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감소에 신도시 곳곳서 학교 설립 갈등
여전히 ‘초품아’ 인기인데…설립 무산 속출
학교 신설 소극적 교육부…5년간 60% 허가
[헤럴드경제=박혜원 기자] #.‘유·초·중·고 도보 통학으로 마음이 놓이는 안심 교육환경.’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A(49)씨가 경기도의 한 아파트 단지 입주를 선택한 건 이같은 분양 홍보 홈페이지의 문구 때문이었다. 경기도교육청 홈페이지에서도 2027년 아파트 단지 내 중학교 설립을 목표로 한다는 공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후년인 2026년 말 입주를 앞두고 있는 A씨는 최근, “학교 설립이 불투명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학생 배치 계획이 불확실해 설립 계획을 2028년으로 1년 늦추고, 이마저 교육부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 A씨는 “자녀가 사춘기라 예민한 시기에 학교를 3곳이나 옮겨다녀야 할 상황”이라며 “직장 통근이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교육 때문에 왔는데 억울하다”고 말했다.
‘초품아’ 사라진다…‘역대 최대’ 둔촌주공마저 학교 무산 위기
인구 감소 여파 속에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 단지)’가 사라지고 있다. 학령기 자녀를 둔 신도시 아파트 입주자들이 가장 먼저 꼽는 조건은 ‘학교 용지’, 즉 학교 설립 계획이 있느냐다. 그러나 정작 이를 보고 입주 계약까지 치른 뒤에는 정부로부터 설립 승인조차 받지 못해 낭패를 겪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교육부는 학령 인구가 줄어 학교 신설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A씨와 같은 사례는 현재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역대 최대 규모 재건축 단지로 불리는 서울 강동구 올림픽파크포레온(둔촌주공)이다. 당초 서울시교육청은 2014년 재건축조합과 기부채납 협약을 맺고 초·중학교, 유치원을 짓기로 했는데, 2020년 교육부가 ‘부적정’ 통보를 했다. 학령 인구 감소로 설립 수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시교육청은 둔촌주공에 분교 개념인 ‘도시형 캠퍼스’를 세우기로 하고 내년 4월 교육부 중앙투자심사에 다시 상정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현되더라도 이미 주민들의 피해는 이미 불가피하다. 내년에 심사를 받으면 실제 개교는 2029년이라, 5년의 공백은 학생들이 감수해야 한다.
울산의 신규 아파트 단지 다운2지구의 입주자 장다혜(35)씨도 초등학교 설립 계획을 보고 계약을 치렀다. 그러나 울산교육청에 따르면 이곳에 설립될 예정이었던 초·중·고등학교 총 3곳은 아직 교육부 심사조차 받지 않은 상태다. 장씨의 자녀 계획은 크게 어그러졌다. 장씨는 “자녀 계획이 있어, 이곳에서 자녀가 대입 때 농어촌 학생 전형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예비 남편과 이야기를 마쳤는데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통상 아파트 택지를 개발하기에 앞서 건설 업체들은 교육청과 협의해 학교 용지를 확보하는 과정을 거친다. 아파트 신설 승인 후 분양 계획까지 나오면 이를 토대로 분양 홍보가 이뤄지는데, 실제로 학교가 지어질지 여부는 이 단계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즉 교육부의 중앙투자심사는 학교 설립 계획을 포함한 내용이 입주자들에게 이미 홍보돼 계약까지 마친 뒤에야 이뤄진다.
이렇듯 부실한 절차 속에 학교 설립을 둘러싼 갈등이 속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초품아 수요는 높다. 아파트 매수자 연령대가 대부분 학령기 자녀가 있는 30~40대인 영향이다. 한국부동산원 청약홈 아파트 경쟁률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전국 1순위 청약 경쟁률 상위 10곳 중 6곳은 초등학교 반경 300m 이내에 있는 ‘초품아’ 단지였다.
5년간 60%만 심사 통과…신설 소극적 교육부
정작 교육부는 학교 신설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5년(2020년~2024년 상반기) 초·중·고등학교 342곳이 교육부에 중앙투자심사를 의뢰했는데, 이중 60.2%(206건)만이 통과됐다.
연도별로 보면 의뢰 건수 자체도 줄어들고 있다. 2020년엔 75건 중 34.7%(26건), 2021년엔 89건 중 49.4%(44건), 2022년엔 105건 중 72건(68.6%), 2023년엔 54건 중 85.2%(46건), 2024년 상반기엔 19건 중 18건(94.7%)이 심사를 통과했다. 통과 비율 자체는 높아졌지만, 이는 교육부 자체적으로 컨설팅을 강화해 애초에 부실한 계획은 심사를 받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게 교육부 설명이다.
예컨대 한 차례 중학교 설립이 무산된 A씨 입주 단지 학교 설립을 의뢰한 경기교육청의 경우, 아파트 단지에 입주하는 학생 규모가 목표에 못 미쳐 ‘조건부’ 설립 허가를 받았다. 향후 학생 규모가 충족되면 다시 심사를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경기교육청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현재 입주한 곳의 중학생은 100명이 안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학교 신설 문턱이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에 지난해 300억 미만의 소규모 학교는 심사를 면제하는 등 기준을 완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령 인구 등 요인을 여전히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투자 심사는 재정이 많이 수반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심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