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편 114. 존 싱어 사전트
‘셀럽 섭외’ 아름다운 초상화의 비밀
회심의 작품이었는데…
욕이란 욕만 다 먹었다?
<동행하는 작품>
마담 X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편집자 주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3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셀럽'을 그린 진짜 속마음
"부인. 제가 당신을 그려도 되겠습니까?"
1882년께, 프랑스 파리의 파티장. 화가 존 싱어 사전트가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 부인에게 곧장 다가가 물었다. 당시 사전트는 스물여섯 살, 고트로는 스물둘 나이였다. 사전트의 갑작스러운 말에 고트로는 물론,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함께 놀랐다. 고트로는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였다. 새하얀 피부가 매혹적인 미인이었으며, 남편을 두고도 남자가 끊이질 않는 팜 파탈의 여인이었다. 고트로는 눈에 띄는 외모는 물론, 옷도 잘 입고 교양까지 갖췄다. 그러니 어딜 가도 빛을 뿜었다. 진작부터 원로급 화가 등 많은 이에게 모델 제안을 받았지만, 돈과 인기 모두 아쉬울 게 없어 이를 족족 거절하곤 했다. 사전트는 이제야 주목받는 신예 화가였다. 그런 그가 당시 사교계의 가장 새침한 별에게 당돌히 손을 내민 것이었다.
"사전트 씨. 죄송해요."
고트로는 사전트의 제안을 뿌리쳤다. 악수도 제대로 하지 않고 물러섰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손하지만 매몰찬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전트도 물러나지 않았다.
사전트는 그녀, 그녀가 만나주지 않으면 그녀 이웃과 친구, 지인을 설득하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그려주겠다"는 식의 약속도 거침없이 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그 또한 그녀의 단아함에 푹 빠지고 말았을까. 물론 사전트도 고트로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사실 사전트는 다른 마음도 품고 있었다. 막 수면 위로 떠오른 사전트는 당장 더 빨리 제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그의 장기는 초상화였다. 가장 '핫'한 인물을 기가 막히게 그린다면 곧바로 더 주목을 받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오늘날 슈퍼스타로군.
사전트는 그 대상을 찾던 중 고트로를 봤고, 이러한 확신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매달린 것이었다. 사전트의 집념에 고트로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둘 다 당시 파리에선 흔치 않은 미국 국적 소유자였는데, 이러한 접점을 찾은 후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는 설도 있다. "사전트 씨. 저는 전문 모델이 아니라 자세를 잘 잡을 수 없어요. 일정이 많으니 하루에 시간을 많이 내지도 못해요." 고트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도 괜찮다면…. 좋아요. 저를 그려보세요." 이번에는 고트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때는 사전트도, 고트로도 몰랐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그림이 그해 최대 문제작이 될 줄은.
비난·조롱…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전트는 이 그림에 생을 걸었다.
사전트는 고트로를 놓고 스케치만 30점 넘게 그렸다. 사전트는 그녀를 세우고, 앉히고, 눕혔다. 앞을 보게 하고, 옆으로 틀기도 하고, 뒤로 완전히 돌려세우기도 했다. "최고로 아름답게 그리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고트로 또한 출퇴근하듯 긴 기간 작업실을 오갔다. 그가 요구하는 포즈를 취하다 보면 온몸에 쥐가 나기 일쑤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부인. 작업을 마쳤습니다. 이걸 살롱전(展)에 내면, 우리 둘 다 각자 영역에서 더 유명해지겠지요." 사전트는 확신했다.
실제로 사전트의 그림 속 고트로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사전트가 고른 그녀 얼굴은 옆모습이었다. 날카로운 콧날과 긴 목선이 드러나는 구도였다. 사전트가 장고 끝에 택한 옷은 깊이 파인 검정 새틴 드레스였다. 이는 도자기 같은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이런 가운데, 그가 특히나 신경을 쓴 건 그녀의 도도한 표정이었다. 사전트는 그녀의 우수에 찬 눈빛과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했다. 속살이 훤히 보이지만 천박하지 않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지만 헤퍼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고 싶었다.
사전트는 이 그림을 1884년 살롱전에 당당하게 출품했다.
당시 살롱에선 초상화 주인공의 이름을 내보이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기에 제목을 〈마담 X〉로 달았다. 많은 이는 진작부터 '마담 X'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드디어 전시의 막이 올랐다.
사전트는 〈마담 X〉가 엄청난 그림으로 인정받는 일을 의심치 않았다. 역시나 그의 작품 앞에 사람이 잔뜩 서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몰려있는 이들은, 〈마담 X〉에 대고 분노의 삿대질을 했다.
하나같이 가리키고 있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그림 속 고트로의 어깨끈이었다. 사실, 사전트는 〈마담 X〉 원작에선 고트로의 오른쪽 어깨끈이 밑으로 흘러내리는 것으로 그렸다. 그녀의 뇌쇄적인 면을 살포시 내보이는 비장의 장치였다. 그런데 그림 앞에 선 관객들은 이를 보고 "포르노 배우 같은 연출"이라는 식의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미운털이 한 번 박히자 공격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령 그녀의 흰 피부를 놓곤 "차라리 죽은 사람을 그려라!", 파격적인 드레스에 대해선 "뒷골목에서나 입을 법한 옷 아닌가!"라는 혹평을 내놓는 식이었다. "그 초상화 앞에 서면 (…)프랑스어로 된 모든 욕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비평가가 쓴 글이었다. 모르는 척 밤문화를 즐기던 사교계는 괜히 제 발이 저려 더 과민반응을 했을 것이다. 야유가 어찌나 심했는지, 원래 〈마담 X〉를 좋게 봤던 고트로의 어머니가 전시장에 찾아와 이따위 그림을 내려달라고 울며 호소할 정도였다. 사전트와 고트로 모두 이방인 미국인이었기에 더 강하게 '검열' 당했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다.
반짝이던 보석, 도망치듯 떠나다
사전트는 유명해졌다.
그의 바람과는 반대 방향으로 유명해졌다. 사전트는 살롱전 직후 〈마담 X〉 속 고트로의 어깨끈을 현재 전해지는대로 새롭게 그렸다.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렇게라도 뒷수습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문제아' 낙인은 그대로였다.
사전트는 〈마담 X〉를 팔지도 못했다.
정부 기관은 물론, 봉변을 맞은 격이 된 고트로 부인과 가족마저 값을 지불할 뜻이 없었다. 상처받은 사전트는 그림을 챙겨 파리에서 도망치듯 떠났다. 완전히 새로운 땅, 영국 런던으로.
전설의 옛 화가 작품 재해석…뜨거운 반응
사전트는 1856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다만 당시 유럽을 길게 여행하던 미국인 가정 밑에서 출생했기에, 그 또한 미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안과 의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언젠가 미 해군에 입대하길 바랐다. 그러나 사전트가 관심을 보인 건 그림이었으며, 사려 깊은 어머니 덕에 그 꿈과 소질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사전트는 1874년에 가족과 함께 파리로 왔다. 사전트는 유명 초상화가였던 카를로스 듀란을 스승으로 삼았다. 굳이 전통 기법에 집착하지 않는, 이보다는 세련된 방식을 구사한 예술가였다. 그는 클로드 모네 등 훗날 인상주의 무리로 불리게 될 이들과도 우정을 나눴다. 개성 있는 스승과 친구들은 사전트가 딱딱한 고전 화풍에 매몰되지 않도록 이끌었다. 가까운 미래, 〈마담 X〉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스승을 따라 초상화 그리기에 몰두한 사전트는 1882년,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로 명성을 얻었다.
스물여섯 살, 고트로와 처음 알게 된 그 무렵 완성한 작품이었다. 사전트는 친구 보이트의 네 딸이 아파트에서 자유분방하게 있는 모습을 그렸다.
자매 중 가장 나이 많은 14세 플로렌스와 12세 제인은 맨 뒷줄에 자리를 잡았다. 이 와중에 플로렌스는 지금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리고 꽃병에 등을 기댄 채 있다. 제인은 입을 살짝 벌리며 이도저도 아닌 표정과 자세를 한 모습이다. 플로렌스의 성깔, 제인의 유약한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들 앞에 선 8세의 마리아 루이사는 언니들보다는 협조적인 듯하다. 눈을 크게 뜬 채 팔을 뒤로 모으며 포즈를 취했다. 대담하고, 호기심도 많은 성향일 것이다. 편하게 앉아 인형을 쥔 4세의 줄리아는 꾸밈없는 천진난만함을 보여준다. 대부분은 이 그림을 놓고 "네 자매의 놀이(혹은 놀이 도중 화가가 등장했을 때의 놀란) 순간"이라고 했고, 일부는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수록 달라지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평가했다. 입체적인 분석이 이뤄진다는 것. 이 자체가 강점이었다.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17세기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사전트는 스승의 권유를 받고 스페인에서 벨라스케스를 공부했다. 그러니까,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은 〈시녀들〉을 참고해 그린 게 맞았다. 그런데 사전트가 워낙 재해석을 잘한 터라, 외려 그 부분 또한 매력 지점으로 작용했다. 사전트는 이 덕에 전도유망한 화가 반열에 올랐다. 사전트는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해줄 확실한 '한 방'을 바랐다. 그 꿈을 이뤄줄 최고의 모델을 찾던 중 고트로와 마주했다. 설득과 작업을 이어간 끝에 당당하게 내놓은 게 〈마담 X〉였다. 사전트는 유명해질수록 이를 어떻게든 시기하고, 무엇이든 문제로 삼으려는 적 또한 많아진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내가 너무 순진했어. 〈마담 X〉로 수모를 겪고 프랑스에서 벗어난 그가, 가까워지는 영국 땅을 보며 이런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전트는 런던 특유의 습습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어릴 적부터 여러 나라를 여행한 덕일까. 사전트는 변덕스러운 날씨의 이 섬나라에도 금방 정을 붙였다. 시간은 그의 상처를 착실히 보듬어줬다. 이제 지난 세월을 만회할 그림만 그리면 끝이었다. 그런 그는 뜻밖 장소에서 영감을 얻게 된다.
"젠장, 어리석군, 바보 같은 모습"…무슨 일?
"사전트 씨! 괜찮소?"
1885년 여름, 런던 템스강 일대. 미국 출신 화가인 에드윈 오스틴 애비가 사전트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애비 선생. 무슨 일이…."
"이제 정신이 드는가?"
사전트는 그제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꼈다. "저희는 분명 템스강에서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지요. 간만에 수영도 하고…." 사전트는 통증에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이 때문에 말을 더는 잇지 못했다. "그러다 바위에 머리를 박은 건 기억 못하오? 일찍 발견하지 못했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는데…. 상태를 보니 여전히 심상치 않구려." 애비는 사전트의 부어오른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전트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병원에 갔고, 그걸로 모자라 졸지에 요양까지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전트가 몸을 누인 곳은 런던에서 떨어진 시골 마을, 코츠월드의 한 집이었다. 도시와 관광지, 연회와 사교 모임에 익숙했던 사전트는 이곳의 평화로운 풍경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 동화책 삽화같은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었다. 분명 쉬러 왔지만, 도저히 쉴 수가 없던 것이었다. 사전트는 이번에는 고트로 같은 명사(名士) 말고 평범한 사람을 그리기로 했다. 고급스러운 벽지와 가구는 접어두고 짙푸른 나무, 다채로운 꽃을 옮겨담기로 했다.
사전트는 가을부터 바로 붓을 쥐었다.
그는 화가 겸 삽화가 프레더릭 버나드의 두 딸을 모델로 삼았다. 단정한 금발 머리의 두 소녀에게 흰색 원피스를 입도록 부탁했다. 그런 다음 이 마을의 또 다른 동료 화가 집 정원으로 데려갔다. 큼지막하게 잘린 천 조각 같은 백합, 소금 가루처럼 흩뿌려진 분홍색 장미가 가득 있는 곳이었다. 사전트는 11세 소녀 돌리, 언니와 마주 보고 있는 7살 소녀 폴리에게 동양식 등불을 줬다. 언젠가 템스강에서 본 등불 행렬이 아이디어가 됐을 것이다. 그는 포동포동한 빛 덩어리를 반딧불이처럼 신기하게, 소중하게 다루는 아이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그 결과, 사전트는 필생의 역작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를 내놓을 수 있었다.
작업 중 고생은 엄청나게 했다.
사전트가 이들을 그릴 수 있는 때는 9월부터 11월, 그중에서도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찰나뿐이었다. "매우 두려울 만큼 힘든 소재였어. 이 아름다운 색채를 그대로 재현할 수가 없어. (…) 특이하게 빛나는 꽃들과 연등, 풀잎…. 그 빛은 고작 10분도 지속되지 않아." 사전트는 여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부치기도 했다(앞서 사전트는 〈마담 X〉를 그릴 때도 '고트로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자신이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엄살이 좀 있는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전트는 2년을 꼬박 그렸다. 있던 꽃이 시들면 계속해서 새로운 꽃을 들였다.
고트로가 〈마담 X〉 모델로 힘든 시간을 보냈듯, 어린 돌리와 폴리 또한 느리고 고된 작업을 버텨야했다. 사전트는 당시 유행한 노래 가사를 참고해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란 이름을 붙였다. 작업이 얼마나 짜증스러웠는지 〈젠장, 어리석고, 어리석어, 바보 같은 모습〉이란 제목을 붙일 뻔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번에는 실력과 노력 모두 배신하지 않았다. 사전트는 1887년 영국 로열 아카데미에 이 그림을 출품했다. 많은 이가 몽롱한 색채,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뭉클한 구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전트는 영국 화단의 주요 화가로 곧장 자리매김했다.
사전트는 이 와중에 프랑스 살롱전에도 그림을 꾸준히 내긴 했다. 프랑스는 뒤늦게 반짝이는 보석을 내쫓았다는 걸 알고 후회했다. 사전트는 그의 동료들과 기고 등을 통해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됐다. 프랑스는 훈장 수여, 영국은 기사 작위 제안 등을 내세워 사전트에게 손짓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또 다른 한 나라도 이 경쟁에 가세한다. 그곳은….
'마담 X'는 어떻게 됐을까
미국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자신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그릴 화가를 찾고 있었다.
넓은 이마와 날카로운 눈, 단단한 턱과 굵은 목. 루스벨트에게는 분명 그런 면이 있었다. 하지만 동그란 안경과 얼굴, 보통 이상의 살집 등이 그 모습을 중화해 인자하고 '귀여운' 인상까지 안기곤 했다. 1903년, 사전트는 미국 백악관의 초청장을 받았다. 미국은 그의 정체성을 쥔 땅이었다. 그런 곳이 심지어 대통령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가 사전트와 모델 루스벨트 사이에선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전트는 악명높은 집요함을 내세워 루스벨트를 졸졸 따라갔다. 루스벨트가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많이 주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틈을 파고들어 습작을 여럿 그렸다. 하지만 한 점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다혈질의 루스벨트도 사전트에게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자네 문제가 뭔지 아는가? 자기도 뭘 그리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는 걸세!" 루스벨트는 끝내 사전트에게 쓴소리를 했다. "하! 포즈 한 번 못 잡는 대통령님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전트도 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루스벨트가 똑바로 선 채 계단 손잡이를 잡은 순간…. "대통령님. 그대로 계십시오.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사전트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재빨리 화구를 꺼냈다.
근엄한 표정, 당당한 자세, 야전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듯한 카리스마….
사전트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초상화〉는 이렇게 탄생했다는 설이다. 사실상 둘만의 사건이었을 만큼 구체적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루스벨트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사전트의 실력만큼은 인정했다고 한다.
사전트는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석유왕' 존 D. 록펠러 등 굵직한 인물의 초상화를 작업하는 등 꾸준히 승승장구했다.
사전트는 1918년께, 과거 그의 진가를 알아봐 준 영국과도 다시 손을 잡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화마가 휩쓴 시기, 사전트와 영국 정보부는 군인과 전장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로 의기투합했다.
이 시기 사전트의 대표작은 〈가스전〉이다.
높이 2m, 길이 6m가 넘는 이 대작은, 독일군의 가스 공격에 따른 피해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눈을 다친 두 군인 무리가 서로의 어깨를 붙잡은 채 걷는다. 앞도 똑바로 볼 수 없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 모두 독가스 때문이다. 말 그대로 죽음의 행진을 하는 셈이다. 언제 널브러져 시체와 빈사(瀕死) 상태의 동료 더미에 합류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전쟁의 잔혹함, 전투의 허망함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칙칙한 색과 노골적인 표현 등 사전트의 이전 그림과는 극명하게 다른 작품이었다.
어느덧 생의 말년에 들어선 사전트는 죽기 전 인류를 위한 사명감으로 이런 작업을 한 게 아닐까. 정재계의 굵직한 인물을 많이 만난 덕인지, 사실 사전트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와 국제 정세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사전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아이도 없었다. 독신 생활을 고집한 사전트는 1925년, 69세 나이로 영국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병이었다. 유화 900여점과 수채화 2000여점, 수많은 스케치와 드로잉을 둔 상태였다.
한편 사전트의 결정적 그림인 〈마담 X〉는 어떻게 됐을까.
이 그림은 고트로가 숨지고 1년 후인 1916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넘어간다. 스캔들 당시 사전트와 함께 도마 위로 오른 고트로도 평생 구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사전트는 미술관 담당자에게 이런 메모를 남겼다.
〈참고 자료〉
존 싱어 사전트와 마담X의 추락, 데보라 데이비스, 마로니에북스
Artist Series: John Singer Sargent, Elizabeth Prettejohn, Tate Publishing(UK)
John Singer Sargent, Susie Hodge, Lorenz Books
※신간 〈무서운 그림들〉이 정식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얼마 안 돼 중쇄에 들어갔습니다.
모두 독자님들의 응원 덕분입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