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이어지는 고된 일상이지만 100세시대 준비없이 받아들이긴 부담 제2의 직장위한 학원·공부 주경야독
제빵사·바리스타 기술이 되는 취미생활 시드머니 마련위한 재테크 투자설계…
하지만 개인에 초점맞춰진 제2의 인생 인적자원 국가적 재배치부터 선행돼야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정은주(34) 씨는 드라마 작가 수업을 받으며 ‘인생 이모작’을 꿈꾼다. 고된 업무 속에서도 작가의 꿈을 놓지 않는 ‘고학 스토리’로 비칠 만도 하지만, 정 씨가 이 길을 택한 이유는 직장생활 5년차부터 들었던 우리 시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에서 비롯됐다.
“간호사로 일하다 보니 100세 시대란 말이 더 와닿았어요. 의학기술의 발달로 살기도 어렵지만 죽기도 어려운 세상이더군요. ‘앞으로 내가 굉장히 오래 살게 되겠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제2의 인생을 40ㆍ50대에 펼치기 위해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것이었다. 만 29세부터 드라마스쿨을 다니면서 습작 공부를 하고 있다. 그녀의 꿈은 간호사를 하면서 보고 배운 의학지식과 경험을 녹여낸 드라마 대본을 쓰는 일이다. “앞으로는 누구나 2개 이상의 직업을 갖게 된다고 하잖아요? 제1의 직업은 미숙한 청소년기 때의 결정으로 ‘운명’처럼 다가왔다면, 제2의 직업은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준비해 나갈 겁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정수(37ㆍ가명) 씨는 ‘자기 살 길은 자기가 찾아야 한다’는 신념이 강하다. 김 씨는 법원 부동산 경매가 열리는 날 직장에 반차나 월차를 내고 우선 새마을금고 등 신용금고를 찾아 증거금을 대출한 뒤 경매에 참여한다. 회사 이름을 이용하면 적잖은 금액이 대출가능한 데다, 입찰에 떨어질 경우 하루 만에 대출금을 상환하면 이자도 얼마 되지 않는다. 김 씨는 “은퇴 이후 임대업을 하며 살고 싶어 미리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모작 인생’을 준비하는 연령대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IMF 금융위기 이후 평생직장의 개념이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보편화된 과정을 지켜본 97학번 전후의 세대(30ㆍ40대 초반)들은 은퇴 이후 자신의 ‘먹거리’에 더욱 민감하다. 이미 눈앞에 닥친 고령화 사회와 역행해 정년은 점점 낮아지고, 아무런 준비 없이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내몰리는 현실을 보며 은퇴 이후의 삶을 일찌감치 준비하는 젊은 직장인들을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가볍게는 제과ㆍ제빵이나 바리스타 자격증 등 취미와 기술을 동시에 익힐 수 있는 일에 몰두하거나, 시드머니(seed money)를 만든다든지 부동산 투자 공부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한다.
직장인들의 ‘인생 이모작’ 고민이 늘어나면서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도 호황을 맞았다. 비영리 시민단체인 희망제작소가 운영하는 ‘퇴근 후 렛츠(Let’s)’ 프로그램의 주 고객은 30대 직장인이다. 이 프로그램은 ‘지나온 삶과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의 삶을 디자인하는 생애설계 프로젝트’라는 모토로 구성됐다. 재정 컨설팅 외에 공공성과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를 접목한 협동조합, 봉사활동, 인문학 강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해 ‘제2의 인생’을 준비하도록 돕는다.
은퇴정보 간행물 ‘행복설계’에서 30대 종잣돈 만들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NH은퇴연구소의 허승택 소장도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 다른 만큼 은퇴설계의 시작은 인생목표를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접근해야 할 것”이라며 “풍요로운 노후를 꿈꾼다면 30ㆍ40대부터 노후준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구조가 ‘이모작 인생’을 준비하는 데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은퇴 후 치킨집이나 편의점을 차려서 망하는’ 일이 제2의 인생의 현주소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웃을 일 만은 아니다. 고령층은 일반 기업에 채용이 거의 불가능하고, 젊은층은 유흥이나 식당 등 기술이 축적되지 않는 서비스업에 과도하게 몰려있기도 하다.
‘국가경제를 이모작 하라-은퇴가 없는 나라’(삼성경제연구소)의 저자 김태유 서울대 교수는 연령대별 분업을 통한 ‘이모작 사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육체노동ㆍ창조ㆍ혁신 업무를 잘하는 청장년층이 제조업 분야에 종사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경험과 배려에 강한 고령층에게 세일즈ㆍ자문ㆍ서비스 분야를 맡길 수 있도록 인적자원의 국가적 재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현재 ‘제2의 인생설계’나 ‘이모작’이 너무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경제구조 자체가 이모작이 가능하도록 재배치되지 않으면 개인의 힘만으로 은퇴 후 인생을 설계하기는 대단히 힘들다”고 강조했다.
이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