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빼고 불러. 그러면 훨씬 목소리가 잘 나와.” “첫 소절을 자신 있게 불러. 틀려도 괜찮으니까.” “오케이! 생각보다 다들 잘 하는데?”
지난 16일 오후 5시 서울 방배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림잡아 5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넓지 않은 스튜디오로 몰려들어 내부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중년의 남성부터 발랄한 매력을 발산하는 젊은 여성까지,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이름은 록밴드 블랙홀이었다.
이 자리는 내년 초에 발매되는 블랙홀의 새 앨범에 수록될 예정인 신곡 ‘그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의 코러스를 녹음하는 현장이었다. 블랙홀은 오랜 세월을 함께해준 팬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이 곡의 코러스 녹음을 팬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소식이 팬클럽에 공지되자 부산과 전남 등 수도권과 먼 지방을 비롯해 미국에서도 팬들이 참여의사를 밝혀 눈길을 모았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밴드의 막내인 드러머 이관욱의 늦깎이 결혼식이 열린 날이기도 했다. 하객으로 참석한 팬들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스튜디오로 내달렸다.
스튜디오 안을 가득 채운 팬들은 30년 가까이 성실하게 공백기 없이 활동해 온 블랙홀의 이력서였다. 팬들뿐만 아니라 스튜디오의 엔지니어와 이날 현장을 꼼꼼하게 렌즈에 담은 사진작가 역시 블랙홀의 오랜 팬이었다. 밴드의 멤버와 팬들의 얼굴이 서로 익숙하고, 팬들 사이에도 서로의 얼굴이 익숙하다보니 스튜디오 내부의 분위기는 친목회에 가까울 만큼 화기애애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친밀감을 넘어선 일부 팬들은 부부의 연을 맺기도 했다.
블랙홀의 리더 주상균은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쉼 없이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전적으로 팬들의 응원 덕분이다. 언젠가는 팬들과 함께 곡을 녹음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며 “블랙홀의 곡 대부분은 강렬한 록이어서 팬들이 따라 부르기 어려운 편인데, 이번 녹음을 위해 팬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어렵지 않은 멜로디에 실린 ‘그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의 가사 “어두운 밤에 혼자이지 않게 언제나 함께 했던 그리운 얼굴들”은 팬들을 향한 내밀한 감정의 첫 음악적인 고백인 셈이다.
녹음 마친 팬들은 스튜디오 인근 주점에 모여 블랙홀의 멤버들과 함께 어우러져 술잔을 나눴다. 뮤지션과 팬이라는 사이의 벽을 넘어선 이들의 속 깊은 대화 속에선 진득한 인연의 끈이 엿보였다.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이영철(39) 씨는 “블랙홀과 인연을 쌓은 세월이 20년에 가깝다보니 이제 남 같지 않다”며 “오늘도 드러머의 결혼이라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전남 고흥군에서 올라온 최삼화(46) 씨는 “블랙홀은 음악만큼이나 팬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소탈함이 매력적인 밴드”라며 “블랙홀과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찾아오는 이유는 멤버들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정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