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편 110. 카미유 피사로]
<동행하는 작품>
흰 서리
빨래를 너는 여인
겨울 아침 몽마르트의 거리
편집자 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아버지같던 화가…‘인상주의’ 대부가 되다
"살롱전(展) 심사위원들 말이오. 그놈이 그놈인 그림만 뽑는 행태가 점점 심해지고 있소."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 인근의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 예술가 무리가 잔을 쥔 채 불만을 토로했다.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젊은 화가는 에두아르 마네를 중심으로 모였다. 에드가 드가와 몇몇 예술가는 이들과 살짝 떨어진 채 이따금 고개를 내밀었다.
"늘 같은 주제, 비슷한 기법과 구도만 받들고 있으니 말이오. 이래선 발전이 없소."
"맞는 말이오." 어디선가 흘러나온 말에 많은 이가 호응했다. "보불(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죽은 제 친구,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항상 '새 예술을 위한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고 했지요." 이번에는 모네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아이디어…. 그 말에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당장의 살롱전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고 한들, 대안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침묵이 깔리는가 했지만….
"나도 생각을 해봤소."
카미유 피사로. 까끌한 회색 수염을 길게 기른 화가가 정적을 깼다. "나는 우리가 살롱전에 맞서 완전히 새로운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오. 필요하면 내가 직접 나설 생각이오." 그가 작심하고 한 말이었다. "피사로 선생이 그런 뜻이라면…. 같이 힘을 보태겠소." "저도 피사로 선생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새로운 시도에 주저하던 여러 예술가가 이 남자의 구상에 곧장 지지를 표했다. 다만, 다른 어떤 이도 아닌 '피사로가 주도한다'는 조건으로. 전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1874년 4월 15일.
피사로를 정신적 지주로 둔 무명 예술가 협회가 그들만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에는 드가, 모네와 르누아르, 별종 폴 세잔과 홍일점 베르트 모리조 등 30여명이 참여했다. 살롱전에선 볼 수 없던 그림이 줄줄이 내걸렸다. 가령 모네의 〈인상, 해돋이〉, 르누아르의 〈극장 박스석〉 같은 흐릿한 선과 색채를 품은 작품들이었다. 이날 이곳에서 19세기 후반 미술계를 강타할 '인상주의'라는 말이 태동한다. 하지만 이는 후세의 평가일 뿐, 당시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야심차게 문을 열었지만 방문객도 하루 백 명도 되지 않았다. 찾아온 이들도 그림을 보고 낄낄대기에 바빴다. 애초에 '인상주의'라는 말 또한 "대상의 인상만 대충 그렸다"는 식의 조롱일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젠 '인상주의 단체'로 불리기 시작한 이 모임은 곧장 위기를 맞았다.
많은 이가 시작부터 용기를 잃었다. 툭툭대는 드가는 그의 뜻과 상관없이 여러 갈등을 불렀다. 르누아르와 알프레드 시슬레 등은 차츰 다시 살롱전에 관심을 보이며 와해를 자극했다. 음침한 그림을 자주 그린 세잔을 놓고선 "저 사람을 내쫓지 않으면 내가 관두겠다"는 목소리가 크게 일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인상주의 단체는 그러고도 12년간 전시를 이어간다. 개성이 강하고, 고집도 센 이들이 한데 모여 이렇게나 명맥을 유지한 건 기적이었다. 이 또한 피사로의 공이 컸다. 피사로는 12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전시에 참여한 무이한 화가였다. 통통 튀는 여러 예술가를 섭외하고, 다독이고,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수많은 이가 "피사로 선생. 내가 당신 때문에 하는 거요!"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오죽하면 그 까칠한 세잔마저 피사로에 대해선 "그는 내 아버지 같은 존재"라며 칭송했다.
피사로는 이들과 첫 전시를 열기 1년 전인 1873년에 자화상을 그렸다.
마흔세 살 나이치곤 꽤 늙어보이는데, 이 부분이 외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부드러운 눈빛을 품은 두 눈, 푸근한 노인이 연상되는 풍성한 수염,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뒷배경은 단 하나의 문장만 떠올리게 한다. '이 사내는 마음씨가 따뜻하겠구나'라는 게 그것이다. '선하신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불렸던 남자. 훗날 피사로가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숭배받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윌리엄 터너의 ‘빛’을 포착하다
피사로는 1830년 당시 덴마크령이었던 버진아일랜드에서 출생했다.
피사로는 열두 살에 파리로 와 기숙학교 생활을 했다. 그가 가장 열정을 보인 건 그림 그리기였다. 이후 고향에 돌아가 집안일을 돕던 그는, 스물다섯이 된 1855년에 화가 꿈을 안고 파리 땅을 다시 밟았다. 피사로는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와 스위스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붓을 쥐었다. 그의 작품관 정립을 도운 이는 당시 60대에 접어들고 있던 원로 화가 카미유 코로였다. 특유의 서정적인 인물화와 풍경화로 마니아를 거느린 코로가 그에게 강조한 건 간결했다. "자연에 충실하라." 햇빛 아래에서 직접 보고 그리라는 얘기였다. 예술가 대부분이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던 시기, 코로는 외광의 효용성에 눈 뜬 극소수의 대가 중 한 명이었다. 코로가 피사로에게 당부한 이 말은 훗날 인상주의 화풍의 정신이자 차별점으로 자리매김한다.
코로는 피사로의 인생관에도 큰 영향을 줬다.
코로는 상대가 누구든 찾아오는 이를 반겼다. 삶과 미술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피사로는 그 관대함을 기억했다. 언젠가 자신 또한 그런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피사로는 코로의 격려로 살롱전에 도전장을 냈다. 그 결과 1859년, 스물아홉 나이에 입상의 영광도 안을 수 있었다. 당시 뽑힌 그림은 〈몽모랑시에서의 피크닉〉이었다. 은은한 색감의 빛과 그림자, 한쪽에 모여앉은 사람들의 평화로운 한순간…. 피사로는 이런 온화한 풍경, 훈훈한 장면 그리기를 즐겼다. 그의 인간성과 앞으로 뻗을 작품세계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피사로는 1860년대 초 몇 차례 탈락도 경험했다. 1863년에는 마네 등과 함께 이른바 '낙선전'에 참여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후로는 상당 기간 작품 한 점씩은 매번 살롱전에 걸 수 있을 만큼 좋은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 피사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낙선전에 기꺼이 참여한 이력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새로운 일과 경험을 받아들이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피사로는 신선한 화풍, 참신한 기법에 늘 목말라 있었다.
그런 피사로는 의도치 않게 낯선 환경에 놓였다. 그의 뜻과 상관없이 각성의 순간을 맞았다.
1870년, 통일 독일을 꿈꾼 프로이센(왕국)과 이를 막으려는 프랑스(제2제국) 사이 기어코 포탄이 불을 뿜었다. 보불전쟁의 시작이었다. 상당수 파리 시민은 삽시간에 도시 외곽까지 닿은 프로이센군을 보고 피난길에 올랐다. 피사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당시 그의 국적이 덴마크로 명시돼있어, 입대하려 해도 자격이 없었다는 말도 있다.
피사로가 향한 곳은 영국 런던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마주하고 감동했다. 특히 정형화된 아카데미 양식에 매달리지 않은 터너의 풍경화는 큰 충격을 안겼다. 가령 빛 한줄기에도 다양한 색이 포개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빛의 밀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해와 구름, 눈과 비의 한 장면을 포착하는 기법도 체화했다. 피사로는 터너의 방식을 공부했다. 파리의 폐쇄적인 살롱전에선 먹히지도 않을 기법인 걸 알았지만, 그는 이 화풍이 회화의 미래가 될 것으로 믿었다. 그의 가슴에 인상주의의 씨앗이 심어진 기간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 피사로처럼 런던에서 터너를 공부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모네였다. 1871년에 피사로는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하나씩 받는다. 전자는 전쟁이 생각보다 빨리 잠잠해져 파리로 곧장 돌아갈 수 있다는 것, 후자는….
그림이 깔개·앞치마로…1000여점 잃었다
파리 작업실로 돌아온 피사로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피사로는 몇몇 야만적인 군인들이 그의 그림을 깔개로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아가 땔감, 짐승 도살용 앞치마 등으로 사용했다는 점 또한 확인했다. 두고 간 작업물 1000여점 중 성하다고 볼 수 있는 게 고작 40여점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간 그림으로만 먹고살았으니, 사실상 전 재산을 날린 셈이었다.
그런데 동료 예술가의 상황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령 자진 입대했던 드가는 소총 사격 중 하필 눈을 다쳤다. 부상 정도가 심상치 않은 듯 보였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형제처럼 지낸 바지유의 전사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이 밖에도 많은 이들이 가족과 친구, 재산과 건강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피사로는 다시 붓을 들었다. 영국에서 얻어온 새 기법을 펼쳐봤다. 빛이 내리쬐는 한순간을 낚아채는, 당시 파리에선 생소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그 방식이었다. 이 무렵 피사로의 대표작은 〈흰 서리〉다. 그림 속 농부와 하늘, 나무 모두 빛에 젖어 일렁이고 있다. 흐릿한 윤곽선 덕에 외려 더 부드러운, 햇살에 반사되는 듯한 은은한 빛깔 덕에 더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나 살롱전 심사위원들은 이를 예쁘게 보지 않았다.
피사로에게 호응하는 쪽은 진작에 살롱전과 척을 진 문제아들뿐이었다. 이들은 곧 카페 게르부아 등에 모여 작당 모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피사로가 구심점이 돼 1874년에 역사적인 첫 인상주의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이었다. 나아가 그가 수시로 단체 구성원을 불러 모아 밥을 사고, 술도 사주면서 12년간 생명을 이어간 것이었다. 사실, 인상주의가 끝끝내 빛을 보게 된 데는 피사로의 이러한 노력도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진짜 인상주의의 대부는 그 누구도 아닌 피사로였다는 말이 이어지는 까닭이다.
두 거장을 발견해낸 ‘거장’
피사로가 그 상냥한 심성으로 일군 굵직한 성과는 더 있다. 그것은 폴 세잔과 폴 고갱의 발견이다.
젊은 시절 세잔은 '왕따'와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살갑지 않은 성격과 꾀죄죄한 행색, 어두침침한 그림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러나 피사로만은 세잔에게서 폭발적인 잠재력을 느꼈다. 피사로는 1872년에 파리를 벗어났다. 그가 간 곳은 파리 도심과 꽤 떨어진, 조용한 시골 마을 퐁투아즈였다. 피사로는 이곳에서 세잔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원숙기에 접어든 마흔두 살 화가와 여전히 패기 어린 서른셋 화가는 시골길을 쏘다녔다. 피사로는 세잔에게 기초부터 빛을 다루는 법 등 심화 과정까지 차근차근 가르쳤다. 세잔은 툴툴대면서도 매번 피사로를 만나기 위해 3㎞에 이르는 거리를 오갔다. 사실상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던 세잔은 그에게서 대담한 색채 구사, 모험적인 구도 설정 등을 깨우칠 수 있었다.
밑거름을 다진 세잔은 더욱 당당하게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빛을 통한 색채 해방을 넘어, 다시점·다초점을 활용한 형태 해방에까지 손을 뻗었다. 그렇게 세잔은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으로 우뚝 서게 된다. 피사로가 사람을 제대로 본 것이었다. "세잔은 그림을 느리게 배우는 편이었어. (…)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놀랄만한 진전을 보였지." 피사로가 쓴 편지의 문장이었다. "피사로는 모든 것을 상담할 수 있는 친구였다. 나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드센 세잔 또한 피사로에게만큼은 경의를 표했다. 세잔은 자신을 '피사로의 제자'라고 칭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고갱 또한 비슷했다.
고갱은 원래 잘나가는 증권 중개인이었다. 그는 뒤늦게 그림을 배운 편이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아마추어 화가 취급을 받아야 했다. 고갱도 세잔 못지않게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그도 알게 모르게 심한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전업 화가의 길을 걷겠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피사로 또한 고갱의 편지를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는 끝내 그러지 않았다. 피사로는 고갱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고갱과 시골 풍경을 함께 그리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훗날 고갱이 타히티 등 비교적 문명화가 덜 된 섬 풍경을 묘사할 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피사로는 겉돌던 고갱이 인상주의 전시회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힘을 써주기도 했다. 빠르게 실력과 경험을 다진 고갱은, 훗날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표현주의 선구자 자리를 꿰차게 된다. 고갱 또한 훗날 피사로에 대해 "그는 나의 스승"이라고 인정했다.
스물아홉 살 어린 후배에게도 배우다
피사로는 열린 사람이었다.
피사로의 〈어린 시골 하녀〉도 이를 증명하는 그림이다. 피사로는 청소 도구를 든 하녀를 화폭 중심에 세웠다. 숟가락을 문 자기 아들(!)은 귀퉁이로 몰아버린 파격적인 구도였다. 이 그림에선 사심을 느낄만한 미화 내지 해석 여지를 남길 소품은 보이질 않는다. 화가는 그저 묵묵히 일하는 소녀에게 고마움을 느껴 붓을 든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울러 피사로는 남을 거둬 가르치는 데도 열정적이었지만, 남에게 배우는 일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나이가 얼마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가령 1880년대 중반, 쉰 살을 훌쩍 넘은 피사로는 자기보다 스물아홉 살 어린 조르주 쇠라에게도 배웠다. 서른세 살이나 연하였던 폴 시냐크에게도 기꺼이 조언을 구했다. 둘은 당시 선 대신 무수한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점묘법(點描法)을 구사하고 있었다. 여러 색을 섞어서 한 번에 칠하지 않고, 여러 색을 각자 위치에 촘촘히 찍어 일종의 배치를 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색이 탁해지지 않는다는 점 등에서 신인상주의 기법으로도 불리는 화풍이었다. 피사로가 이들의 방식을 진지하게 공부했다는 증거는 그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피사로는 점묘법을 착실히 받아들여 〈빨래를 너는 여인〉을 그렸다. 빨래 너는 여인과 땅바닥에 앉은 아이가 함께 있는 그림이다. 피사로는 점묘법의 특징을 십분 활용했다. 수천, 수만개 점이 찍혀있는 이 그림은 그 자체로 빛이 난다. 평범한 모녀의 일상 장면은 어느 한 곳도 탁하지 않기에 외려 평범하지 않고 성스러워보인다. 훗날 이 그림은 피사로의 대표작을 넘어 점묘법이 깃든 모든 작품 가운데 손꼽히는 걸작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가 가난에 허덕였던 이유는
피사로는 한 번도 어둡고 거친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다. 그의 됨됨이 또한 그림만큼 찬란했다.
그런 피사로는 정작 개인적으로는 여러 파란만장한 순간을 마주해야 했다. 피사로는 보불전쟁 후 파리로 돌아왔을 때쯤부터 꽤 긴 기간 가난에 시달렸다. 그의 아버지는 규모 있는 무역업을 이끌고 있었다. 집안 자체도 유복한 편이었다. 그런데 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을까. 피사로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안 하녀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녀 이름은 쥘리 벨레. 시골 처녀였던 그녀는 스물한 살에 한 상인 집안의 하녀로 취업했다. 피사로 부모가 사는 곳이었다. 1858년, 파리와 고향 집을 오가던 피사로는 얼마 안 돼 벨레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다 벨레는 덜컥 임신까지 하고 만다. 피사로의 부모는 둘의 관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기로에 선 피사로는 결국 부모 아닌 벨레 손을 잡았다. 피사로는 부모 집에서 쫓겨난 벨레와 함께 파리 등에서 함께 살았다. 1871년에는 혼인신고까지 해버렸다. 이 때문에 부모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재산도 물려받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 탓에 그간의 그림까지 날린 피사로 부부는 말 그대로 빈털터리 신세에 놓였다. 영국물을 먹고 온 피사로의 그림은 예전만큼 팔리지 않았다. 값도 뚝 내려갔다. 결국 벨레가 삯바느질을 하고, 꽃집 일손을 돕는 등으로 돈벌이를 해야 했다. 피사로가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녹여 그린 게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는 쥘리 벨레(쥘리 피사로)〉였다. 그림 속 벨레는 머리카락을 묶어 올린 채 바느질에 집중하고 있다. 그녀의 온화한 표정, 창문 사이로 옅게 비치는 풍경에서 또 한 번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벨레는 여러 일과 함께 줄줄이 태어나는 아이들을 돌보며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피사로를 괴롭힌 건 온 가족을 덮친 가난 말고도 또 있었다. 건강이었다.
피사로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의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햇빛을 좇아 햇빛을 뚫어지게 관찰하는 인상주의 화가 상당수의 숙명이었다. 결국 말년의 피사로는 더 이상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래도 끝끝내 붓만큼은 놓지 않은 피사로는 실내에서 창문을 보며 도심의 풍경을 그리곤 했다. 이 시기 피사로의 대표작으로는 1897년 〈겨울 아침 몽마르트의 거리〉와 1901년 〈퐁네프, 오후의 햇살〉 등이 꼽힌다. 피사로의 붓질은 시력 탓인지 더 대담해졌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감성은 언제나 똑같았다. 화사함이었다. 그처럼 겨울 풍경을 삭막하지 않게, 오후의 정신없는 한 장면을 부담스럽지 않게 그릴 수 있는 예술가는 없었다.
숨은 거인, 안타깝게 눈을 감다
그래도 피사로가 기꺼이 몸을 던졌던 인상주의 화풍은 날이 갈수록 더 이목을 끌었다.
20세기에 들어선 무렵 동료 모네는 거장 자리에 올랐다. 르누아르는 프랑스 최고 영예로 간주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피사로 또한 이 무렵부터는 전시를 흥행시키는 데 성공하는 등 늦게나마 합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피사로는 늙어서도 몸만 허락했다면 그림을 더 열정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를 믿어준 아내와 동료, 친구 모두에게 우리 길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더더욱 증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피사로는 성공의 크레셴도 앞 지점에서 세상과 작별했다. 1903년, 그의 나이 일흔셋이었다. 몸속 종양이 퍼진 탓이었다. 모네와 르누아르 등 동료 화가, 앙리 마티스 등 미래세대 예술가, 비평가와 미술품 수집가 등 수많은 이가 피사로의 장지까지 따라갔다. 당시 프랑스의 거의 모든 언론이 피사로의 죽음을 애도했다.
'거대했던 사람.'
많은 이가 피사로를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거장은 피사로와 모네였다. 하지만 이 중에서 딱 한 명만 꼽자면 피사로였다." 피사로가 죽고 3년 뒤 세잔은 그의 생애 마지막 전시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참고 자료〉
501 위대한 화가, 스티븐 파딩, 마로니에북스
Camille Pissarro, Marina Linares, Placer Pr
Camille Pissarro, Anka Muhlstein, Adriana Hunter, Other Press(NY)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가끔 역사, 문학 등과 관련한 특별전도 선보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