㉟ 경기도 여주 신륵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방생(放生)은 물고기, 거북이 등을 물에 풀어주는 행위로 불교의식의 하나인데 요즘은 무속인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다. 사람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 작은 생명을 살려줌으로써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는다는 방생의 의의는, 중국 수나라 때 천태종의 창시자 천태지의가 쓴 ‘금강명경(金光明經)’의 유수장자 편에 등장한다. 유수장자는 물고기가 물이 마른 늪에서 생명을 잃게 되자 두 아들과 함께 늪에 물을 채우고 먹을 것을 주어 물고기를 살려낸 이야기다. 그래서 옛이야기 중엔 물고기나 거북이가 자길 살려준 사람에게 보은하는 설화가 많다.
방생은 살생을 금하는 소극적인 선행을 넘어 적극적인 선업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영험함이 알려지며 동아시아에 널리 퍼졌다. 사찰에선 방생 행사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생태계 교란, 방생의 탈을 쓴 유기, 병원체 유입, 환경 오염 등 여러 문제가 제기되며 조계종을 비롯한 큰 종단에선 방생 행사는 금하고 본래 의미를 살린 헌혈 행사, 환경 보전 행사 등으로 등으로 대체하고 있다. 전통적인 방생은 이제 일부 무속인들의 전유물이 돼 가는 듯하다.
한때 방생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절이 여주의 신륵사였다.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 속에서 벗어나 강변에 위치한 절이어서다. 여강(남한강)을 따라 펼쳐진 경치가 빼어난 곳을 일컫는 여주팔경 중 첫 번째로 꼽히는 풍광을 자랑하며 여전히 방생의 의미를 살리는 법회가 해마다 열린다. 죽음에 처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최고의 선행이라는 방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여주 신륵사를 찾았다. 한국 불교 역사에서 최고의 고승(高僧)으로 꼽히는 나옹화상이 고려말 입적한 곳으로 유명해진 신륵사 강월헌 누각에 앉아 세상의 온갖 번뇌 망상을 흐르는 물에 흘려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하면서.
남한강변의 절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을 지난다. 나지막한 봉미산(157m) 끝자락 남한강가에 접해 있어 풍광이 빼어난 곳으로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다.
봉황이 날아드는 형상의 산 모양과 관련된 봉미산과 신라 때 원효대사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연못을 메우고 창건했다는 설화가 있어 용과 봉이 함께하는 명당자리인 듯하다.
신륵사(神勒寺)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건너 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신비한 굴레(勒, 마소의 머리에 씌워 고삐에 연결한 물건)를 씌워 얌전하게 다스렸다는 전설이 있다. 아마도 남한강의 거센 물결(용마)를 잡기 위해 창건한 절이었지 않나 싶다. 세종의 능(영릉)이 서울 내곡동에서 여주로 옮겨오면서 영릉의 원찰이 되었다. 덕분에 확장되면서 사찰명이 보은사(報恩寺)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며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에 신륵사라는 본래 이름으로 돌아왔다.
불이문(不二門)을 통과하자 바로 옆에 시원한 남한강 줄기. 건너편 강변 유원지에 정박해 있는 황포돛배가 보인다. 절에 영역에 우물터인 세심정이 있어 물 한모금 할까 했는데 말라 있었다. 신륵사는 건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독특한 느낌을 주는 절인데 좋게 보면 여백의 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범종각과 구룡루가 일렬로 있어 이를 지나니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아미타불을 모신 법당) 앞에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이 있다. 8~9층 정도 되지만 원형이 몇 층인지 잘 몰라 다층석탑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비율이 길쭉하고 다층임에도 높이는 3m쯤으로 아담한 축에 든다. 세종 영릉의 원찰로 지정된 성종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보전은 반듯하니 안정감 있게 아름다웠고 그 안에 모셔진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아미타불의 상체는 길쭉하며 머리털은 엄청 곱슬거리고, 옆에 협시 보살의 머릿결은 길게 허리까지 내려오는 등 독특하고 재미있다.
신륵사에는 600년 이상 된 보호수가 세 그루나 있어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세심정에서 강변 방향 오른쪽에 높이 22m의 수령 600년 된 은행나무와 32m의 600년 된 참나무 보호수 등 두 그루가 나란히 있다. 은행나무는 먼 옛날 나옹선사가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덕분에 갖은 소망을 적은 쪽지가 많이 매달려 있었다.
조사당 앞마당에도 600여년 이상 된 향나무가 있다. 은행나무 옆을 지나 몇 계단 오르니 보물 제226호, 10m 높이의 신륵사 다층전탑이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전탑은 벽돌을 구워서 만든 탑으로 중국탑 형식의 고려전탑이라 한다. 벽돌탑이 있다는 의미로 신륵사는 예전에 ‘벽절’(甓寺)로 불렸다고 한다. 다층전탑 위로는 보물 ‘대장각기비’가, 아래 남한강변에는 ‘삼층석탑’과 ‘강월헌’이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조선시대 문신 서거정은 강월헌을 찾아 나옹화상을 생각하며 ‘벽사(甓寺)’라는 시조를 남겼다.
나옹화상과 강월헌(江月軒)
극락보전 좌측 뒷마당에 600여년 된 향나무 보호수가 옆으로 넓게 퍼져 위용을 뽐내면서 조사당 앞을 지키고 있다.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데 향나무와 어우러지며 더욱 신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특이하게 정면은 한 칸, 측면은 두 칸인 구조에 내부 중앙에는 지공스님, 좌우에 무학스님과 나옹스님 등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불교계를 이끈 대표적인 세 분을 모시고 있다. 세 분은 스승과 제자이며 조사당 중앙에 목조상은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선사 상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로 시작하는 선시(禪詩)로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진 나옹화상은 불교계에서는 숱한 전설과 업적을 남기고 전국 각지에 흔적을 남긴 공민왕의 왕사였다.
출생지 경북 영덕에는 나옹화상 기념관이 있고 문경 묘적암으로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원나라로 가서 지공화상의 가르침을 받았다. 개성 신광사 주지를 지낸 뒤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호를 받고 순천 송광사에 있다가 회암사 주지를 맡았다. 이때 각 지역의 사찰을 중수·중축하였으나 하늘을 찌르는 인기 때문에 사대부들의 모함으로 탄핵되어 밀양의 영원사로 가게 되었다. 가던 중 병이 나서 이곳 신륵사에 머물다가 입적했다.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나옹에게 법을 전한 지공화상, 나옹에게 법을 이어받은 무학대사까지를 일컬어 삼화상(三和尙, 수행을 많이 한 고승)이라 칭하며 많은 절에 세 인물을 함께 그린 그림을 걸어뒀다.
조사당을 등지고 언덕길을 올라가니 나옹선사의 부도탑과 탑비가 있다.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제자 무학대사가 스승을 모신 곳인지라 명당일 듯하다.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정골사리를 봉안한 동그란 사리탑인 ‘보제존자 석종’은 보물 제228호로, 석종 앞에 사리탑을 밝히기 위한 석등은 보물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고 석종 옆의 넙적한 '보제존자 석종비'도 보물이다. 목은 이색(1328~1396)이 나옹의 사리 석종기를 썼다.
다층전탑 위쪽 언덕에는 보물 제230호 ‘대장각기비’가 있다. 고려 말 문신 이색(李穡)이 공민왕과 그 부모, 나옹화상의 명복을 빌고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하였으나 대장각은 찾을 수 없고 그 내력을 새긴 비석 ‘대장각 기비’만이 남아 있다. 다층전탑 아래 강변에는 삼층석탑과 강월헌이 풍류객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10m 높이의 다층전탑 아래 남한강에 맞대어 있는 강월헌은 나옹선사의 호(號)를 딴 정자로 선사 다비(茶毘)식 장소라고 한다. 여주팔경 중 첫 번째가 바로 ‘신륵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라는데 이곳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듣는 저녁 종소리를 상상해본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다보니 누각 처마에서 남한강으로 떨어지는 빗물에 실어 세상의 온갖 번뇌 망상도 흐르는 물을 따라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도 한다. 이곳은 일출 보기에도 좋은 자리라고 하는데 건너편 나루터 황포돛배가 오늘은 휴식을 취하는지 한가로이 정박해 있다.
도자기의 고장 여주
‘신륵사 관광지’라고 현판이 걸린 거대한 솟을삼문을 통과하면 도자기유통센터와 도자박물관, 도자문화센터, 생활도자미술관 등 온통 도자기와 관련된 시설들이 나타난다. 매년 5월이면 이곳에서 여주도자기축제가 열리는데 36년을 이어오고 있어 이천도자기축제와 함께 경기도를 대표하는 도자기축제로 자리매김했다. 경기도의 여주, 광주, 이천, 양평 네 곳이 도자기 산지로 알려져 있으나 특히 여주는 1000년의 도자기 명맥을 이어 전국 최대의 도자산업도시로 발돋움 중이다.
여주에서는 ‘여주 중앙리 고려백자 가마터’를 시작으로 여러 개의 가마터가 발견됐다. 도자의 고장으로서의 역사가 고려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600여 개의 도자 공장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도자기 수요가 급증한 계기가 신라말 고려 초 선종(禪宗) 불교가 발달하며 차 마시는 문화가 번성한 덕분이어서일까, 사찰과 도자 시설이 함께 동거하고 있다. 도자기 유통센터 앞 대형 주차장에서부터 느긋하게 구경하며 신륵사까지 걸어가는 것도 묘미가 있다. 상점마다 전시된 다양한 도자기 제품을 구경하고 전통 가마터도 살펴볼 수 있다.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미술관과 박물관에 들어가고, 넓은 공원의 회전하는 물레방아를 보며 걷다 보면 지루할 틈 없이 신륵사까지 갈 수 있다.
여주는 여강(남한강)을 중간에 두고 좌우로 펼쳐져 있어 그 경관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다. 서거정의 ‘벽사’와 정약용의 ‘밤에 신륵사 앞에다 배를 대고 등대에 올라’ 등 많은 이들이 이곳에 대한 시를 남겼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과 소현왕후를 합장하여 모신 세종대왕 영릉이 신륵사 맞은편 위쪽 강가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4대 나루 중 이포나루(여주 최상류 지역)와 조포나루(신륵사 내 황포돛배 나루터)가 있는 여주 여강에는 사람과 물자를 수송하며 교역이 번성했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관광선으로 변신한 황포돛배가 신륵사, 영월루, 세종대왕 영릉을 왕복하며 유람하고 있다.
“강월헌은 나옹(보제)이 머물던 곳인데 그의 몸은 이미 불에 타 없어졌다. 그러나 강물과 달빛은 예전과 같다….”〈이색, ‘여강현 신륵사 보제 사리석종기’ 중에서〉
신륵사와 연이 깊은 나옹화상과 이색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불가와 유가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나옹은 유배길 여강 강월헌에서 생을 마감했고 이색은 이성계가 보낸 독배를 마시고 나옹 입적 후 20년 뒤 여강의 배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길이 다르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나옹과 이색은 다른 길을 걸었음에도 아이러니하게도 출생과 죽음을 같은 곳에서 맞이했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