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초단타의 韓증시 공습] ①
거래소 ‘고속 알고리즘거래자 등록제’ 현황 입수
“外人, DMA 통한 HFT 거래자 등록 64곳으로 증가”
찰나에 매도 물량 쏟아져…‘개미지옥’ 배후에 HFT 지목
“HFT 글로벌 트렌드 VS 시장교란 부작용”
초단타 시장 불신 커지면 ‘공매도 시즌2’ 비화
[헤럴드경제=유혜림·김민지 기자] #. 지난해 8월 8일 오후 2시께, 점심 이후 나른했던 시장 공기가 일순간 팽팽해졌다. 당시 초전도체 관련 테마주로 꼽히며 급등했던 종목들이 무더기로 급락한 것이다. 주가 조정까지 걸린 시간은 단 20여분. 이 급락 사태는 국내 연구진이 발견한 상온·상압 초전도체 물질(LK-99)과 관련된 진위 논란 속에서 발생했지만, 이렇게까지 매도세가 급격한 건 단순히 개인 투자자들의 '패닉 셀'로만 보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왔다.
증시 전문가들은 DMA(직접전용주문선)를 통한 초단타 매매가 주가 급락의 방아쇠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DMA는 외국인과 기관들이 AI 알고리즘으로 설계한 주문을 거래소 체결 시스템에 곧바로 전송할 수 있는 ‘고속 매매 시스템’으로, 개인이 사용하는 MTS(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나 HTS(홈 트레이딩 시스템)보다 훨씬 빠르다. 개인이 사용하는 시스템의 처리 속도가 0.02~0.05초인 반면, DMA를 통한 주문은 단 0.001초 만에 처리된다.
▶“개미 울린 ’제2의 시타델 사태’ 연상”=지난해 급락 장면이 다시 소환된 배경에는 최근 시장에서 ‘제2의 시타델 DMA 사태’가 의심되는 현상이 부쩍 잦아졌기 때문이다. 2017년 시타델증권은 DMA를 이용한 알고리즘 매매로 매수세를 유도해 가격을 올린 뒤, 보유 물량을 처분하고 매수 주문을 취소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교란시켰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동학개미들은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몰려가 “최첨단 알고리즘 매매를 통해 기세를 조작하고 개인 투자자를 속여 매수하게 만든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올해 3월,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이복현 금융감독원 원장을 만나 “주로 조세회피처를 통한 펀드나 외국인들이 시세 차익을 위해 DMA를 이용해 0.001초 단위의 고빈도 단타 매매를 하면서 시세조종에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4월 금감원은 복수의 증권사를 대상으로 DMA 현장 점검을 진행했으나 별다른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업계 관계자는 “증권사만 점검하고 실제 주문 거래자까지 조사가 확대되지 못했다”면서 “시타델 사태 조사도 국민청원이 단초가 되었던 만큼, 현재의 시장 우려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한다.
▶DMA 기반 ‘극초단타’ 거래자 증가=그렇다면 DMA를 통해 ‘극초단타’ 매매를 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얼마나 될까? 먼저 DMA 채널을 활용한 ‘극초단타’를 하려면 거래소에 사전 등록을 해야 한다. 거래소가 ‘제2의 시타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지난해 1월부터 ‘고속 알고리즘 거래자 등록제’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에 본지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훈식 의원실로부터 한국거래소 제출 자료를 확인한 결과, 올 들어 고속 알고리즘 거래자로 등록된 외국인 투자자는 총 64곳(8월 9일 기준)으로 작년 말(59곳) 대비 8.5%(기관 5곳)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고빈도 알고리즘 매매(High Frequency Trading·HFT) 거래자로도 불리는데, HFT는 통상적으로 고속 알고리즘 거래를 통해 고속·고빈도로 이뤄지는 주식 거래를 뜻한다.
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HFT 규제가 강화됨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들이 아시아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까지 등록된 국내외 HFT 투자자(개인·기관)는 총 281곳이며, 외국인이 전체 등록자의 23%를 차지한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을 굴리고 있어, 기관 한 곳이 늘어날 때마다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할 것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지난 8월 블랙먼데이 당시 연쇄 폭락 배경에는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우려를 감지한 AI 알고리즘 초단타 매매 물량이 상당할 것"이라고 예시를 들었다.
▶“外人, 개인회전율 높은 코스닥 종목 노려”=전문가들이 우려하는 점은 외국인들이 개인들의 매수 비중과 회전율이 높은 코스닥 종목을 타깃으로 HFT 거래를 하는 행태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증권사 리서치센터가 지목한 의심 사례를 집계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해 8월 초전도체 급락 외에도 ▷지난해 7월 셀트리온 3사의 합병 이슈로 2시 이후 급등 ▷지난해 6월 26일 HD현대인프라코어와 HD현대건설기계가 별다른 이슈가 없음에도 급등 후 급락한 사례 등이 있다.
특히 최근 모 외국계 창구의 매수·매도 포지션 변동이 유독 잦은데, 이는 2017년 시타델증권의 시장 교란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실제 최근 10년간 해당 증권사의 거래비중을 살펴보면, 한자리 수에서 지난해 돌연 14%대까지 증가한 것으로 파악됐다.
고경범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이는 지수 거래대금 상승을 고려하더라도 ‘시타델 사태’ 당시 메릴린치 창구 거래를 능가하는 수준”이라며 “최근 외국인 수급에선 과도한 매수, 매도량의 회전율이 발견되고 있다. 어떤 주식의 주가가 하루 급등하면 다음날 다른 테마나 섹터로 포지션이 이동하는 빈도 역시 매우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한 최근 동향에 대해선 “지난 9월 2일에는 2차전지가 급등했고, 다음 날(3일)엔 반도체와 자동차가 급락, 지주 섹터가 급등했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지난 5월에는 통상 우량주를 매수해 장기 보유하는 가치 투자 전략을 썼던 외국인들이 최근 들어 HFT로 주도 세력이 바뀌고 있다는 연구 결과(한국증권학회)도 발표됐다. 연구진은 “금융 당국도 외국인에 대한 다양한 인식과 시장 영향력에 대한 추가적인 견해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HFT 글로벌 트렌드 VS 시장교란 부작용”=일각에선 HFT 거래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반박도 제기한다. HFT는 유동성을 공급하는 데 기여하고 이미 미국 등 글로벌 시장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매매 기법이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미국 주식 거래량의 50%, 유럽 주식 거래량의 20~40%는 HFT 거래로 추정된다. 오히려 과도한 제약을 가하면 HFT 전략을 사용하는 외국인의 이탈, 파생상품 시장 거래량 위축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HFT에 대한 불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공매도 시즌2’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HFT는 사실상 대규모 자금을 운용하는 외국인과 기관의 전유물로, 개인들은 이러한 매매 방식에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단타 매매는 수백, 수천 개의 종목을 일일이 분석해야 해서 불법성이나 조작 의도를 입증하는 게 매우 어렵다. 이에 HFT 거래자 모니터링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인 거래 패턴을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는 AI 기반의 거래 패턴 분석 시스템을 매년 강화해야 한다는 진단들이 제기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DMA를 통한 HFT는 아직 공매도처럼 실제 피해 사례가 더 많이 나오지 않아 사회적으로 이슈가 안됐을 뿐”이라며 “사전 예방과 사후제재를 더 강화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강훈식 의원은 “날로 정교해지고 있는 AI 초단타 매매 성장 속도를 금융당국과 거래소가 따라가지 못한다면 개인 투자자 피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면서 “당국의 철저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