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세진 기자] ‘슈퍼히어로물 홍수’ 시대다. 마블과 DC코믹스라는 쌍두마차가 견인하는 슈퍼히어로들의 ‘시네마틱 유니버스(가상 세계관이 뚜렷한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시리즈)’가 심상찮다. 원작의 열성팬들에게는 한바탕 놀 잔치가 펼쳐지고 있지만, 슈퍼히어로 영화를 평소 즐기지 않았던 일반 관객들에게는 ‘나머지 공부’ 거리가 산더미 같다.
올해도 2월 ‘데드풀’을 시작으로 ‘배트맨 대 슈퍼맨’,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엑스맨:아포칼립스’, ‘수어사이드 스쿼드’, ‘닥터 스트레인지’, ‘시니스터 식스’ 까지 총 7편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전열을 다졌다.
▶ 2020년까지 연평균 5.8편↑…왜 이렇게 많나= 만화책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가 실사영화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30년대. 그만큼 슈퍼히어로 영화의 역사는 깊다. ‘스파이더맨’은 1930년대, ‘캡틴 아메리카’는 1940년대에 흑백 필름으로 최초로 영화화됐다.
슈퍼히어로물이 시리즈로 이어지고, 캐릭터들을 한데 모으거나 넘나들게 하는 영화들이 제작되는 트렌드는 2000년대 중반 형성됐다. 2005년 워너브라더스가 ‘배트맨 비긴즈’를, 2008년 마블이 ‘아이언맨’을 들고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슈퍼히어로물의 경쟁 구도가 펼쳐졌다.
마블은 이어 ‘인크레더블 헐크’, ‘퍼스트 어벤져’, ‘어벤져스1ㆍ2’ 등을 차례로 터뜨리며 슈퍼히어로 시리즈의 틀을 만들었다. 워너브라더스도 최근 DC코믹스 만화 캐릭터를 원작으로 한 ‘저스티스 리그’의 출발을 알리며 바짝 추격할 채비를 마쳤다.
워너브라더스, 마블, 20세기폭스 등 영화 제작사들의 공개된 라인업에 따르면, 올해부터 2020년까지 연평균 5.8편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개봉된다. 짧으면 1~2달, 길어도 3~4달 건너 한 편씩 하늘을 날거나 무적 수트를 입은 주인공이 극장을 찾아오는 셈이다.
슈퍼히어로 영화가 범람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치유의 목적보다는 ‘자본의 논리’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유지나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영화평론가)는 “관객들이 히어로 영화를 보는 이유는 체제 전복적인 스토리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라며 “그러나 최근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그러한 전복적인 시도보다는 시리즈라는 형식을 답습하면서 수입원을 끌고 가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할리우드의 매카니즘은 매우 정확하다”며 “결국 이런 영화들이 돈이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마블 히어로들이 처음으로 한 영화에 모인 ‘어벤져스’(2012)는 전 세계 수익 15억1800만 달러(약 1조7000억 원)를 기록하며 2012년 흥행성적 1위에 올랐다. 시리즈의 속편인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올트론’(2015) 또한 전세계 수익 14억500만 달러(1조5000억 원)약 로 당해 흥행작 3위로 안착했다. 전편에서 한껏 기대감을 끌어올려 관객들을 속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 적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전편 봐야 속편 볼 수 있어…제대로 즐기려면 부담감도↑”= 시리즈들이 쏟아져나오면서 캐릭터 숫자도 불어나고, 전반적인 스토리도 복잡해지고 있다.
지난 주말 친구와 영화관을 찾은 직장인 정모(여ㆍ28) 씨는 집에서 나오기 전 세시간 정도를 들여 영화 한 편을 ‘보충학습’해야 했다. ‘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의 시작’을 보기에 앞서 시리즈 전편인 ‘맨 오브 스틸’(2013)을 챙겨 본 것. 덕분에 스토리 맥락을 알고 영화관에 입장할 수 있었지만,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씨는 “영화 한 편 제대로 보기 위해 예습복습까지 필요하다니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등 한 캐릭터가 ‘원톱’으로 등장하는 시리즈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캐릭터들이 한 영화에 총출동하는 ‘어벤져스’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저스티스 리그’와 같은 시리즈는 한층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관객들이 슈퍼히어로들의 ‘계보도’ 까지 그리면서 영화 개봉에 맞춘 준비를 하는 모습까지 포착될 정도다.
게다가 영화 외적인 요소들도 공부 거리를 얹어준다. 원작 만화가 마블인지 DC코믹스인지, 영화 제작ㆍ배급사가 워너브라더스인지, 마블인지 혹은 20세기폭스인지 등도 영화 외적 경쟁 구도를 만드는 언어들이다.
▶ 상영관 점령, 영화 다양성은↓= 평균 2억5000만 달러(약 3000억 원)를 들여 경쟁적으로 제작하는 블록버스터답게 이 영화들의 배급사는 공격적인 배급 전략을 펼친다. 대형 멀티플렉스관이 자리를 잡은 국내에서는 때때로 슈퍼히어로물의 ‘상영관 점령’이라는 모습이 빚어지기도 한다.
24일 개봉한 ‘슈퍼맨 대 배트맨’(워너브라더스코리아)은 첫날 스크린 1613개를 열어젖히면서 35%의 스크린점유율을 기록했다. 이날 하루만 이 영화는 전국에서 7376회(상영점유율 53.1%)나 상영됐다. 2위인 한국 청춘영화 ‘글로리데이’가 스크린 424개를 가져가며 스크린 점유율 9.2%를 차지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다.
지난 2월 개봉한 ‘데드풀’(20세기폭스)은 스크린 점령을 염두에 둔 변칙 개봉으로도 논란이 일었다. 애당초 2월17일 개봉이 예정돼 있었지만 16일 오후부터 ‘전야 개봉’이라는 명목으로 개봉을 하루 앞당겼다. ‘데드풀’은 16일까지 1위이던 ‘검사외전’을 밀어내고 17일 스크린 수 915개(스크린점유율 19%), 관객 25만2018명을 동원했다.
이 때문에 슈퍼히어로 영화의 개봉은 다른 영화들의 개봉 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국내 영화배급사 관계자는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이 개봉하는 주에는 굳이 영화를 들여보내려 하지 않는다”라며 “한 주에 1위 작품이 2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 영화가 좋은 환경에서 배급될 수 있도록 시기를 조율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공격적 배급전략에 영화의 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지나 교수는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에 자신의 의지보다 상영 시스템의 영항을 많이 받는다”면서 “한 영화가 스크린을 싹쓸이해가서 관객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은 행패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