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대상기업진단 제도로 기업 자산 순위 발표
“자산 순위가 곧 경쟁력 순위 시선에 부담 커”
정부의 기업 초청행사 공정위 발표 순위 고려
순위 변동에 그룹 오너 자리 순서까지 달라져
재계 순위 상승 시 사회적 책임 요구도 커져
[헤럴드경제=한영대 기자]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매년 자산 5조원이 넘는 공시대상기업집단 이른바 ‘대기업 집단’을 발표합니다. 이를 통해 주요 그룹들의 자산 순위가 공개됩니다. 전년도 그룹들의 경영 성과가 거울처럼 반영되는 셈입니다.
특히 재계에서는 공정위에서 발표하는 자산 순위가 사실상 ‘재계 서열’로 통합니다. 이 때문에 그룹 총수들은 공정위가 발표하는 순위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함께 급변하는 대내외 경영 변수에 매년 기업들의 순위도 뒤바뀌고 있습니다.
실제 2022년 SK는 17년간 재계 2위를 유지하던 현대차를 제치고 처음으로 2위로 올라서 높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반도체를 그룹의 주력으로 삼고, 배터리와 바이오 등 미래 먹거리를 계속 발굴한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주요 계열사들의 지속적인 사업 모델 재편과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기업공개(IPO) 및 분할 등으로 전반적으로 규모가 커진 것도 배경입니다. 지난해 포스코가 5대 그룹 중 하나였던 롯데를 밀어내고 5위를 차지한 것도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지난 15일 발표된 자산 순위에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난해 9위였던 HD현대(84조7920억원)는 올해 8위로 상승한 반면, 지난해까지 8위 자리를 지켰던 GS(80조8240억원)는 9위로 밀려났습니다. 한화그룹은 7위 자리를 유지한 가운데 지난해 83조280억원 규모였던 자산이 올해 112조4630억원까지 증가했습니다. 6위인 롯데(129조8290억원)를 바짝 추격하게 된 것이죠.
GS는 내실 경영 강화에 따라 자산으로 인식되는 부채 규모가 줄어든 것이 순위 변동 요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에 GS는 순위 변동에 관계없이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기 위한 담금질을 계속 진행한다는 입장입니다. 한화는 지난해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을 인수한 이후 자산이 급격히 증가했고, HD현대는 신규 선박 수주 증가로 계약 자산이 늘어나면서 순위가 상승했습니다.
기업들은 자산 순위 변화가 당장 경영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자산 순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자산 순위를 기업 경쟁력 순위로 바라보는 시선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산 규모가 전적으로 기업가치를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어도 순위 등락에 따라 대외적으로 기업의 존재감과 입지가 달라진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정부 주관 행사에서 대접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자산 순위에 신경 쓰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는 기업들을 행사에 초청할 때 공정위에서 발표한 자산 순위를 고려하는 만큼 순위에 따라 참석 기회 여부가 갈린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부의 줄 세우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행사를 준비할 때 기업인들이 앉는 좌석 배치를 자산 순위로 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오너가 있는 기업의 경우 오너가 지난해와 올해 앉은 자리가 달라질 때 재계 순위 중요성을 실감한다”고 말했습니다.
순위 상승이 마냥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계 순위가 상승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사회 공헌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요구도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상승한 순위를 최소한 유지해야 한다는 총수들의 부담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순위 하락이 경영 능력에서 기인한다는 지적도 기업들을 압박하는 부분입니다.
재계에서는 자산 순위 공개가 기업 간 불필요한 경쟁만 낳는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시행된 지 약 40년이 된 대기업 집단 발표는 갈라파고스 규제라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는 만큼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1987년에 처음 시행된 이 제도는 정부가 규모가 큰 기업들을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40년 가까이 지속된 이 규제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실제 대기업 집단으로 분류되면 해당 기업들은 공정거래법 등에 근거해 274개의 규제를 새로 적용받게 됩니다. 대기업이 되는 순간 규제의 늪은 더 깊어지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