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왕좌 오른 tvN 드라마 ‘정년이’
민폐 캐릭터마저 뒤바꾼 김태리의 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50년대 후반, ‘국극의 시대’에 천재 소리꾼이 등장했다. 소리 한 번 배워본 적은 없지만 한 자락만 해도 사람을 홀렸다. 당대 최고의 국극 스타에게 발탁돼 최정상 국극단의 오디션을 보게된 행운아. 목포에서 올라온 초짜 소리꾼 윤정년이다. 매란국극단의 ‘보결 연수생’으로 입단해 무섭게 성장하는 ‘넘사벽’ 재능의 소유자. 그런데 그 과정이 석연치 않다.
“내가 국립창극단 단원인데 뒤늦게 연수생으로 들어온 단원이 주연 자리 내놓느라고 하고, 절차도 무시하고 오디션 보겠다고 하면 그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건가요?”
tvN 드라마 ‘정년이’의 방송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엔 한 시청자의 이런 글이 올라왔다. ‘정년이’ 캐릭터에 대한 의문 제기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정년이’를 응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는 한국전쟁 직후 대한민국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로 자리한 국극을 소재로 여성 소리꾼들의 경쟁과 연대, 성장을 담았다. 김태리가 연기하는 주인공 윤정년을 중심으로 매란국극단의 수장 강소복을 연기하는 라미란, 국극단의 왕자님으로 불리는 ‘소녀들의 로망’ 문옥경 역의 정은채, ‘정년이’의 라이벌 영서 역의 신예은, 정년이의 절친 주란을 연기하는 우다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다.
윤정년은 대단한 오지라퍼다. 천둥 벌거숭이처럼 오만 곳을 헤집고 다닌다. 윤정년에게 ‘룰’은 오직 윤정년뿐. 기존의 질서와 규칙은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가 혁명가라서가 아니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막무가내로 덤비고 자신만의 방식이 정당한 것처럼 행동한다. “늦게 들어왔다고 오디션 기회가 없다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난데없이 등장해 정당성을 문제 삼는 윤정년의 행동은 기존의 사람들에겐 최악의 부당함이다. 게다가 목소리만 들어도 간파당할 ‘소리 수저’를 쥐고 태어난 ‘소리 천재’이니 윤정년의 행동은 재능을 등에 자의 오만함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심지어 고집불통이다. 지난 7~8화에서 윤정년은 ‘자명고’ 무대에서 군졸 역을 맡았으면서도 대본에도 없는 소리를 뽑아내 극에 없는 장면을 만들어버렸다. 연출, 작가, 작창가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물론 무대 위의 약속을 완전히 무시한 행동이었다. 8화에선 자신의 한계를 넘고 소리를 하겠다며 주변 사람들의 조언은 무시한 채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아무 소리도 듣지 않고 자신에게만 매몰된 채 목을망가뜨리고 만다.
드라마는 드라마다. 매 장면 드라마틱하게 주연배우 윤정년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를 숨겨둔다. 어떤 민폐 상황도 뒤바꾸는 것은 정년이의 ‘천부적 재능’이다. 예인의 세계에서 그 어떤 장애와 부조리도 넘는 것은 압도적인 ‘재능’이다.
이 과정에서 김태리의 연기가 돋보인다. 다소 과정되고 억센 말투로 대사를 소화해도 정년이는 김태리를 입고 반짝인다.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생기탱천한 눈빛, 출중한 실력을 마주할 때 나오는 경의가 담긴 진심의 눈빛은 윤정년을 밉상 ‘소리 수저’가 아닌 노력형 천재이자 성격 좋은 동료로 보이게 한다.
이 캐릭터를 만든 것은 오로지 김태리의 힘이다. 윤정년이 소리 천재라면, 그를 연기하는 김태리는 ‘연기 천재’에 가깝다. 다른 사람의 삶의 영역까지 침범하며 온몸으로 성장통을 겪는 덕에 주변 사람들은 마음 편할 날이 없지만, 그 캐릭터의 극적인 모습이 이 드라마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지난 8회 기준 전국 평균 12.8%, 최고 15.1%(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를 기록, 지상파를 포함한 전 채널 동시간대 1위에 올랐다.
‘여성 국극’을 이어받아 전통 창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는 공연계에서도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다. ‘정년이’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드라마 준비 과정 중에 있어던 지난해 국립창극단이 먼저 올린 창극 ‘정년이’를 보러오기도 했다.
민간 소리극 단체 ‘타루’의 대표이자 오는 14일 개막하는 국립창극단 ‘이날치전’의 연출을 맡은 정종임 감독은 “‘정년이’가 워낙 화제의 작품이다 보니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며 “소리의 깊이에 있어선 아쉬운 면이 있으나 재밌게 보고 있다”고 했다. 유은선 국립창극단 단장은 “매주 본방사수를 할 정도로 굉장히 재밌게 보고 있다. 드라마 속 국극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며 “캐릭터 연기에 있어 창극단 단원들도 본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드라마를 통해 우리 창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 같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