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 연광철의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다음 달 4일 마포아트센터 연가곡 시리즈

30대엔 두려움, 50대엔 “제3자의 마음”

베이스 연광철
베이스 연광철 [마포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전설의 시작’은 30년 전이었다. 무명의 한국인 성악가 연광철(59)은 1993년 세계적인 성악 경연인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이듬해부터 ‘오페라 본토’인 독일, 그것도 주요 극장인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 오페라 극장 등에서 솔리스트로 서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 ‘작은 키’의 동양인은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수한 세월 동안 자신을 채찍질했다.

“1991년부터 독일에 있었어요. 그들의 문화에 완전히 빠져들어 살려고 노력했지만 어려운 점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인터넷도 전화도 TV도 없이 지내던 때라 그들 문화와 역사 속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젊은이들은 어떻게 직업을 찾고 어떻게 새로운 환경을 찾아가는지 상상해보기가 어렵더라고요.”

오랜 시간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방인으로 살면서 온전히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체화해야 하는 직업 때문에 찾아온 의문인 탓이리라. 그는 “독일어를 한다고 하지만, 한국 사람으로 독일 오페라 무대에 서서 독일 전통이 깊이 스민 작품을 그 나라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고 했다.

의문 속에서도 연광철은 유럽 무대의 최정상에 올랐다. 까다로운 독일 거장 지휘자들의 선택도 두루 받았다. 1990년대 인연을 맺은 다니엘 바엔보임을 시작으로, 크리스티안 틸레안 베를린 슈타프카펠레 상임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 베를린필 상임 지휘자 등은 늘 연광철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다시금 꼬리표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할 줄 아는 게 성악 밖에 없어 지금껏 이 길을 걸었어요. 제 선택에 후회하진 않지만, 의문은 들어요. 나는 왜 한국사람으로서 국악 교육을 더 많이 받지 않았을까, 판소리나 가곡, 우리 음악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하지 못하고 서양 음악을 하게 됐을까. ‘왜 슈베르트, 슈만, 바그너를 부르며 서양에서 살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긴 해요. 만약 한국에서 살았다면 부담은 훨씬 적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고요.”

세계적인 베이스 연광철이 50대의 끝자락에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다시 만나며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최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30대였던 2001년 독일 베를린에서 ‘겨울나그네’를 처음 불렀다”고 돌아봤다. 그는 다음 달 4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이 곡을 다시 부른다. 마포문화재단의 기획 공연 ‘M 연가곡 시리즈’의 일환으로 열리는 무대다.

베이스 연광철
베이스 연광철 [마포문화재단 제공]

그는 “50대가 된 지금은 ‘겨울 나그네’에 나오는 한 젊은이를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슈베르트가 빌헬름 뮐러의 시에 선율을 붙인 ‘겨울 나그네’는 사랑에 실패한 한 젊은이의 지독한 사랑앓이를 노래한다.

30대에 처음 만났던 ‘겨울 나그네’에 대해 연광철은 “자신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타지에서 오페라 가수로의 꿈을 찾아가고 음악을 향한 사랑을 갈구하는 나와 닮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한 줄 한 줄 적힌 심상을 담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정서적 공감과는 무관하게 ‘겨울 나그네’는 그에게 두려운 도전이었다. 그는 “24곡을 다 외워서 독일인 관객 앞에서 부른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고, 음악적 뉘앙스를 살리거나 시적인 요소를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돌아봤다. 시간이 훌쩍 흘러 40대엔 ‘표현의 폭’이 넓어지며, 인물 안으로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24곡 중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21번째 곡인 ‘여인숙(Das Wirtshaus)’이다. “내가 택한 길은 나를 무덤으로 인도했네, 나는 생각했지, 이곳의 투숙객이 되려고”라는 시로 시작한다. 연광철은 “이 곡이 ‘겨울 나그네’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안식을 찾아갔으나 안식을 얻을 수 없고, 자기를 위한 공간이 없어 다시 떠나야 하는 이야기가 이 곡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했다. ‘여인숙’을 지나 마침내 24번째 곡에 당도하면, 젊은이는 ‘거리의 악사’를 만나 다시 음악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겨울 나그네’의 삶이 노자의 사상에 닿아있다고 말한다.

“희망은 결국 자신을 비웠을 때 만나게 되더라고요. 젊은이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으면 원대한 꿈을 향해 달려갈 때 중간에 가로막혀 절망하다 포기하지 말고, 작은 희망들을 하나씩 이뤄나가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러다 보면 큰 희망이 될 수 있으니까요. 물이 흘러 바다로 향해가다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돼 비로 내려 순환을 하듯, 우리의 방랑도 그런 순환이지 않을까 싶어요.”

데뷔 31주년에도 연광철의 음악 여정은 빼곡하다. 그는 당장 내년 1월 프랑스 파리로 출국해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서 ‘라인의 황금’을, 4월엔 독일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하우스에서 ‘파르지팔’을, 5~6월엔 비엔나 국립 오페라하우스에서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를 공연한다. 10~11월엔 김은선이 지휘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파르지팔’ 무대에 선다.

그는 “올해로 독일 데뷔 30주년이 됐지만, 기념비가 될 만한 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키 작은 동양인, 이방인으로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