱 이 모양이다.
미국 정부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쏟아내고, 빅테크 기업들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을 짓기 위해 회사채를 찍어낸다. 한쪽은 나라 살림을 이어가기 위해, 다른 한쪽은 AI 패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동시에 거액의 돈을 빌리고 있다. 미국 정부와 현금 부자인 빅테크가 같은 채권시장에서 투자자의 돈을 놓고 경쟁하는 보기 드문 장면이다.
그런데 판매대는 많아졌지만 사줄 사람은 늘지 않았다. 과거 미 국채의 든든한 큰손이었던 해외 중앙은행의 존재감은 약해졌고, 미 연방준비제도(Fed)도 역시 장기 국채의 대규모 매수자로 나서고 있지 않다. 한정된 장기자금을 놓고 국채와 회사채가 서로 투자자를 빼앗는 구조인 셈이다.
결국 팔려면 값을 내려야 한다. 채권시장에서 그 ‘할인표’가 바로 금리다. 채권 가격이 떨어질수록 금리는 오른다.
공급 과잉이 실제 금리를 밀어올리고 있다는 단서는 장기금리가 왜 올랐는지를 뜯어보면 더 선명해진다. 장기금리는 물가와 연준의 정책금리 전망이 달라질 때도 오르지만, 투자자가 장기채를 오래 들고 있는 대가로 더 높은 보상을 요구할 때도 상승한다. 이 추가 보상이 ‘기간 프리미엄(term premium)’이다.
최근에는 후자의 힘이 훨씬 컸다. 미래에셋증권의 미국 10년물 금리 상승 요인 분석을 보면 7월 이후 최근까지 금리가 15.9bp(1bp=0.01%포인트) 오른 가운데 기간 프리미엄 상승이 13.0bp, 기대인플레이션 상승이 2.9bp를 차지했다. 시장이 “이렇게 많이 발행될 채권을 수십 년씩 들고 있어도 괜찮은가”라고 묻고 있는 셈이다.
정부도 기업도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
걱정의 첫 번째 진원지는 미국 정부다. 미국의 총 국가부채는 사상 처음 40조달러를 넘어섰다. 미 재무부가 집계한 지난 18일 기준 총부채는 40조470억달러다. 이 가운데 시장과 민간 등이 보유한 부채가 32조2660억달러, 정부기관 간 부채가 7조7820억달러다. 2017년 초 19조9500억달러였던 부채가 10년도 되지 않아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더 무서운 것은 금리와 부채가 서로를 밀어올리는 구조다. 부채가 많아질수록 정부가 지급해야 할 이자가 늘어난다. 금리가 올라 기존 국채가 더 높은 금리의 새 국채로 차환되면 이자비용은 더 커진다. 늘어난 이자비용은 다시 재정적자를 확대하고, 그 적자를 메우려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실제로 미 재무부에 따르면, 2026회계연도 들어 7월 말까지 정부가 부담한 이자비용은 1조1700억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5% 늘었다. ‘부채 증가→금리 상승→이자비용 증가→적자 확대→추가 발행’이라는 악순환이 더 이상 장기 전망만의 얘기가 아닌 셈이다.
두 번째 진원지는 민간, 그중에서도 AI다. 지난 몇 년간 빅테크 기업은 막대한 현금흐름을 바탕으로 AI 투자의 상당 부분을 자기자본으로 감당했다. 하지만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전력설비 투자의 규모가 한 단계 더 커지면서 이제 차입이 적극적으로 동원되고 있다. AI 설비와 소프트웨어 투자가 성장을 이끄는 가운데 자금조달 방식이 자기자본에서 차입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NH투자증권 집계를 보면 초대형 클라우드 사업자(하이퍼스케일러)의 회사채 발행액은 2020~2024년 연평균 280억달러에서 2025년 1210억달러로 뛰었다. 2026년에는 8월까지 이미 1650억달러가 발행됐고 연간으로는 4000억달러가 예상된다.
범위를 더 넓게 잡은 미래에셋증권의 AI 관련 채권 집계에서도 올해 발행액은 4890억달러로 지난해 연간 3220억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집계 대상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AI 투자의 자금조달 방식이 ‘현금으로 짓는 데이터센터’에서 ‘빚으로 짓는 데이터센터’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투자는 금리가 조금 오른다고 쉽게 멈추기 어렵다. AI 산업 자체가 승자독식 경쟁에 가깝기 때문이다. 투자를 늦췄다가 경쟁에서 밀리는 비용이 차입 비용보다 더 클 수 있다고 판단하면 기업들은 높은 금리를 감수하고서라도 투자를 지속한다.
여기서 AI 붐의 역설이 시작된다. 기업이 AI 설비투자를 늘릴수록 회사채 공급은 증가한다. 미 국채와 빅테크 우량 회사채가 똑같은 상품은 아니지만 결국 투자자의 장기자금을 놓고 경쟁한다. 회사채가 더 높은 수익률을 제시하면 국채도 투자자를 끌어오기 위해 더 높은 금리를 지급해야 한다.
그렇게 높아진 금리는 다시 AI 기업을 공격한다. 주식의 가치는 미래에 벌어들일 현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한 값이다. 금리가 오르면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할인율이 높아진다. 지금 당장 현금을 버는 기업보다 몇 년 뒤 거대한 이익을 낼 것으로 평가받는 기업일수록 충격이 크다. AI·반도체·소프트웨어·플랫폼 같은 성장주의 주가가 장기금리에 특히 민감한 이유다. AI가 성장을 위해 조달한 돈의 가격이 다시 AI 기업의 몸값을 낮추는 자기잠식적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코스피 뚝뚝 떨어지는 게 국채 금리 탓?…다 이유가 있다 [세모금] 참고
겉으로 드러난 회사채가 전부도 아니다. 키움증권 월간 자산배분 보고서에 따르면 알파벳·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4개사가 계약했지만 아직 개시되지 않은 리스 규모는 9040억달러, 구매약정은 1조5200억달러에 달했다.
데이터센터 임차는 실제 임대가 개시되기 전까지, 칩과 전력 등과 관련한 계약도 제품·서비스가 인도되기 전까지 대차대조표상 부채로 잡히지 않고 주석에만 기재될 수 있다. 드러나지 않은 숨은 빚이다.
이를 당장 갚아야 할 금융부채와 똑같이 볼 수는 없다. 하지만 AI 수요와 수익화가 기대에 못 미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래의 매출은 늦어지는 반면 이미 약속한 데이터센터와 칩, 전력 비용은 현실화한다. AI 관련 기업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채권시장이 이런 위험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공급이 이렇게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누가 그 채권을 받아줄지도 중요하다. 여기서 일본이 등장한다.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는 최근 2.93%까지 올라 1996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엔화 약세와 유가 상승까지 겹치면서 일본의 물가와 금리 부담도 커졌다.
일본 국채 수익률이 높아질수록 일본 투자자는 굳이 환위험을 감수하면서 미국 장기채를 살 유인이 줄어든다. 전통적으로 미 국채의 최대 수요자 중 하나인 일본이 이제는 예전만큼 적극적으로 미국 국채를 받아주기 어려운 환경으로 가고 있는 셈이다. 엔화 방어를 위해 보유 미 국채를 직접 매각할 가능성까지 커지면 미국 장기채 수급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
최근 미·일 당국이 일본의 미 국채 직접 매각 충격을 줄이기 위해 미 국채를 시장에 팔지 않고 담보로 달러를 빌릴 수 있는 ‘외국·국제통화당국 환매조건부거래 제도(FIMA Repo)’ 같은 장치를 활용한 것도 이런 부담을 의식한 대응이다.
결국 문제는 공급은 늘고 있는데 이를 받아줄 수요의 힘은 약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 정부와 AI 기업은 채권 발행을 늘리고 있지만, 일본을 비롯한 전통적인 큰손 매수자는 예전만 못하다. 장기채를 받아줄 투자자 입장에서는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할 이유가 충분한 셈이다.
발작 막으려는 정부…드러나는 초조함
그렇다면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미 재무부가 내놓은 답 가운데 하나가 ‘바이백’이다. 이미 발행해 시중에 풀어놓은 국채를 정부가 직접 사들이는 조치로, 사줄 손이 마땅찮은 시장에 재무부가 스스로 매수자로 나서는 셈이다.
재무부는 최근 잔존만기 10~20년과 20~30년 국채의 바이백 한도를 회당 20억달러에서 최소 40억달러로 확대했다. 남은 일정을 감안하면 추가 확대분은 최소 140억달러이고, 장기물 바이백 한도는 기존 160억달러에서 최소 300억달러로 늘어난다.
분기별 국채발행계획(QRA)을 내놓은 지 불과 2주 만에 바이백 계획을 바꾼 것은 이례적이다. 시장에서는 장기금리가 계속 오르자 30년물 국채 매도 포지션을 쌓은 투자자들에게 “재무부가 필요하면 들어올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 금리 상승 베팅을 위축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발표 직후 장기 국채금리는 하락했다. 재무부가 장기물 바이백을 최소 두 배로 늘린다는 발표는 장기채 시장을 안정시키려는 강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시장의 방향을 완전히 돌리기에는 총알이 작다. 2011~2012년 연준이 실시한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는 15개월 동안 총 6670억달러, 월평균 약 440억달러 규모로 장기 국채를 사고 단기 국채를 팔았다. 민간이 보유하는 국채의 듀레이션을 대규모로 낮추려는 정책이었다.
이번 재무부 바이백은 절대 규모부터 훨씬 작고 현재 미국 국채시장도 당시보다 3배 이상 커졌다. KB증권은 글로벌 인사이트 보고서에서 이번 확대분의 기간프리미엄 인하 효과가 1~2bp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추산했다.
게다가 지금은 당시보다 까다로운 문제가 하나 더 있다. 40조달러의 부채 그 자체다. 장기채를 줄이는 대신 단기채(T-bill) 발행을 늘리면 당장은 장기채 수급이 편해진다. 대신 정부부채의 평균 만기가 짧아져 이자비용이 연준 기준금리에 더 빨리 반응한다. 이미 올해 들어 7월까지 이자비용만 1조1700억달러에 이르는 상황에서 높은 기준금리가 오래 지속될수록 재정 부담도 빠르게 커진다.
연준이 정부의 이자 부담만 보고 금리를 정할 수도 없다. 시장이 “40조달러의 부채 때문에 중앙은행이 물가가 올라가도 충분히 긴축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장기채 투자자는 미래 인플레이션과 통화정책의 신뢰에 더 높은 보험료를 요구하게 되고, 기대인플레이션이나 기간프리미엄이 올라 장기금리를 다시 밀어올리게 된다.
‘물가’ 마저 올라온다면…
마지막 갈림길은 ‘수급의 문제’에 ‘물가의 문제’까지 겹치느냐다. 지금까지의 장기금리 상승은 상당 부분 국채와 회사채 공급 증가, 그리고 이에 따른 기간프리미엄 상승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물가 쪽 문제는 아직 우려할 정도로 올라오지 않았다. 7월 미국 근원 소비자물가는 전월 대비 0.2% 상승에 그쳤고 생산자물가는 전월 대비 보합이었다. 장기 기대인플레이션도 7월 이후 2.2% 부근에서 안정적이다.
그럼에도 금리가 19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이 상황에서 중동 긴장이 장기화되고 유가 상승이 기대인플레이션까지 밀어올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연준은 딜레마에 빠진다. 정부는 40조달러의 부채와 천문학적인 이자비용 때문에 낮은 금리를 원하고, 기업 역시 막대한 AI 투자를 감당하려면 자금조달 비용이 낮아져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공개적으로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물가가 다시 뛰면 연준은 금리를 낮추기는커녕 높은 수준을 유지하거나 다시 올려야 한다.
그 순간 바이백 같은 수급 조절책은 힘을 잃는다. 애초에 바이백이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바이백은 시중의 장기채 물량을 줄여 기간프리미엄을 누르는 조치다. 물가가 뛰어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장기금리의 나머지 절반인 ‘미래 단기금리 기대’가 통째로 올라간다. 재무부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이다.
더구나 재무부에는 연준처럼 돈을 찍을 권한이 없다. 국채를 되사려면 그 대금을 다시 국채를 팔아 마련해야 한다. 시장이 떠안는 부채는 줄지 않고 만기만 짧아진다.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이 만기 단축은 오히려 독이 된다.
결국 정책금리와 기간프리미엄이 함께 오르는 국면이 열릴 수 있다. 여기에 국채와 회사채 공급은 그대로다. 미 정부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빅테크는 AI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발행을 멈출 수 없다. 금리를 밀어올리는 힘은 둘로 늘어나는데 누를 수단은 오히려 무뎌지는, 시장이 가장 경계하는 조합이다.
이은택 KB증권 이사는 “빅테크는 AI 투자를 멈추지 못해도, 자본 공급자는 그럴 수 있다”며 “(10년물 미국 국채) 금리가 5%를 넘으면 자본공급자가 안전한 수익 확보로 돌아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1930년대 대공황,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경기침체), 2000년대 (닷컴)버블 붕괴 세 사례의 공통점은 금리의 추세적 상승이었다”이라며 “금리가 올라가면 거대한 자금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