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편 115.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동행하는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뤼겐의 백암 절벽
얼음 바다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3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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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가 아닌 ‘방랑자’
바람이 낯설 수 있을까.
바람은 언제 어디서든 분다. 말하고 듣는 게 지쳐 넋을 놓으면, 읽고 쓰는 게 지겨워 창문을 열면, 걷고 뛰는 일이 지루해 잔디에 누우면 어느덧 솔솔 찾아오는 손님이다.
하지만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흔한 바람을 낯설게 느끼고 있었다. 엘베 사암 산맥을 걷던 프리드리히는 바위 언덕에 발을 딛자마자 한 번도 겪지 못한 경험을 했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공기 한 줄기가 빛을 가르며 다가왔다. 그것은 신의 입김처럼 성스러웠고, 거인의 메아리처럼 매서웠다.
거친 숨이 잦아들 무렵, 프리드리히는 눈을 크게 뜨고 세상과 마주했다.
그는 재차 숨을 가쁘게 몰아쉴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눈 앞에 펼쳐진 거짓말 같은 풍경 탓이었다. 양쪽에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같은 산이 나란히 서있었다. 이들 주변에는 서로 다른 사연을 품은 돌산과 언덕, 나무와 잡풀 따위가 마구 깔려있었다. 무엇보다도 경이로운 건 발밑 바다였다. 구체적으로는, 신의 입김같던 그 바람이 희끗희끗한 연기를 몰고 와 지배하는 안개 바다였다.
프리드리히는 순간 마취에 걸린 것 같았다. 자연의 경이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자연의 경이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들 산과 바람, 돌과 바다 앞에서는 한없이 작고, 연약하고, 덧없는 존재라는 깨달음뿐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이 날 이 순간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했다.
그는 한동안 묵혀둔 이 경험을 1818년께 그림을 그렸다. 마흔네 살 때였다. 그렇게 해 탄생한 게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였다.
화폭에는 금발 남성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남색 코트 차림으로 등장한다.
그는 바위 언덕에 올라 뒷모습을 보인다. 앞에는 산과 돌, 바람 틈으로 무섭게 몰아치는 안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웅장하고 숭고하다. 신성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몇몇 지점에서 의문이 든다. 프리드리히로 추정할 수 있는 이 남성은 왜 이런 모습일까. 감탄하는 표정과 자세를 한껏 드러내도 되지 않았을까. 무언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 뒷모습만 보이는 그에게선 뜻밖의 서글픔을 느낄 수 있다. 색채는 왜 이럴까. 장엄한 풍경을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더 밝은 색채를 써도 좋지 않았을까. 탁하기까지한 작품 속 일부 색 조합에서 뜻밖의 음산한 감정도 느낄 수 있다.
당당하게 세상과 마주 선 사내는, 알고보면 등에서 식은땀을 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처럼 그림에서는 복합적인 감정이 흘러나온다. 예쁜 풍경을 그저 예쁘게만 그릴 수 없는 것. 이는 단순히 프리드리히의 실력 부족 등으로 볼 수 없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죽음, 죽음, 또 죽음…트라우마의 시작
"형! 나 좀 구해줘, 제발!"
프리드리히는 발트해의 얼음 표면 아래 갇힌 동생을 보고 있었다. 쾅, 쾅! 스케이트 신발을 든 프리드리히는 이를 얼음 바닥에 대고 마구 찧었다. 긁히고 찢긴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흘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형… 형!" 동생은 입에서 물거품을 뿜으며 발버둥쳤다. 절규하던 동생은 이내 흰자위만 띄우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은 물속에서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프리드리히는 이 생각이 들 때쯤 잠에서 깼다. 또 그 꿈이었다. 어릴 적 동생이 얼음 호수에 빠져 죽은 기억은 수십년째 악몽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습관적으로 목을 만졌다. 죄책감을 못 이겨 극단 선택에 나섰을 때 생긴 흉터를 다시 긁었다.
프리드리히는 이처럼 평생을 음울한 트라우마에 절여져 있었다. 이 사고는 앞서 그가 열 세살이 된 1787년께 벌어진 일이었다.
그해 겨울, 당시 몇 뼘은 더 작은 소년이었던 프리드리히는 동생과 함께 얼어붙은 발트해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와 동생 사이 얼음이 조금씩 찢어지고 있다는 걸. 프리드리히가 먼저 깨진 틈으로 비틀거렸다. 패닉에 빠진 순간 그를 향해 몸을 던진 게 동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프리드리히를 구한 동생은 정작 자기는 힘이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원래는 내가 죽고 그 아이가 살았어야 했어…. 프리드리히는 평생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프리드리히에게는 동생의 허무한 죽음 말고도 심장을 찌르는 트라우마가 여럿 있었다.
1774년 독일 그라이프스발트에서 출생한 프리드리히는 1782년 여덟 살에 이미 어머니를 잃었다. 사인은 천연두였다. 이후에는 두 누나가 병에 걸려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동생마저 얼음에 갇힌 채 눈앞에서 그렇게 죽고 만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연타를 맞은 셈이었다. 그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상실감에 푹 젖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의 삶과 그림에 은근한 긴장감, 은은한 처연함이 관통하게 된 까닭과 무관치 않을 터였다.
‘문학적’ 풍경화의 탄생
"자연은 신의 계시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인 프리드리히가 특히나 풍경화에 관심을 둔 데는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는 한 종교학자의 가르침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원래도 루터교의 신실한 신자였던 아버지 덕에 종교와 가까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비로운 풍경, 명상에 빠진 듯한 인물을 그리는 데 더욱 거부감이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1790년, 열여섯 나이로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다. 이어 4년 후부터는 코펜하겐의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예술 세계에 발 디뎠다. 그는 이 기관에서 16~17세기 플랑드르 화가의 풍경화를 공부했다. 프리드리히는 이 시기에 천둥의 신 토르, 숲속의 괴물 트롤 등이 등장하는 북유럽 신화도 접했다. 그의 그림에 문학 감성이 한 스푼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감동 아닌 ‘감상’의 그림
화가로서 프리드리히는 1808년 〈산중의 십자가〉로 처음 제대로 된 주목받았는데, 이 그림부터 심상치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이것은 교회 제단화다. 다만, 보통의 제단화와는 결이 다른 모습이다. 갈비뼈를 훤히 보이는 예수가 그만큼이나 앙상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죽어가고 있다. 검붉은 핏기가 도는 듯한 구름,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처럼 뾰족한 전나무, 을씨년스러운 바위산이 화폭의 전부다. 성모 마리아도, 아기 천사도, 제자도, 심지어 예수를 괴롭히는 병사도 보이질 않는다. 그런 만큼 초기에는 "풍경화가 교회로 은근슬쩍 숨어들어 제단 위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 이는 조롱이자 비난이었다.
그런데, 이 적막한 그림은 보면 볼수록 여운을 안겼다. 황량한 풍경 앞 예수의 심경이 돼 지난날을 돌아보게 하고, 황량한 풍경 위 예수를 바라보는 심정이 돼 앞으로 살아갈 날도 생각하게 했다. 마냥 예쁘지도, 무작정 눈물을 자극하지도 않는 〈산중의 십자가〉는 마음 속 무언가를 뭉근하게 만들었다. 즉, 이 그림은 감동 아닌 감상을 안기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프리드리히의 추종자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유의 밀도감으로 뒷심을 발휘한 격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산중의 십자가〉를 완성한 그해부터 〈바닷가의 수도사〉도 작업했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화폭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늘과 구름, 거인의 실핏줄처럼 엉킨 안개다. 회색 덩어리와 맞닿은 바다는 발이라도 닿는 순간 온몸을 얼음장처럼 만들 것이다. 하늘과 바다, 물결의 흰 거품 모두 곧 폭풍우가 몰아친다는 걸 예고하는 듯도 해보인다. 그리고 그 앞, 모래 언덕 위에 수도사가 있다. 수도사는 이 엄청난 광경 앞에서 하찮은 미물이 돼버렸다. 그렇기에 이 작품 또한 거룩하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여름이 되면 종종 찾았던 뤼겐섬을 배경으로 삼았다. 원래는 별도 그리고, 작은 배도 두어 척 그려봤다. 처량한 분위기가 옅어지는 듯해 다 지우고, 지금 상태로 뒀다는 후문이다. "(…)무한하고 균일한 공간 앞에서 눈꺼풀이 잘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심상을 봐야 한다”
프리드리히는 풍경화를 주력으로 그렸지만, 그렇다고 해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만 그리지는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작업하기에 앞서 반드시 숙성 시간을 가졌다. 눈으로 본 모습과 마음의 눈으로 본 이른바 심상을 버무리는 기간이었다.
그가 40대 중순에 그린 대표작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도 그렇게 그린 것이었다. 산과 바위, 바람과 안개바다 풍경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독일 지르켈슈타인(Zirkelstein)산과 카이저크론(Kaiserkrone) 언덕, 체코 로센베르크(Rosenberg)산 등에서 본 놀라운 장면을 포갰다.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 동생의 허무한 최후 등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덧칠했다. 그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그린 그해 결혼식을 올렸는데, 사랑하는 아내 또한 불의의 사고로 떠나지 않을까하는 식의 불안도 덧발랐다. 이에 더해 '그럼에도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한다'는 식의 다짐까지 흩뿌렸다.
그 결과 감탄과 허무함의 감정, 아름다운 풍경과 암울의 굴레로 빠져들기 쉬운 정신 세계 사이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압축해 '낭만'이라는 추출물을 짜낼 수 있었을 것이다.
"화가는 자기 앞에 있는 것과 내면에서 본 것을 함께 그려야 한다. 내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앞에 있는 것 또한 그리지 말아야 한다." 그의 말이었다.
그림 속 뜻밖의 ‘하트’
프리드리히가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와 같은 해에 그린 〈뤼겐의 백악 절벽〉도 흥미롭다.
그해 프리드리히의 결혼 상대는 무려 열아홉 살(!) 연하의 여인 캐롤라인 보머였다. 염색업자 딸인 보머는 겸손한 성격의 여성이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가 신혼여행지로 택한 곳은 뤼겐섬이었다. 흩뿌려진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이미 몇 번이나 오간 독일의 대표 관광지였다.
프리드리히는 아내 손을 잡고 이곳의 가장 아름다운 절벽에 데리고 갔다.
아내는 그를 따라 성실히 바윗길을 올랐다. 그리고, 겹겹이 둘러싼 절벽 아래에서 발트해의 한 조각을 볼 수 있었을 터였다. 〈뤼겐의 백악 절벽〉을 보면 양 끝 두 나무의 가지가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다. 절벽은 스스로 발광체가 된 듯 반짝이고, 분홍빛을 품은 바다 또한 평화롭고 너그럽게 느껴진다.
정열의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발밑에서 무언가를 본 듯 손가락을 올린다. 프리드리히는 땅에 엎드린 채 아내가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좋은 날, 좋은 순간에 부부는 함께 같은 곳을 본다. 이 자체가 설레는 일이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맨 오른편에 자기 모습을 또 그렸다. 젊고, 강하고, 늠름한 이상적 모습으로. 이제 사랑의 힘으로 트라우마에 맞서보겠다는 것. 몸은 지쳐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이처럼 의욕이 넘치는 상태라는 것. 신혼여행 당시에는 그런 뜻으로 마음을 다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프리드리히는 2년 뒤인 1820년, 이번에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게르하르트 폰 퀴겔겐의 죽음과 마주했다. 프리드리히는 재차 슬픔과 인사했다. '잘 가라'는 안녕이 아닌, '또 너로구나'의 안녕이었다.
프리드리히의 그런 상태는 1822년에 그린 〈창가의 여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화폭에는 그의 아내가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창밖 맑은 하늘과 푸른 포플러 나무 숲을 보는 그녀는 왠지 외롭고 서글퍼보인다. 〈뤼겐의 백악 절벽〉에서 느낄 수 있는 그녀의 생기발랄함은 고작 4년 새 침울함으로 바뀐 모습이다.
당시 프리드리히는 강연과 그림 작업 등으로 수시로 집을 비웠다. 다시 우울증에 걸린 그는 집에 있을 때도 건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먼저 허전한 집을 가꿔야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칠했다. 아울러 가족에 이어 절친까지 잃어야 했던 그의 고독함도 이 뒷모습에 포개고 투영했다.
풍경화보다도 자화상
때로는 불행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존재가 있겠느냐는 생각도 한다.
우울함에 허우적대던 프리드리히는 1824년, 부교수로 있던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승진하지 못했다. 그토록 바란 정교수직에 오르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 나이는 쉰 살이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개성이야 있지만, 그 정도가 심해 학생에게 귀감이 될 수는 없다." 이런 혹평까지 직면했다. 모든 게 수명을 가지듯, 프리드리히의 세속적 성공마저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이었다.
〈얼음 바다〉.
프리드리히는 이 무렵 이 그림을 그렸다. 무자비한 북극 얼음이 배를 종이 구기듯 박살내고 있다. 난파선이 된 배는 품고있는 모든 걸 토하며 가라앉는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부빙은 서로 부딪혀 뾰족한 산을 이루기도 한다.
〈얼음 바다〉 또한 자연의 위대함을 절감할 수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역시나 이 안에는 먹먹함이 서려있다. 우선 〈얼음 바다〉라는 이름과 깨지고 찢긴 풍경 자체가 프리드리히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다. 말 그대로 '얼음 바다'에 잠긴, 그와 목숨을 맞바꾼 동생을 또다시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프리드리히는 원래 이 그림에 〈희망 호의 난파〉라는 제목을 붙였다. 잠시나마 품은 희망이 조각과 가루가 되고 있는 것.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건 죽은 자(가족)에 대한 죄의식, 살아있는 자(아내)에 대한 자책감, 꿈의 꺾임(승진 실패)밖에 없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즉 이 그림은 풍경화를 가장한 자화상일 수 있는 셈이다.
말년…‘낭만 그 자체’였던 삶과 그림
황혼이다.
노인이 발트해가 훤히 보이는 언덕 위에 섰다. 그는 지쳤을 터였다. 얼굴과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눅눅한 옷과 지팡이에 의지하는 자세로 볼 때 그럴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노인 앞에는 비교적 젊은 두 남녀가 보인다. 이들 사이에는 아직 아기에 가까운 두 꼬마가 자리하고 있다. 그림 속 노인은 어느새 노년기에 접어든 프리드리히다. 혈기왕성한 남녀는 그의 성숙한 조카와 딸, 어린 소년소녀는 그의 어린 아들과 딸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바다 위를 표표하게 떠다니는 다섯 척 배는 무슨 의미일까.
그간 삶의 여정을 표현한다는 게 지배적 분석이다. 다만 '순서'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혹자는 앞에 있는 작은 두 배를 소년기, 가운데 늠름하게 선 한 척을 청년기, 멀리 있는 두 척을 노년기로 본다. 누군가는 정반대로 수평선에 올라타 한창 항해하는 두 배를 소년기, 더는 갈 곳 없이 모래사장에 닿고 있는 배들을 완연한 노년기로 해석한다.
시선이야 어떻든, 어느덧 예순 살에 접어든 프리드리히가 '떠날' 준비를 하며 만든 작품이라는 건 확실하다. 우리는 이름 모를 배를 타고 왔으며, 또 그 녀석을 잡아끌고 미지의 세계로 항해해야 한다는 것. …인생은 이렇게나 덧없다. 프리드리히의 혼잣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의 말년작 〈삶의 단계〉다.
프리드리히는 예순한 살이 된 1835년에 뇌졸중을 겪었다. 온몸이 마비되는 후유증도 따라왔다.
프리드리히는 요양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프리드리히에게 곧 두 번째 뇌졸중이 엄습했다. 그도 이번에는 버틸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1840년에 사망했다. 당시 예순여섯 살이었다. 그는 드레스덴 공동묘지에 묻혔다.
프리드리히는 죽음과 함께 잊혔다. 세상은 프리드리히의 문학적 그림을 한물간 유행처럼 취급했다. 프리드리히의 음울한 표현, 현실과 상상을 섞은 풍경 등은 훗날 20세기 들어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주창자들 눈에 들어왔다. 그의 기구한 인생과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같은 밀도 높은 그림도 재평가를 받았다. 현대 미술의 시선에서 본 프리드리히는 삶과 작품 모두 낭만 그 자체였다. 그는 죽은 상태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신화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 또한 낭만이라면 낭만일까.
〈참고자료〉
501 위대한 화가, 스티븐 파딩, 마로니에북스
도취와 아이러니의 저 놀랍고도 끝없는 변화, 최문규,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Caspar David Friedrich, Bertsch, Markus, Graves, Johannes, THAMES & HUDSON
Caspar David Friedrich, Verwiebe, Birgit, Gleis, Ralph, Prestel Publishing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