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 왕국으로 부의 ‘낙수효과’
전세계 최강 반도체 생태계로 우뚝
‘반도체-세트-AI서버’로 탄탄한 IT 벨트
‘세미콘 타이완 2024’에 삼성·SK 참석
소부장 중심 행사에 구글·MS까지 동참
‘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대만이 TSMC를 등에 업고 아시아 반도체의 중심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지난 6월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4’에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리사수 AMD CEO, 팻 겔싱어 인텔 CEO가 총출동해 화제가 되기도 했죠. 내달 4일에는 ‘세미콘 타이완’을 여는데, 그 규모가 다른 세미콘들과는 남다릅니다. 세미콘은 원래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중심 포럼이지만, 이번 타이완에는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 임원들도 총출동합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처음으로 사장급 임원을 기조연설자로 출격시킵니다. 반도체 업계서 대만이 가진 위상을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국은 ‘메모리 1위’ 타이틀을 유지해온 30년 동안 이렇다 할 글로벌 반도체 행사 하나를 키워내지 못했습니다. 세미콘 타이완 보다 먼저 열리는 ‘세미콘 코리아’도 있지만, 그 규모나 초청 연사들이 다소 차이가 납니다.
대만이 반도체 중심국이 될 수 있었던 진짜 저력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TSMC 보유국이라는 이유 만으로 대만은 이렇게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관심을 온몸에 받는 걸까요? 한국은 대만을 넘어 아시아 반도체 중심국이 될 수 없을까요? 오늘 칩만사에서 분석해보겠습니다.
나라 전체가 거대한 ‘TSMC 왕국’…반도체가 일으킨 낙수효과
대만 경제는 TSMC가 책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TSMC 중심의 거대한 반도체 생태계를 기반으로 수많은 낙수효과가 발생하며 국가 경제를 부양하고 있습니다. TSMC가 신규 공장을 대거 짓고 있는 타이난과 가오슝에는 건설노동자와 협력사가 몰리며 지역 경제 전체가 활기를 띄고 있고, 유입 인구가 늘면서 부동산 가격도 오르는 추세입니다. TSMC 본사가 위치한 신주에는 신규 쇼핑몰 등이 들어섰고, 지난 4년간 대만의 페라리 판매량은 두 배가 늘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인 경제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대만은 GDP에서 2022년 이후 2년만에 다시 한국을 앞지를 전망입니다. IMF에 따르면 대만의 1인당 GDP는 올해 3만4430달러를 기록, 한국(3만4160달러) 보다 높을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TSMC 하나에 집중”…‘올인’ 전략, 오히려 생태계 키웠다
대만 정부는 TSMC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세제 혜택, 인력 양성, 인프라 구축 등 전방위적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뤄집니다. 단적인 예로 지난 2021년 대가뭄이 발생했을 때 대만 정부는 벼 재배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끌어다 TSMC 공장에 공급했습니다. 말 그대로 ‘TSMC만을 위한’ 원포인트 지원을 불사할 정도입니다. 업계에서는 대만 정부의 세제 혜택으로 TSMC가 해마다 1조원이 넘는 세금 감면 혜택을 받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TSMC는 이렇게 받은 혜택을 연간 50조원에 달하는 투자로 보답합니다. 신공장 구축으로 건설부동산 경기를 살리고, 매년 수천명의 인력을 신규 채용합니다. 지난 6월 TSMC 이사회는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 약 40억 대만달러(약 1699억원)를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대만 정부는 TSMC의 인력 부족 문제 해소를 위해 매년 4000~5000명의 반도체 인재 양성 계획을 내놨습니다.
이같은 대만 정부의 TSMC ‘올인’은 결과적으로 전체 반도체 산업을 키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TSMC가 승승장구하면서 각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의 주요 플레이어들이 양성된 겁니다.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는 미디어텍, 후공정 패키징 분야에서는 ASE 등의 세계적 기업이 생겨났습니다.
TSMC의 존재만으로 대만은 글로벌 후공정 기업의 허브가 됐습니다. 전세계 후공정 기업 중 57%가 대만에 자리 잡고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대만 ASE는 세계 최대 반도체 후공정(OSAT) 업체입니다. 엔비디아, 퀄컴, 인텔, AMD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습니다. TSMC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전세계 빅테크가 주문한 반도체의 첨단 패키징을 책임집니다. 최근 AI 시장 확대로 AI 가속기 주문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더욱 수혜를 보고 있습니다.
반도체 설계, 파운드리, 패키징으로 이어진 생태계는 대만의 전통 강점인 노트북·PC 등 IT 세트로도 이어집니다. 대만은 레노버와 HP, 에이서, 에이수스 등 유수한 글로벌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AI 붐과 맞물려 서버 제조 업체까지 수혜를 보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열린 컴퓨텍스에서 엔비디아는 대만의 슈퍼마이크로, 콴타컴퓨터 등 데이터센터 서버 제조 업체와의 공고한 협력을 강조하며 힘을 실어줬습니다. 슈퍼마이크로는 엔비디아 AI 반도체가 탑재되는 데이터센터용 서버를 제작하는 업체인데, 창업자가 대만 출신입니다. 노트북 위탁생산으로 잘 알려진 콴타컴퓨터는 최근 클라우드 컴퓨팅, 기업용 네트워크 솔루션 등으로 사업 모델을 다각화하고, AI 서버 제조사인 콴타 클라우드 테크놀로지(QCT)를 통해 엔비디아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커지는 파운드리 격차…삼성 혼자선 ‘역부족’
이쯤되면 ‘반도체-세트-데이터센터 서버’로 이어지는 대만의 IT 생태계가 얼마나 탄탄한지 조금은 감이 잡히실겁니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회사 1, 2위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참 씁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유일한 대항마로 꼽힙니다. 그러나 점유율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올 2분기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13%로 1위인 TSMC(62%)와는 무려 49%포인트 차이가 납니다. 사실상 TSMC의 독주인 셈이죠.
전문가들은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이 대만과 견줄 수 있으려면 삼성·SK 외에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여러 플레이어를 길러야한다고 강조합니다. 반도체 설계, 후공정, 셋트, 소프트웨어, 서버 제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골고루 싹을 틔워야 한다는 겁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반도체에서는 생태계가 가장 중요한데, 대만은 TSMC를 중심으로 탄탄한 밸류체인을 가지고 있다”며 “소부장, 설계, 패키징 등 각 분야에서 중소·중견기업들이 잘 클 수 있도록 하는 토양을 만들어줄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습니다.
대기업들도 국산화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생태계 강화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교수는 “여전히 대기업들은 미국, 일본, 유럽의 소부장 업체들을 메인으로 협력하고 있다”며 “최근 들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국내 기업들의 기술력도 많이 올라온 만큼 국산화율을 높여 낙수효과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소부장 포럼인데…글로벌 빅테크·삼성·SK 총출동
오는 4일 개막하는 ‘세미콘 타이완 2024’은 막대해진 대만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사입니다. TSMC 임원들과 엔지니어들이 대거 연사로 등장하는데, 이런 포럼은 반도체 업계에서도 드뭅니다. ASE를 포함해 대만 반도체 업체들이 총출동하자, 대표적인 글로벌 빅테크인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도 발표자로 나섰습니다. 세계 3대 반도체 장비 업체인 어플라이드 머터리얼즈의 대표도 기조연설을 진행합니다.
올해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처음으로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이정배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과 김주선 SK하이닉스 AI인프라 담당 사장이 AI 시대의 HBM을 포함한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에 대해 발표합니다.
양사 모두 차세대 HBM인 HBM4(6세대) 경쟁력을 강조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정배 사장은 ‘메모리 기술 혁신을 통한 미래로의 도약’이라는 주제로 삼성전자가 HBM4 분야에서 올인원·맞춤형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춥니다. 김주선 사장은 ‘AI 메모리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라는 주제로 TSMC와 HBM4에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어필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구글 어플라이드 AI 엔지니어링 담당 부사장과 TSMC COO와 AI 반도체에 관한 노변정담(fireside chat)도 이어집니다. 반도체 소부장 뿐 아니라 AI 붐과 관련한 다양한 인사이트가 논의될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