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편 111. 프레더릭 레이턴]
老화가와 젊은 모델
사랑과 우정, 열정과 헌신 사이
<동행하는 작품>
시몬과 이피게니아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
타오르는 6월
편집자 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적임자’ 모델을 만나다
그녀는 초겨울 첫눈처럼 해사했다.
적갈색이 섞인 풍성한 금발 머리카락과 진한 이목구비는 청량함을 한껏 머금었다. 연한 보랏빛 눈동자, 작은 얼굴에 비해 큰 키와 긴 팔다리는 묘하게 신비로운 인상까지 줬다. "베링턴 부인. 무대 맨 뒤에 있는 저 애가 혹시…?" "역시 연륜이 있으십니다. 맞아요. 제가 말했던 소녀." …드디어 찾았다. 화가 프레더릭 레이턴은 감격에 젖었다.
사실 처음에는 베링턴 부인을 믿지 않았다. 이웃집 여인인 그녀가 "극장에서 아주 괜찮은 그림 모델감을 봤다"고 했을 때, 솔직히 조금의 기대도 없었다. 둘러댈 핑계만 있었다면, 한가한 주말에 굳이 그녀와 함께 그 극장을 찾지 않았을 터였다. "어때요? 아름다움의 환영 같지요?" 베링턴 부인은 꿈꾸는 표정의 레이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끄덕끄덕. 레이턴은 홀린 듯 고개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사실 레이턴의 감정이 이토록 차오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레이턴은 대작을 구상 중이었다. 전설적인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속 인물, 시몬과 이피게니아를 대형 캔버스에 옮길 생각이었다.
이야기 속 시몬은 막돼먹기로 악명높은 사내로 등장한다. 그런 그가 우연히 여인 이피게니아를 어깨너머로 본다. 뜨거운 감정을 느낀 시몬은 오직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새로운 삶을 산다. 그 결과, 한때는 짐승처럼 여겨졌던 그가 지성인으로 변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랑, 그리고 아름다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그렇다면, 한 사람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큼의 예쁜 여인은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레이턴의 고민은 이 부분이었다. 그는 이피게니아가 될 모델을 찾기 위해 애썼다. 반년 넘게 거의 전 유럽을 상대로 수소문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단 한 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이턴은 포기를 생각할 무렵 적임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눈앞 무대 위 소녀, 도로시 딘이었다. 레이턴은 공연 뒤 서둘러 도로시를 만났다. 정중히 예를 갖춰 그림 모델이 돼줄 것을 부탁했다. 그 말을 듣던 도로시는 부드러운 목선을 숙여 요청에 응했다. 이것 말고도 둘의 첫 만남에 대한 건을 놓곤 여러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령 레이턴이 그저 우연히 극장을 갔다가 도로시를 봤다는 설, 그가 아주 우연히 다른 화가의 작업실에서 배우 지망생 겸 모델 도로시를 만나게 됐다는 설 등이다. 아무튼 1879년, 영국 런던. 마흔아홉 살 화가와 스무 살 모델은 서로의 세계에 발을 내밀었다.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남녀의 동행은 그렇게 이뤄졌다.
레이턴은 도로시와의 숙성 시간을 거쳐 〈시몬과 이피게니아〉를 그렸다.
도로시를 침대 위 누운 포즈로 둔 채 1년 가까이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레이턴은 너무도 깐깐했던 그의 안목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림 속 망나니 시몬은 어두운 숲을 걷던 중 곤히 잠든 이피게니아를 마주하고 있다. 도로시를 모델로 한 새하얀 이피게니아는 몸매를 훤히 드러낸 채 편하게 누워있다. 시몬이 그녀에게 곧장 반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시종 틈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그녀 모습에서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칫 산만해 보일 수 있는 이 그림은 명징한 주제를 가질 수 있었다. "재능있는 젊은 배우, 도로시의 뛰어난 연기력 덕에 빚진 작품이었다." 레이턴은 쏟아지는 찬사 앞에서 이 말을 잊지 않았다.
함께 ‘신화’를 만들다
레이턴과 도로시의 인연은 끝 아닌 시작이었다.
둘은 예술을 향한 서로의 열정을 믿었다. 레이턴은 도로시가 학생처럼 입을 오므리곤 손가락 끝으로 고민을 이어가는 모습을 좋아했다. 도로시는 레이턴의 관대함과 초연함, 섬세한 취향을 배우고 싶었다. 어느덧 서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레이턴은 도로시를 앞세워 여러 새로운 그림에 도전했다.
레이턴은 〈시몬과 이피게니아〉를 완성한 후 얼마 안 돼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를 작업했다. 안드로마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트로이군(軍) 총사령관 헥토르의 아내였다. 그녀는 트로이와 아카이아(그리스 중심) 연합군 사이 전쟁에서 남편 헥토르가 끝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대장군의 부인으로 최고 전리품 취급을 받게 될 자신이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도 절감하고 있었다.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아카이아군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끝내 헥토르를 죽여버렸다. 트로이 또한 끝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우아한 귀부인이었던 안드로마케는 전쟁 노예로 전락했다. 그녀는 이제 첩이었다. 심지어 원수 아킬레우스의 아들을 섬겨야하는 상황이었다.
도로시는 이러한 처지에 놓인 안드로마케를 연기했다. 도로시는 당시 그녀를 지배했을 슬픔과 좌절을 곱씹었다. 레이턴은 그런 도로시의 모습을 낚아채듯 포착했다. 도로시가 기꺼이 몰입해 준 역할, 상복 같은 검은 옷을 입은 안드로마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있다. 티 없이 환한 얼굴에선 기품이 보이지만, 유독 그늘진 얼굴을 통해 비애와 굴욕감 또한 엿볼 수 있다. 정체를 알아보는 듯한 사람들을 외면한 채 움츠린 태도에서 서글픔과 처연함이 더해진다.
이 그림은 발표와 동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주제, 구성, 선, 캐릭터, 채색에 대한 완벽한 예시가 이 작품에 다 있다." 한 유력 미술 잡지는 이렇게 극찬했다. 레이턴은 캔버스 앞 도로시가 보인 침묵의 열연에 경의를 표했다.
둘은 함께 역사를 이어갔다.
레이턴은 한층 성숙해진 도로시를 놓고 고혹적 여신의 자태를 주문한 적도 있다. 그렇게 해 탄생한 게 가장 아름다운 19세기 누드화 중 한 점으로 꼽히는 〈목욕하는 프시케〉다.
레이턴은 도로시를 통해 프시케를 묘사했다. 신화에 따르면 프시케는 과거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 외모 탓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미움을 받지만, 끝내 여러 고난을 극복하고 마음과 영혼의 여신 자리에 올라서는 영웅적 면도 갖췄다. 그림 속 프시케의 자태는 길쭉한 기둥과 맞물려 더 늘씬해보인다. 피부 또한 주름진 흰색과 노란색 천과 대비돼 더욱 말끔하게 보이는 듯하다. 그녀가 선하고 순수하다는 건 푸른 하늘, 모든 걸 투명하게 반사하는 목욕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레이턴은 그녀의 본업이 배우라는 점도 십분 활용했다.
이 때문에 도로시는 종종 상당한 연기력이 필요한 모습도 보여야 했다. 가령 도로시는 레이턴의 그림 〈페르세포네의 귀환〉에선 대지와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로 분했다. 데메테르는 명계의 신 하데스에게 딸 페르세포네를 빼앗기는 비운의 여신이다. "슬퍼하느라 대지를 돌볼 힘조차 없다." 슬픔에 잠긴 그녀는 딸을 잃은 직후부터 모든 일을 멈춘다. 온 세상이 황폐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던 최고 신 제우스가 데메테르와 납치범 하데스 사이 중재에 나선다. 꾀바른 하데스가 이미 술수를 부렸기에, 데메테르는 1년 중 6개월만 딸을 볼 수 있는 데 만족해야 했다. 약속의 날, 데메테르는 한시적으로나마 딸과 재회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은 그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도로시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 오직 딸을 위해 구덩이로 뛰어들 듯한 기세를 연출했다. 이 작품 또한 훗날 레이턴의 대표작 반열에 올라선다.
그녀는 뮤즈, 그는 키다리 아저씨?
레이턴은 십 년 넘게 도로시를 놔주지 않았다.
이렇게만 보면 화혼에 홀린 노화가가 젊은 모델을 너무 괴롭힌 게 아니냐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레이턴은 도로시에게 늘 후한 모델료를 줬다. 그녀가 언젠가 유명 배우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연기와 발음 교정 등 수업료도 대신 냈다. 화려한 인맥을 쥔 레이턴은 지인과 친구에게 틈만 나면 도로시의 연극을 추천했고, 나아가 '로비'를 해 그녀가 주연급 자리를 꿰찰 수 있도록 손쓰기도 했다.
사실, 레이턴을 만나기 전 도로시는 화사한 외모 뒤 어두운 과거를 품고 있었다.
도로시는 1859년께 런던의 노동자 집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채권자 무리를 피해 진작에 도망쳤고, 이 때문에 어머니가 도로시 등 아홉 자녀를 키워야 했다. 도로시 또한 집안일을 돕기 위해 열아홉 무렵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렇게 모델, 단역 배우를 전전하며 풍파에 떨고 있을 때 때마침 레이턴을 만난 것이었다. 도로시가 레이턴에게 샘솟는 영감의 뮤즈였다면, 레이턴은 도로시에게 키다리 아저씨가 돼준 셈이었다.
“화가가 숨겨놓은 딸” 소문도 돌았다
그렇다면 의문이 커진다.
나이 차이만 무려 스물여덟 살이었던 레이턴과 도로시. 둘은 정확히 어떤 관계였을까. 혹시나…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을까. 레이턴과 도로시를 보는 동시대인들 또한 둘의 남다른 유대감에 주목했다. 이들에겐 레이턴이 독신이라는 점 또한 눈여겨볼 지점이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 "화가의 숨겨놓은 딸", "노화가와 여배우의 무언가 의심스러운 환상의 호흡"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예 이 늙은 화가 앞에서 "당신의 어린 신부는 잘 지내고 있는가요?"라며 안부를 묻는 이도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턴은 그를 둘러싼 갖은 의심에 거듭 선을 그었다.
대부분 사람은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레이턴의 평소 품행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가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에겐 한없이 마음을 쏟는다는 것, 이러한 모습을 경이로울 만큼 평생 이어오고 있다는 것. 이게 이유였다. 사실 레이턴에게 도움을 받은 이는 도로시 말고도 한둘이 아니었다.
1830년 영국 요크셔주에서 출생한 레이턴은 어릴 적부터 주목받는 삶을 살았다.
레이턴은 러시아 차르 주치의였던 할아버지, 평판 좋은 의사였던 아버지 등 부유한 집안 밑에서 부족함 없이 컸다. 그는 준수한 외모, 5개 국어를 구사할 만큼의 명석한 두뇌 등으로 인기도 많았다. 레이턴은 화가로도 일찍 이름을 알렸다. 레이턴은 스물다섯 살인 1855년 런던 왕립 아카데미에 〈치마부에의 성모〉를 선보였다. 무려 빅토리아 여왕이 이 작품을 사들였다. 시작부터 여왕의 '간택'을 받은 셈이었다.
이 정도면 세상 무서울 게 없었을 법도 하지만, 레이턴은 그러지 않았다. 레이턴은 그저 운이 좋았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하사금으로 무명 동료 화가들의 그림을 잔뜩 사들였다. 돈을 모두와 나눈 격이었다. 레이턴은 그런 모습으로 평생을 살았다. 레이턴은 삼십대 초반부터는 사실상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급으로 돈을 벌었다. 그때도 그는 힘든 처지에 놓인 친구, 동료 화가와 모델을 돕는 데 여념 없었다.
1878년, 젊은 나이로 왕립 아카데미 협회장이 된 그는 제자 양성에도 성실히 임했다.
그러니까 레이턴은, 원래도 이토록 봉사와 후원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6월의 얼굴’을 그린 남자
한 여인이 뱃속 태아처럼, 방석 위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있다.
그녀는 달콤한 사랑 내지 휴식의 꿈을 꾸고 있을까. 여인은 잘 익은 사과 빛깔의 홍조와 함께 평온한 표정을 짓는다. 태양 빛을 닮은 오렌지색 시폰 원피스가 그녀를 감싸준다. 귀밑 목덜미부터 발목까지 속살이 훤히 비치고 있지만, 전혀 외설스럽거나 음란해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그녀는 온화한 공기를 타고 오는 바람 줄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감도는 꽃향기, 반짝이는 윤슬, 푸릇푸릇한 바닷소리에서 평화를 느끼고 있을 터였다. 초여름 낮잠에 대한 찬양 같은 이 그림은 레이턴의 〈타오르는 6월(Flaming June)〉이다.
어느 따뜻한 날의 오후. 레이턴이 한참을 조잘조잘 떠들던 도로시가 잠든 틈을 타 이를 구상했다는 말이 있다. 아예 도로시가 아닌 당시 레이턴의 또 다른 모델, 메리 로이드라는 여인을 그렸다는 의견도 적지 않게 거론되곤 한다. 이 그림 또한 1895년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자마자 압도적 찬사를 받았다. 레이턴은 나른하고도 온화한 6월의 인상을 대변하는 교본을 탄생시켰다.
레이턴은 독신의 삶을 유지했다.
그가 왜 도로시와 결혼하지 않았을까하는 궁금증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둘의 맺어짐은 당시에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영국 사회는 각자의 사회적 지위를 깐깐하게 따졌다. 레이턴은 진작에 1886년 준 남작 지위를 받았다. 도로시는 주연급 배우로 컸지만, 그녀의 위치가 출신 성분을 가리지는 못했다. 게다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스물여덟 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레이턴과 도로시 둘 다 애초부터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레이턴은 〈타오르는 6월〉을 공개한 이듬해인 1896년 1월 세습 남작 작위를 받았다.
영국 미술계 최초의 사례였다. 다만 레이턴은 그 영광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레이턴은 남작이 된 그달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협심증이었다. 레이턴을 세습할 직계혈족이 없기에, 그의 작위 또한 소멸하고 말았다. 레이턴의 죽음을 끝까지 지킨 이는 도로시였다. 그녀는 레이턴의 유산으로 5000파운드를 받았다. 그녀의 동생들 또한 신탁 형태로 5000파운드를 배정받았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15억~16억원 정도의 금액이다. 도로시는 레이턴이 죽고 3년 후인 1899년 12월에 죽었다. 고작 마흔 살 나이였다. 물론 레이턴은 부정했지만, 그 시절 그와 그녀의 관계를 놓곤 지금도 여러 추측이 오가고 있다.
〈참고 자료〉
Frederic Leighton, Corkran, Alice, Legare Street Press
The Life, Letters and Work of Frederic Leighton, Barrington, Russell, Legare Street Press
2년 3개월 전부터 연재를 이어간 〈후암동 미술관〉이 올여름 어울리는 신간, 〈무서운 그림들〉 종이책으로 새롭게 짜여 탄생했습니다. 이번 일 또한 독자님들의 사랑과 응원 덕입니다.
이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허세왕 할' 헨리 8세의 궁정 화가 한스 홀바인 ▷독보적 괴짜 예술가 주세페 아르침볼도 등 연재 루틴 상 기사로 다루지 못한 미공개 특별 에피소드 10개를 추가로 실어두었습니다. 긴 기간 잠을 설쳤지만, 그래도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단순히 '보기에 무섭기만 한' 그림이 아닌, 그 안에 얽힌 역사·신화·전설·문학·미스터리로 인해 '더욱 무서워지는' 그림을 꼽았습니다.
힘 닿을 때까지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관심과 격려로 일궈주신 기적을 조금씩 갚아 나가겠습니다. 이번 기사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가끔 역사, 문학 등과 관련한 특별전도 선보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