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 악기거리서, 악기 공방 운영 김민성씨

악기연주 못하고, 음감 좋지 않아 ‘튜너’ 필요

1년에 6개 정도 악기만 만들어

폴란드 포츠난 비니야프스키 콩쿨 등 4대 콩쿨 입상

김민성 씨가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들고 있다. 박병국 기자.
김민성 씨가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들고 있다. 박병국 기자.

[헤럴드경제=박병국 기자]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없다. 그 흔한 절대음감도 아니다. 음정을 맞추려면 튜너가 필수다. 전공도 악기와는 관계가 없다. 쏟아붇는 정성이 전부지만, 우리나라에서 현악기를 제일 잘 만든다고 자부한다. 세계 4대 악기제작 콩쿨에서 줄줄이 입상한 실력자다. 그가 제작하는 바이올린 한대의 가격은 3700만원이 넘어간다.

현악기 제작자 김민성(55) 씨 이야기다.

서울 서초구 악기거리 한귀퉁이 조그만 건물 2층이 그의 일터다. 재료실과 작업실, 응접실로 구성된 30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다. 최근 공방을 찾아 김 씨를 만났다.

재료실로 기자를 안내한다. 오래된 나무냄새가 가득하다. 한쪽 벽면에 숫자가 써 있는 나무판이 빼곡하다. 1955, 2005, 2009…. 숫자는 나무판이 만들어진 연도다. 오래될수록 소리는 깊어진다. 악기 앞판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온 전나무를 쓴다. 뒷판과 나머지 부품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 온 단풍나무로 만든다. 국내산 나무는 현악기 제작에 부적합하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직원도 문하생도 없어, 어두운 공간에서 홀로 작업 “내이름 새겨지는 악기인데”

“나무를 고르는 일이 제일 힘든 일입니다. 오래된 나무가 소리가 좋은데, 찾기가 쉽지 않아요. 나무를 찾다보면 옹이가 있을 수도 있고, 결이 잘못됐을 수 있어요. 좋지 않은 나무를 고르면 소리가 달라져요. 기후가 적합해야 합니다. 너무 따뜻하면 나무가 물러져요. 너무 추우면 악기를 만들었을 때 진동이 없을 수 있어요.”

각 국에서 수입해온 나무판들은 김씨의 손길을 거쳐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가 된다. 바이올린의 경우 뒷판과 앞판, 지판(손으로 짚는 부분) 등 총 18개 조각이 한 세트다. 대패로 문지르고, 끌로 다듬고, 아교로 붙이며 완성해 나간다. 모든 것이 수작업이다. 금속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김 씨의 악기는 ‘부드러움’이 특징이다.

재료실의 나무판들. 박병국 기자
재료실의 나무판들. 박병국 기자

직원도 없고 문하생도 없다. 오직 김 씨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한다. 스탠드 하나만 밝혀진 어두운 작업실에서, 홀로 일한다. 적게는 하루에 6시간, 많게는 13시간을 나무에 쏟는다. 혼자 일하는 이유는 하나다. “내 이름이 새겨지는 악기에 남의 손 타는 게 싫었어요.” 김씨의 말이다.

이런 이유로 1년에 6개 정도의 악기 만이 만들어진다. 그가 25년동안 만든 악기는 150여개에 정도에 불과하다. 직원들을 두며 1년에 수십개씩 만드는 사실상 ‘공장’ 형태의 악기공방도 있다.

하나의 악기를 만드는데는 2~3년이 걸린다. 제대도 된 낸 소리가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칠을 하는데 두달, 말리는데 최소 1년이 걸린다. 칠이 마르면 전공생들을 불러 연주를 시키기도 한다. 소리를 틔우기 위해서다. 재료, 칠, 모든 작업이 조화를 이뤄야 최고의 악기가 된다.

실력은 인정 받았다. 이탈리아 크레모나, 미국 바이올린 협회(VSA) 주최 제작대회, 독일 미트테발드, 폴란드 포츠난 비니야프스키 콩쿨 등 세계4대 현악기 제작 콩쿨에서 모두 입상했다. 특히 2011년 비니야프스키 콩쿨에서는 한국인 최초 우승(금메달)을 수상했다.

“만든 악기를 연주도 하시고 그러시나요?” 기자가 물었다. 당황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저는 현악기 연주를 못합니다. 음감도 없어서, 튜너를 써요. 저는 튜너가 없으면 악기를 만들지 못해요. ”

사실 그는 악기는 커녕 음악과도 관련 없는 삶을 살았다. 악기제작을 시작한 것은 단순히 ‘취업’ 걱정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뒤,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지방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습니다. 취업고민을 많이 할 때였어요. 항공 대학과 악기 제작 학교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서초동에서 악기점을 운영하던 형의 영향이 컸어요. 내성적인 성격에 맞기도 했구요. ”

김 씨는 그렇게 1995년 미국 유타주의 ‘The Violin Making School of America’에 입학하게 된다. 악기상을 운영한 형의 지원이 있었다.

악기는 접할수록 매료됐다. 형태가 완성돼 가는 바이올린은 그에게는 작품이었다. 동이 트는 줄 모르고 악기를 만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1학년 때였어요. 수업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려요. 교장선생님이 졸업작품을 낸 4학년들에게 킴(KIM)의 바이올린을 보라고 했다는 겁니다. 화이트악기라고 아직 칠을 하지 않은 악기였어요. 그 말을 전한 담임 선생님이 제 손을 잡고 ’골든 핸즈‘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근성같은게 있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전자기기 분해하고 조립하는걸 좋아했던거 보면 손재주도 있었던것 같고…”

김민성 씨가 비올라 스크롤을 깎꼬 있다. 박병국 기자
김민성 씨가 비올라 스크롤을 깎꼬 있다. 박병국 기자

2010 중국 베이징 국제 악기 제작 콩쿨을 준비할 때다. 끌질을 하다 왼손 엄지손가락을 찔러 버린 것이다. 인대가 끊어져 봉합수술을 받았다. 콩쿨을 준비하던 때였다. 나무를 단단히 붙잡고 작업을 해야 되는데 잡을 손이 없었다. 몸으로 누르고 팔꿈치로 지탱해 가며 악기를 만들었다. 결국 그 악기로 콩쿨에서 우승했다. 붕대를 감고 만든 그 악기는 현재 베이징 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저는 악기 활도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악기만 제작을 해요. 연주를 못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악기 제작에도 시간이 부족하니깐요. 제가 연애를 오래 못했던 이유도 콩쿨 준비 시간이 없어서였어요. ” 그는 아직 미혼이다.

처음 완성한 악기, 하늘나라로 간 동생과 함께 묻어…불행 겹쳐오며 방황

1997년에 만든 악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미국 바이올린 제작 학교 3학년 때였다. 칠과 말리기까지 모든 과정을 마무리한, 그가 처음으로 완성한 악기였다.

그는 이 악기를 동생에게 바쳤다.

“미국에 와 있던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졸음 운전이었습니다. 동생과 함게, 바이올린을 함께 묻었어요. 동생에게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형만 의지했던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괴롭혔다. 악기 제작에 집중할 수 없는 날들이 많아졌다.

불행은 겹쳐서 왔다. 며칠 뒤 IMF 구제금융 발표가 있었던 것이다. IMF가 터지면서 김 씨를 지원해주던 형도 어려워졌다.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학교도 중도에 포기했다. 그리고, 그는 매형이 운영하던 수산물유통업체에 취업했다.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도, 악기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500만원만 들고 이탈리아로 다시 향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의 악기 인생은, 2000년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다시 시작됐다. 크레모나 국제 바이올린 제작학교에 입학했다. 악기를 다시 할 수 있어 기뻤지만, 몸은 미국이나 한국에서보다 더 힘들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형의 지원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미국에서 배운 기술로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렇게 3년을 버텨냈다.

“이탈리아는 클래식 악기의 본고장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동양인들이 악기로 이름을 날리기에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도전한 것이 콩쿨입니다. ” 그는 앞서 언급한 세계 4대 콩쿨을 포함해 총 12개 국제 콩쿨에서 입상했다.

실력이 입증되자 본고장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2003년 학교를 졸업한 뒤, 2010년 부터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자신만의 공방을 운영했다. “킴의 악기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수준은 됐던 것 같습니다. ”

이탈리아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201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로움이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1990년부터 악기점을 해온 그의 형에 이어, 김 씨도 2018년 서초동 악기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악기는 제 분신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의 전부를 다 쏟아냈어요. 가격이 얼마인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제 영혼까지 쏟아넣은, 제2의 김민성이 저의 악기입니다. 그 김민성들이 전세계에 나가 있습니다. 그들이 더 많은 활동을 하길 바랄 뿐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