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콘 타이완 2024’ 생생한 뒷이야기
“HBM으로 삼성·SK 서로 공격하나” 현장서 관심 커
한국-대만 반도체 교류 확대 가능성 시사
‘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한국 기자인가요? 한국 매체들은 총 몇 개 정도 왔나요? 삼성·SK가 이번에 처음으로 세미콘 타이완에 온 배경은 뭔가요?”
이번주 반도체 업계를 뜨겁게 달군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세미콘 타이완 2024’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대만 매체 및 글로벌 외신 기자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습니다. 소수의 한국 매체가 취재를 갔는데, 한국어를 하는 모습을 보고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여러 질문을 해올 정도였으니까요.
동시에 씁쓸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명실공히 메모리 1위 강국 국내 주요 기업 리더들을 불러들인 대만의 위력을 실감했으니까요. 오늘 칩만사에서는 기자가 현장에서 보고 들은 ‘세미콘 타이완 2024’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삼성·SK 첫 참가에 시끌…HBM 향한 관심도 체감
‘세미콘 타이완 2024’가 개막하기 이틀 전인 지난 2일 열린 프레스 콘퍼런스 현장에서 한 외신 기자는 “한국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처음으로 세미콘 타이완에서 와서 발표를 하는데, 이들이 먼저 오겠다고 했나요 아니면 초청을 한건가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테리 차오 세미콘(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 대만 대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사장급이 와서 발표를 하는 건 올해 세미콘 타이완의 가장 하이라이트 중 하나”라며 “두 회사는 이미 대만 기업들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지만 세미콘 타이완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올해 발표는 반도체 업계의 새로운 지형이 열렸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대만과 한국의 새로운 파트너십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삼성·SK와 세미콘 타이완 중 누가 먼저 러브콜을 보냈는지는 확답을 피한 셈이지만, 대만에서 우리 K-반도체를 향한 관심이 뜨겁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행사의 백미였던 ‘CEO 서밋’ 당일에는 더욱 신선한 경험을 했습니다. 현장에서 다른 한국 기자들과 참석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몇몇 대만 기자들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한국 매체냐”면서 “한국에선 기자가 몇명이 왔는지”, “삼성과 SK의 발표 때문에 오게 된 것인지” 등을 물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HBM(고대역폭메모리)를 둘러싸고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서로 공격하지는 않는지, 삼성전자의 파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 한국 반도체 업계 이슈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대만 기자들이 삼성·SK 반도체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알고 있으며, 많은 정보를 얻고자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씁쓸한 마음을 들게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대만에서는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TSMC를 정말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더니 “솔직히 아니다. 아무래도 격차가 많이 나다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하더군요.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에서 약 50%포인트의 차이가 나는 것이 큰 벽으로 느껴졌습니다.
AI 시대 저전력·고효율은 선택 아닌 필수…메모리 역할 ↑
세미콘 타이완의 여러 세션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된 건 전력 문제였습니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반도체 업계는 ‘전력 소비’라는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에너지는 최소한으로 쓰면서, 효율은 높은 반도체를 구현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습니다.
여기서 해결사로 등장한 것이 우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입니다. 이번 세미콘 타이완에서 기조연설자로 나선 이정배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 사장과 김주선 SK하이닉스 AI인프라 담당 사장은 모두 AI 고효율·저전력을 가능하게 할 메모리 기술력을 부각했습니다.
삼성은 AI 시대에 메모리가 직면한 세가지 과제로 ▷전력 소비 급증 ▷메모리 월 ▷저장 용량 부족을 꼽고 이를 해결할 자체 AI 메모리 솔루션을 소개했습니다. 저전력에 특화된 LPDDR(저전력더블데이터레이트) D램으로 ▷LPW (LPDDR Wide-IO) ▷LPCAMM2 ▷LPDDR5X-PIM (프로세싱 인 메모리) 등을 다양한 제품군을 공개했습니다. LPW는 LPDDR5X 제품 대비 성능은 133% 증가했고, 전력 소모는 52% 감소했습니다. LPDDR 패키지 기반 고용량 모듈 제품인 LPCAMM2은 기존 So-DIMM 제품 대비 성능은 50% 높이고 전력 효율은 70% 개선했습니다.
서버용 SSD에 대해 이 사장은 “전력 소모를 줄이면서도 용량을 지금보다 네 배 키운 256테라바이트(TB) SSD 등을 출시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주선 사장도 “AI 시장이 커지려면 발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전력 사용량을 줄여 열 발생을 최소화한 고효율 AI 메모리 개발에 들어간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LPDDR6, LPCAMM, 512GB(기가바이트) 고용량 모듈, 개선된 LPDDR5 제품 등을 소개했습니다.
삼성-TSMC 맞손 가능성 열어뒀다…한국-대만 교류 확대 시사
이번 세미콘 타이완은 한국과 대만이 향후 반도체 분야에서 교류를 늘려갈 수 있다는 다양한 시사점을 남겼습니다. 삼성전자는 6세대 제품인 HBM4부터 파운드리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메모리에서의 협업은 삼성 파운드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며 “다른 파운드리 및 전자설계자동화(EDA) 업체들과 협업해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세계 선단 공정 파운드리는 사실상 TSMC와 삼성전자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TSMC와 협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셈입니다.
발표 후 이어진 대담에서 이정배 사장과 Y.J. 미 TSMC COO(최고운영책임자·부사장)이 만나 AI의 미래에 대해 토론한 것도 고무적입니다. 양사 임원이 공식 석상에서 담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업계에선 이례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특히 TSMC의 경우 임원들이 글로벌 행사는 물론, 대만에서도 포럼 등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파운드리 경쟁자인 삼성전자에 대한 언급 역시 극도로 조심할 정도로 보수적인데, 같이 한 무대에 오른 것이 유의미하다는 평가입니다.
내년에 열릴 세미콘 코리아 등 국내 반도체 행사에서 TSMC 임원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는 이유입니다. 대만 반도체 업계도 국가간, 분야간 경계를 뛰어넘는 파트너십이 필요하다는 데 목소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보유국이라는 명성에 맞게 국내에서도 이번 세미콘 타이완에서의 화려한 연사 라인업을 볼 수 있는 행사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