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봉평 축제 가을을 열다
문학지평을 넓힌 양수겸장 행보
[헤럴드경제(평창 봉평)=함영훈 기자]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평창 봉평 메밀밭과 시골장터를 배경으로, 필부필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농촌 전원 소설이지만, 작가 이효석(1907~1942)은 1920~1940년대 서양문화를 탐닉했던 ‘신(新) 남성’이었다.
가산(可山) 이효석은 커피를 즐겼고, 쇼팽을 사랑했다. 유럽 최고의 배우 프랑스 출신 다니엘 다리유(Danielle Darrieux)의 팬이었다. 유럽과 아메리카 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남·북·미군이 오지에서 함께 사는 영화 ‘웰컴투 동막골’ 촬영지 두 곳, 동쪽 선자령 하늘목장과 남쪽 미탄 육백마지기엔 해발 1000~1200m 초원,산촌이 있고, 봉평과 장평엔 드넓은 메밀밭이 있는 곳, 강원도 내에서도 벽촌으로 꼽히는 평창에서 자란 ‘촌사람’ 이효석이 100년전에 이미 글로벌 최신 트렌드를 추구한 점은 이채롭다.
서양 사대주의가 아니다. 이처럼 폭 넓은 그의 경험 스펙트럼은 당시 획일화된 모습으로 금수강산을 덮고있던 일제 문화로부터의 탈피, 나아가 가산이 추구하는 문학세계의 다양성, 융·복합성으로 이어진다.
▶차점(카페) ‘DON’의 추억= 메밀밭이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봉평의 이효석 문학관의 카페 ‘동(DON)’은 그의 문학세계와 관련해 많은 것을 함축해 품고 있다.
‘동’은 러시아 남서부에서 아조프해로 흘러가는 강(江) 이름으로 노벨상 수상자 쇼홀로프 등 많은 문인들의 문학소재가 됐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 주인공 허생원의 기막힌 물레방앗간 로맨스의 소생, 장돌뱅이 소년 이름도 ‘동’이고 가산의 고향 평창에서 발원해 영월-정선으로 흐르는 강이름도 ‘동’(한자는 東)강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 하얼빈은 ‘동양의 파리’로 불리던 동서문화 교류의 장이었다. 유럽문화와 체험을 늘 마음에 품던 가산은 한반도 최북단 함경도 경성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동’을 만난다.
“차점(카페) ‘동’은 나에게도 중하고 귀한 곳이었다. 그곳을 바라고 나는 거의 일요일 마다 10리의 길을 걸었다. 공원 옆 모퉁이에 서 있는 조촐한 한 채의 집, 그것이 고요한 ‘동’. 마차와 함께 거리의 그윽한 것의 하나였다. 붉은 칠이 벗겨진 ‘DON’의 글자가 밤에는 푸른 등불 밑에 길게 묻혀버린다. 나는 이 이름의 유래를 모르나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동은 그때의 나에게 이(커피) 향기를 준 곳이었다. 고요한 곳에서 그 향기를 찾으려고, 나는 10리의 발길을 앞두고 눈 오는 밤을 그 곳에서 지새우는 것이다. 간간이 레코드 회사 출장원이 내려와 레코드 연주회를 열 때가 있었으니, 그것은 늘 귀한 진미가 되었다. 꿈은 한결 풍성하였다.(1936년 조광지 12월호에 발표된 수필 ‘고요한 동의 밤’ 중에서)
▶주을온천에서 유럽 미학을 목도하다= 경성시내 북쪽 산에 있던 ‘주을온천’ 역시 그는 단골 방문지였다. 공산세력에 밀려난 러시아 왕족과 귀족 중 일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청진까지 피신왔다가 찾아낸 건강 은둔 휴양지였다. 이효석은 그들을 부르조아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유럽의 미학이 담긴 그들의 별장 생활을 문학적 영감을 얻는 소재로 기꺼이 관찰, 탐닉했다고 한다.
당시, 청진항에선 미국 혼혈흑인 여가수 조세핀 베이커의 재즈독창회가 있었는데, 비싸게 차를 대절해서 그녀의 공연을 감상했다. 말로만 듣던 미국의 요란한 문화가 아니라, 향수짙은 선율이기에 청중이던 가산의 놀라움도 컸다고 한다.
커피숍 ‘DON’ 인근 나남 마을에 있는 유럽형 브래든 버터(Bread and Butter) 빵집 역시 가산이 자주 들른 곳이다.
이효석 문학관은 ‘커피를 사랑한 남자’라는 설명글을 통해, 가산이 유럽 문화와 평창 문화를 연결시켰음을 보여준다.
“거의 인이 박힌 듯 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커피를 즐겼다. 그는 특히 진한 다갈색의 향기 높은 모카를 좋아했고, 퍼콜레이터로 커피를 끓이며 행복에 잠기곤 했다. 그의 1938년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낙엽을 태울 때 피어오르는 향을 ‘갓 볶아낸 커피의 향’이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봉평과 유럽의 연결= 봉평 효석문화마을엔 고증을 통해 복원한 이효석의 집이 두 종류이다. 평창형과 유럽형.
마당 끝줄엔 백일홍과 해바라기 등이 미소짓고 처마 아래 마루에서 정담을 나누는 옛 생가가 있고, 이곳에서 100m 가량 떨어진 효석달빛언덕엔 평양-경성에서 살던 유럽형의 집이 복원돼 있다.
유럽형 집은 쇼팽의 음악을 듣던 축음기, 레코드판, 쇼팽 사진, 타자기, 풍금, 커피잔세트 등으로 장식돼 있다. 효석 달빛언덕과 메밀밭을 내려다 보는 이효석 문학관엔, 어느 성탄절 다니엘다리유 여배우 사진 아래,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한, 효석의 서재 인테리어도 재현돼 있다.
봉평에서 유럽까지, 다양한 글감을 섭렵한 이효석은 마침내, 시와 소설의 융합, 문학표현법·소재·문체의 다양성에 대해 일갈한다.
이효석은 ‘현대적 단편소설의 상모’는 글에서 “소설의 목표는 다만 진실의 전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의 표현을 수단으로 궁극에 있어서는 미의식을 환기시켜 시의 경지에 도달함이 소설의 최고 표지요, 인상인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평론글 ‘문학 진폭 옹호의 변’을 통해서는 “건망증에 걸려 한가지 제목에만 오물하다 문학의 다양한 품질과 향기를 힐난함은 과분한 욕심이요, 쓸데 없는 명예욕이다. 문학 상호의 방향과 양식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겸허함이 문학자의 진정한 태도일 듯 하다. 문학의 진폭은 될 수 있는 대로 넓어야 함이로다”라고 제언한다.
▶시, 그림 같은 소설, 외고집 없어야할 문학= 4060세대는 문학수업과 대입 시험때를 기억한다. ‘시는 언어의 조탁으로 아름답게 본질을 표현하는 것, 수필은 붓나가는 대로 쓰는 것, 논설은 기승전결 논리적으로 타인을 설득시키는 글, 소설은 실화가 아닌 것을 드라마틱하게 전개해 메시지를 담는 글’이라는 식의 기계적 배움이었다. 하지만 기승전결 없는 시와 수필이 없고, 건조체로만 쓰여진 소설이 없으며, 화려하거나 부드럽지 않은 논설의 감동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른으로 성숙되면서 알게되었다. 일제식 도식적, 기계적 분류는 얼마나 부질없고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맹렬하고도 폭 넓은 취재와 관찰,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 발견한 것을 체화(體化)하는 과정을 기반으로, 가산 이효석이 정립한 문학철학은 어쩌면 멋과 맛이 있으면서도 가슴 뜨겁게 메시지를 전하던 한국의 수천년 전통 시문과 닿아있는 듯 하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구절엔 그의 문학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즘생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왼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얗다.’
그의 시 같고, 수필 같은 소설은 마치 풍경 한 폭으로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를 보는 듯, 사람의 마음을 설득시킨다.
▶가을을 여는, 메밀 바다 위 효석문화제= 평창효석문화제가 오는 9월 6일(금)부터 15일(일)까지 평창군 봉평면 이효석문화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가산 이효석을 기념하는 문화제뿐 아니라 문학마당, 전통마당, 자연마당으로 구성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특별한 추억여행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올해 평창효석문화제는 문학프로그램을 강화하면서 예술, 정치, 음악, 코미디 등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를 모아 듣고, 토론하고, 창작하는 ‘문학미식자연주의’ 축제로 기반을 구축해나갈 계획이다.
평창군이 가산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면서, 축제가 일신 우일신하고 있다. 봉평 메밀밭 흰 물결 위로 가을이 찾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