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편 113. 히에로니무스 보스]
‘희대의 문제작’ 숨은 진실 추적
<동행하는 작품>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바보들의 배
건초 마차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3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그는 정말 악마의 대변자였을까
이것은 서양 미술사 최고의 문제작이다.
언뜻 봐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짐작이 가질 않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 표현했는지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오죽하면 악마의 대변자가 그렸다는 말까지 돌았을까.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폭화(Triptyque),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다.
왼쪽 그림은 그나마 잔잔해보인다.
왼쪽 작품을 밑에서부터 삼등분으로 나눠볼 때, 먼저 절대자와 벌거벗은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 이는 하나님, 그리고 그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이브를 소개하는 장면으로 여겨진다. 이들 근처에는 별별 기이한 형태의 생물이 있다. 우선 쥐와 고양이, 새와 토끼 등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 보인다. 아울러 머리 셋 달린 새, 말의 얼굴을 한 해마 내지 고래, 책 읽는(!) 오리너구리도 볼 수 있다. 뒤편에는 열매가 가득 맺힌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았다.
중간 부분에는 곡선미를 살린 분홍색 분수가 오뚜기처럼 섰다. 이번에도 온갖 새와 파충류, 곤충과 네발짐승들이 이 조형물을 중심으로 어우러져 있다. 자세히 보면 유니콘부터 흰색 기린, 투구게와 삼엽충이 섞인 듯한 괴생명체까지 활보하고 있다.
그리고 윗부분을 보면 이번에는 크고 작은 날짐승의 세상이다. 녀석들은 맨발의 난쟁이 호빗(Hobbit)이 살 듯한 움막, 창백한 색채의 평원을 넘나들며 마음껏 날갯짓을 하는 모습이다. 나체 남녀, 갓 빚은 듯 불완전해보이는 동물, 아직 완전히 무르익지 않은 푸릇푸릇한 초원…. 이 모든 게 태초의 에덴 동산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맨 오른쪽 그림은 맨 왼쪽 그림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는다.
이번에도 상중하 세 조각으로 잘라보면, 우선 가장 아래에선 감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참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수녀 옷을 입은 돼지는 한 사내를 끌어안은 채 코를 바짝 대고 있다. 길쭉한 코를 단 괴물은 앉은 자리에서 끝없이 무언가를 배설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다. 아울러 들짐승에 파먹히는 인간, 하프 줄에 묶인 인간, 꽂히고 꿰어진 채 버둥거리는 인간도 발견할 수 있다. 보다보면 이들의 비명이 들리는 느낌도 든다.
중간에선 한 사람의 얼굴과 반쯤 잘린 상체를 볼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보스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그 몸통 안에는 웬 악마 무리가 나란히 앉아있다. 한데 모여 어떻게 인간을 괴롭힐지에 대한 작당 모의를 하는 듯도 하다. 그림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강물에선 또 여러 인간이 여러 방식으로 깔리고, 눌리고, 찢기며 고통받는다. 식칼과 창, 밧줄 등 결코 유쾌해보이지 않는 도구도 즐비하다.
위에선 화마가 쓸고간 듯 황폐해진 전경을 볼 수 있다. 지옥에 떨어진 악마 루시퍼가 지은 궁전이 바로 이곳일 듯하다. 불과 매연이 가득한 이 일대에선 사람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덩어리가 쏟아지고 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다. 보스가 왼쪽 화폭이 에덴동산을 그렸다면, 이쪽 화폭에는 지옥을 표현했을 게 확실하다.
이제 삼면화 중 가운데 그림을 볼 차례다.
살굿빛 향연인 이 그림 또한 위와 중간, 아래의 구분이 선명하다. 밑에선 나체의 남녀가 축제를 즐기는 듯 어우러져있다. 유리구슬 안에서 서로를 보듬는가 하면, 털 달린 딸기를 곁에 둔 채 상대를 탐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들은 조개를 등에 업고, 물고기를 품에 안고, 신체 일부만 보인 채 기괴한 포즈를 취하는 식으로 난장판을 한껏 즐긴다.
여기서 시선을 한 칸 위로 올리면 더욱 충격적인 광경이 보인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네발짐승에 올라타 그저 내달리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사냥하는 양 복잡하게 뒤엉켰다. 연못에선 실오라기 하나 없는 또 다른 무리가 노래를 부르는 듯 자세를 잡았다. 주변에는 둥글게 모인 여러 무리가 무언가를 받들고, 찬양하고, 선보이고 있다. 위에선 궁전과 정원,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바다가 보인다. 마음껏 유영하는 사람, 마주보는 인어, 역시나 무언가를 쫓는 등 특이한 행동을 보이는 떼거리도 볼 수 있다. 웬만한 나무만큼 커보이는 초대형 딸기를 중심으로 모여앉은 인간들은 얼핏 봐도 특이하다.
하늘에선 용, 흰 날개를 단 생명체 등이 꽃과 열매를 형상화한 듯한 건물 위에서 떠다니고 있다. 왼편 그림과 오른편 그림이 각각 에덴동산과 지옥을 그렸다고 하면, 난잡한 이곳은 대체 어디를 형상화했을까.
이렇게만 따지면 이 그림을 그린 보스는 온전한 정신을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정말 본인이 악마의 계시라도 받았다고 본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그렸을까.
미스터리의 화가…뜻밖 ‘기록’ 있었다?
먼저 보스의 생애부터 짚어보며 '힌트'를 찾을 수밖에 없다.
사실 보스는 그의 그림처럼 미스터리를 몰고 다니는 예술가다. 보스는 무언가를 쓰고 남기는 일 자체를 꺼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정확히 언제 출생했는지, 스승과 제자는 누구인지, 고향 밖으로 여행이나 가본 적은 있는지, 무엇보다도 왜 그런 그림을 한 점도 아닌 여러 점을 그렸는지 등에 대해 속 시원한 그의 글과 어록은 없다. 동시대 인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강박에 가까울 만큼 기록으로 행적을 남긴 일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보스는 1450년께 네덜란드 남부 스헤르토헨보스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명은 '예로엔 판 아켄'이다. 당시 많은 이가 그랬듯, 그 또한 고향 이름을 따 보스를 성으로 썼다. 보스는 서른 안팎이었을 1479~1481년께 그보다 연상인 알레이트 고이아르츠 반 덴 메르베네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메르베네는 당시 엄청난 부자였다고 한다.
보스는 결혼할 무렵 이미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그는 아내의 재력까지 등에 업고 예술계에서 더욱 승승장구한 것으로 짐작된다. 보스의 세금 영수증을 보면 그가 당시 주민 중 손꼽힐 만큼 큰 금액을 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제 더는 아쉬울 게 없기에 보다 대담히 기괴한 그림에 손을 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보스의 생을 특징짓는 요소는 다름 아닌 종교다.
보스가 산 스헤르토헨보스는 일대에서 가장 큰 상업 도시였다. 사람이 몰리는 만큼 세를 넓히는 곳이 있었으니, 수도원 등 종교시설이었다. 보스 또한 독실한 신자였다. 보스가 이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 큰 종교단체 중 한 곳인 성모 마리아 형제회에 입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집단을 위해 온 가족이 봉사 활동을 하고, 여러 예술 작품을 만들어줬다는 다른 이의 글도 있다. 보스는 당연히 '인간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등의 교리를 믿었을 것이다.
경제적 발전을 일군 땅, 이러한 번영과 맞물려 골목길 곳곳을 깊게 파고드는 유흥과 환락….
보스는 이처럼 대책 없이 쾌락에 물드는 땅에 교리를 일깨우기 위한 그만의 방식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만약 '충격 요법'이라면…? 이게 보스의 작품을 해석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알고 보면 이 그림은…충격적 ‘반전’
그러니까, 보스가 외려 신의 음성을 전파하기 위해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그렸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악취미 내지 악마의 귀띔 따위로 작업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보스의 행적과 더불어 그의 다른 작품을 보면 이러한 부분에서 더욱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보스는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과 비슷한 시기에 〈바보들의 배〉도 그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좁은 배 위에 꾸역꾸역 올라탔다. 마주 보는 수도승과 수녀는 노래나 목청껏 부른다. 주변 인간들은 여기에 흥이 나는 듯 함께 입을 벌린 채 몸을 들썩이고 있다. 호리병에 든 탁한 액체는 술일 게 분명하다. 이들은 알코올에 잔뜩 취해선 주정을 부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한 남성은 여태 얼마나 마셨는지 토악질을 하고 있다. 칼을 든 채 돛대를 오르는 이, 나무 위에서 남은 술을 홀짝이는 이, 더 남은 건 없는지 접시를 든 이 모두 한심하게만 보인다.
보스는 중세 독일 인문학자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풍자시 〈바보들의 배〉를 참고해 이 같은 이름의 그림을 그렸다. 이는 아무리 가르치고, 아무리 인도해도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구제되지 않는 모습. 당시 시선에서 볼 때 그러한 상태 자체가 얼마나 큰 악행인지를 풍자하는 시였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각성하고 따르라. 그림 속 맹꽁이들처럼 아둔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면…. 보스는 〈바보들의 배〉를 통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그는 비루하고 추악한, 불쾌하고 너저분한 작품으로 보다 직관적으로 교의를 설파한 것이다.
보스의 〈조롱당하는 그리스도〉도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사내 넷이 핍박받는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다. 이들은 제목 그대로 그리스도를 놀리고 괴롭히는 데 이어, 아예 가시관까지 억지로 씌우려고 한다. 복장으로 볼 때 군인과 상인, 성직자와 다른 종교의 신봉자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같이 교만하고 비겁해보인다. 보스는 이 그림을 갖고서도 하고자 한 말이 있었을 터였다. 너는 그럼에도 참고 견디는 우아한 그리스도에 가까운가. 아니면 진작에 환락의 늪으로 빠진, 저 아무것도 모르는 잔당에 가까운가. 가령 이런 식의 메시지도 던지고 싶었을 것이리라.
‘희대의 문제작’도 새롭게 보인다?
이 지점에서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다시 뜯어보면, 이 그림 또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왼쪽부터 또 한 번 눈길을 주면, 여러 생명체가 조화롭고 풍요로운 분위기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 모두 순리대로 살고, 초원과 사막 식물 또한 각자 위치에서 특성에 맞게 공존하는 모습이다.
그다음 오른쪽, 지옥을 그린 풍경에 재차 시선을 옮기면 다시 시선을 끄는 게 있다. 보스의 얼굴이다. 그러고 보면 보스는 곁눈질을 하며 화폭 밖 관객을 보고 있다. 너도 이런 데 오고 싶니…? 곧 입을 열고 이런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아울러 제각각 고통받는 인간 또한 알고보면 나름의 인과응보에 처한 게 아닐까. 가령 수녀 옷을 입은 돼지에게 희롱당하는 이는 타락한 성직자, 악기에 매달린 이는 음주가무에만 몰두한 자, 짐승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는 사냥꾼, 주사위 밑에서 괴로워하는 이는 도박꾼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즉 이 그림 또한 죄를 짓는 순간 그토록 좋은 세상(에덴동산)에서 이토록 참혹한 지옥으로 갈 테니 조심하라는 식의, 일종의 설교가 담긴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앙 패널에 묘사된 곳은 어디일까. 이 지점을 놓곤 미술계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주장은 보스가 그의 현실 세계에 빗대 그렸다는 이야기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다음 세대 인간들은 중간 지대에 던져져 살아간다. 그런데 이들이 점차 쾌락에 젖어 잠식되고, 결국은 이러한 인사불성의 세상을 만들고 말았다는 게 핵심이다. 그림 속 조개와 물고기가 당시로는 육욕을 상징했다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나체 남녀가 떠받드는 딸기가 수많은 씨앗과 옅은 향기 등 특징에 찰나의 쾌락을 뜻했다는 설도 짚어볼 부분이다.
즉 다들 겉으로만 체면치레를 할 뿐, 지금 사회 또한 밤이 되고 골목길에 서면 그림 속 중간 지대와 다르지 않다는 것.
왼편의 낙원에서 쫓겨난 데 이어, 계속 이러다간 중간 세상에서도 쫓겨나 오른편의 지옥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보스가 이러한 경각심을 갖고 그렸다는 의견이다. 언뜻 보면 야하게만 보이는 이 그림이, 알고보면 이토록 숭고한 주제 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다만, 중앙 패널에 대해선 다른 분석도 꽤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게 이른바 아담파(派)설이다. 아담파는 고대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아담파는 초기 아담의 모습 같은 원시적 순수성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나체로 종교 행사와 같은 집단행동을 하는 등 벌거벗은 상태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보스가 그 시절 아담파에도 관여했다는 말이 있다. 아담파의 지향점을 알리고자 가장 목 좋은 자리인 한가운데 나체의 향연을 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선 구체적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다.
해석이야 어떻든, 충격적인 이 세폭화를 당장 닫아두고 싶은 충동도 들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천지창조의 셋째 날 모습을 담은 회색 조 세상이 새롭게 등장한다. 비눗방울 같은 수막(水幕)에 둘러싸인 평평한 땅의 모습이다. 여기선 왼쪽 위 구석에 작게 그려진 신의 모습이 가장 눈길을 끈다. 신은 시무룩해보이고, 낙담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양쪽 그림판 위에는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편 33:9)라는 글이 쓰였다. 이미 이뤄졌고, 진작에 견고히 섰던 세상이 이런 모습이 된 데 대해 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보스가 고요한 이 흑백 세계를 지옥의 다음 순서, 즉 모든 것의 종착지에 빗대 그렸다는 분석도 한다.
“세상 모든 건 건초 더미일 뿐”
수수께끼의 화가 보스가 선보인 대표적 말년작은 〈건초 마차〉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과 엇비슷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다. 왼쪽 그림은 또다시 에덴동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위에서부터 하느님에게 맞선 반역 천사들의 추락, 아담과 이브의 모습, 반역 천사의 명을 받은 뱀이 이들 둘을 유혹하는 장면, 결국 농간에 넘어가 쫓겨나는 상황 등이 순서대로 짜였다.
이다음 중간 그림에선 거대한 건초 마차가 압도적 존재감을 보인다.
구약성서는 덧없는 무언가를 풀에 비유하곤 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에는 "세상 모든 건 결국 건초 더미일 뿐"이라는 식의 속담도 있었다. 이 또한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화폭 속 건초 더미 또한 '쓸데없는 것'에 대한 대명사격으로 그려졌을 게 확실해보인다. 하지만 그림 속 사람들은 건초 더미에 홀린 듯 달라붙어 마른풀을 뜯고 있다. 갈퀴를 쓰고, 사다리를 쓰고, 바퀴에 깔리면서까지 삼매경이다. 뒤에선 왕과 교황, 귀족마저 북슬북슬한 이 마차를 따르는 중이다. 하늘에는 안쓰러운 표정의 그리스도가 있지만, 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과 가장 가깝게 닿은 무리마저 자기들끼리 놀고 즐기기에만 여념 없다.
밑에서도 웃기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뚱뚱한 수도사는 수녀를 시켜 건초를 챙기고 있다. 이와 함께 전문성이라곤 없어보이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 집시가 여인의 손금을 보는 모습, 마술사 복장을 한 수상한 남성이 한 꼬마에게 접근하는 모습 등 하나같이 심상찮다. 탐욕에 찌든 이들을 앞으로 인도하고 있는 건…. 괴물 무리다. 새, 사슴, 호랑이, 물고기 등 모습의 괴생명체들이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어디로? 바로 옆 오른쪽의 세상, 지옥으로.
지옥에선 악마가 사람을 한 명씩 맡아 각자 방식으로 고통을 주고 있다.
개 모습을 한 악마는 인간을 물어뜯고, 개구리와 물고기가 섞인 듯한 악마는 그냥 통째로 집어삼키는 식이다. 이 밖에도 꼬챙이로 몸 정중앙이 꿰인 죄인, 뒤집힌 채 살가죽이 벗겨진 죄인, 아예 쓰러진 채 기절해버린 죄인 등 대놓고 잔인한 묘사가 많다. 상당수 악마는 지옥 확장공사에 투입돼 벽돌을 쌓는 등 일을 하고 있다. 보스가 미련한 건초 더미 무리를 빽빽하게 그렸듯, 그의 시선에선 그 시절 지옥에 갈 것 같은 사람이 많았나 보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주제의식의 연장선으로 '이러다 정말 다 죽는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현재 보스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회화는 25~40점 가량이다. 전해지는 드로잉은 40여점이 있긴 하지만, 정확한 제작 날짜를 써놓은 건 없다.
보스가 온갖 기상천외한 동식물을 그린 건 때마침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보스는 입소문이든, 서커스단이든, 이동식 동물원이든, 신대륙에서 발견됐답시고 들여온 생소한 동식물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 대한 과장된 사진과 삽화도 접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했을 터였다. 보스는 생전에 신축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등 굵직한 의뢰도 여럿 맡았다. 보스는 그림 작업과 종교 활동 말고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 은둔자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알고 보면 누구보다도 독실했던 보스는 1516년에 사망한 것으로 성모마리아형제회 기록에 쓰였다.
이후 미스터리의 화가,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화가로 남은 보스는 20세기 들어서 재조명을 받는다. 보스의 상상을 초월하는 모든 표현법은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초현실주의 무리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어둠의 화가보다도 빛의 화가. 악마의 예술가보다도 신념의 예술가. 보스는 그에게 걸맞은 이름을 차츰 찾아가고 있다.
〈참고 자료〉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수수께끼, 세스 노터봄, 뮤진트리
히에로니무스 보스, 월터 S. 기브슨, 시공아트
Hieronymus Bosch, Brad Finger, Prestel Publis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