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26일 국립중앙박물관 상형청자만 첫 전시
실용성·심미성 모두 겸비…총 274건 출품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전시장에 들어서자 물고기 몸을 가진 상서로운 용이 고요히 관람객을 맞는다. 차분하지만 생기를 머금은 은은한 비색은 마치 새벽이슬에 젖은 연잎의 맑은 은빛을 닮았다. 세밀한 음각이 돋보이는 둥그런 몸체는 마치 용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이 깃든 조각 작품 같은 이 어룡, 사실 이것은 고려시대 때 일상에서 쓰던 주전자다. 소주잔 16잔(약 0.8ℓ)이 담기는 국보 ‘청자 어룡 모양 주자’. 단순한 생활공예품을 넘어선 상형청자(象形靑磁)의 독자적 미감을 오롯이 드러내는 고려인의 자부심이다.
정교함의 극치에 다다른 도자공예에 대한 고려인의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개막한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6일부터 진행되는 특별전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다. 고려청자 중에서도 그간 자료가 부족해 학술연구가 미비했던 상형청자만을 주목해 다루는 첫 전시다.
전시는 지난 2022년 새로 단장한 상설전시관 청자관 내 하이라이트 공간인 ‘고려비색’이 확장된 형태인 컴퓨터 단층촬영(CT)과 3차원 형상 데이터 분석이 더해졌고, 최근 새로 밝혀진 내부 구조와 제작 기법 등의 연구 결과도 공개됐다. 국보 11건, 보물 9건 등을 포함해 국내 25개 기관과 개인 소장자, 중국·미국·일본 3개국 4개 기관의 소장품 등 총 274건이 출품됐다.
상형청자는 인물·동물·식물 등 형상을 본떠 만든 청자를 의미한다. 청자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빼어난 조형성과 고려 특유의 맑고 푸른 유약이 더해져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실용성과 심미성을 모두 겸비한 보기 드문 도자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향, 차, 술을 음미하던 문화, 문인들의 섬세한 취향 등이 어우러지며 상형청자도 발달을 거듭했다. 상형청자가 곧 소유자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기물로서 작용해서다. 이애령 학예연구실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과학적 조사로 밝혀낸 고려 상형청자의 제작 기법은 오늘날에도 범접하기 어려운 세계 최고 수준이며 게다가 창의적”이라고 말했다.
이런 면면은 전시장에 모인 상형청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에 제작된 화려한 국보 ‘청자 투각 칠보 무늬 향로’가 대표적이다. 앙증맞은 세 마리 토끼가 떠받치는 향로는 바탕흙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은은한 회청색이다. 북송 황실용 도자기인 여요 자기가 천청색 색깔을 띠고 유면에 균열과 빙렬이 있는 반투명인 것과 대비된다. 토끼 눈에 찍힌 검은 철화 점이 금방이라도 눈알을 굴리듯 움직일 것만 같고, 가장자리까지 자연스럽게 살려낸 연꽃잎마다 잎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음각, 양각, 투각, 퇴화, 상감, 첩화, 상형 등 모든 장식 기법이 동원돼 그야말로 고려청자 정수를 뿜어낸다.
실제로 1123년 국신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파견된 서긍은 이듬해 조정에 제출한 ‘고려도경’에서 상형청자의 위상을 당시 북송 여요 자기에 견줬다. 국보 ‘청자 사자모양 향로’에 대해 “여러 그릇 가운데 오직 이 물건만이 가장 정교하고 뛰어나다”는 것. 이애령 실장은 “고려청자의 비색은 11세기 후반부터 완성도가 높아져 12세기에 가장 세련된 색을 띠었다”며 “특히 투명도가 높은 고려의 비색 유약은 상형 기물의 입체감과 정교한 세부 묘사를 살리는데 필수 요소였다”고 설명했다. 이를 방증하듯 고려인들은 중국 청자의 비색(秘色)과 글자 표기를 달리해 비색(翡色)이라고 표현했다.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 가마터 발굴품부터 태안 대섬, 마도 1호선, 보령 원산도, 진도 명량해협 출수품 등 보기 드문 문화유산도 한자리에 모였다. 상형청자가 보여주는 고려만의 독창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시기 북송대 중국 자기들을 함께 비교 전시한 점도 눈에 띈다. 서유리 학예연구사는 “고려 상형청자는 중국 도자의 영향을 취사선택하고 그걸 넘어서서 창의적으로 변용해 고려적인 미감으로 완성한 결정체”라며 “이는 새로운 것을 수용해서 뛰어난 결과를 만드는 지금의 K-컬처와도 맞닿아 있다”고 전했다.
전시장에는 총 10점의 상형청자의 내부 구조를 투명도와 각도를 달리해 살펴볼 수 있는 인터렉티브 영상도 설치됐다. 예컨대 고려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모양 병’과 ‘청자 상감 국화·모란무늬 참외모양 병’은 겉으로 봐선 굴곡진 참외모양으로 동일하지만, 그 내부 단면에서 굴곡과 높낮이 차이를 보인다. 양석진 학예연구사는 “상형청자는 단순한 형태가 아닌,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를 지녔다”며 “단순한 그릇이나 용기를 넘어선 예술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내년 1월 29일까지 열리는 현대미술 작가 니콜라스 파티(44)의 개인전에 전시된 ‘청자가 있는 초상’(2024) 화폭 속 오일파스텔로 표현된 청자도 이 전시에서 두 눈으로 직접 만날 수 있다. 청자는 표주박 모양을 본떠 만든 몸체에 연꽃잎을 감사 장식한 국보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주자’로 이번 전시를 위해 리움미술관 수장고 밖으로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내년 3월 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