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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어림잡아 30~40년 전, 구멍가게는 아이들에게 놀이터이자 백화점이었고 또 행복한 단맛을 책임지던 최고의 제과점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추억 속에 묻어둘 줄 알았던 구멍가게 빵·과자들이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제과점이 많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구멍가게에서 빵을 사 먹는 게 흔한 풍경이었다. 양철로 만든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면 몽실몽실한 특유의 구멍가게 냄새가 났다. 출입문 바로 오른편에는 평상에 장판을 올려 마치 간이방처럼 꾸민 가게주인의 공간이 있었다. 할머니라 하기에는 젊고 아줌마라 하기에는 늙어 보이던 주인은 항상 '할머니 이불'이라 불리던 화려한 꽃무늬 담요를 반쯤 덮고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출입문 근처에는 늘 빵 진열대가 있었다. 크림빵부터 방울빵, 카스테라, 소보로빵 등 온갖 빵들이 가득했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군침을 흘리게 만든 건 제일 윗 칸을 차지하고 있던 바나나빵, 반달케이크 같은 케이크류였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 탓에 부모님이 사다주실 때나 먹을 수 있었다. 빵은 아니지만 왠지 빵 진열대에 같이 있던 '꽈배기'란 이름의 과자도 꽤나 인기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고 편의점과 대형마트가 대세로 자리잡은 지금, 구멍가게는 설 자리를 잃고 세월을 따라 사라지고 있다. 구멍가게가 사라지면서 이곳에서 팔리던 빵들도 추억 속에 묻어둬야 했다. 구멍가게에서 팔던 빵들 중에는 영세한 제과업체들이 생산하는 빵들이 있었는데, 그런 영세기업의 빵들이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와 편의점에 판로를 뚫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아직 청춘이다!"…구멍가게 빵들의 인생 2막
그 와중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거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구멍가게 제과들도 있다.
한 식품 회사의 '바나나과자'는 몇 해 전 방송에 나간 후 월 매출이 전달 대비 20배 껑충 뛰었다. 바나나과자의 매출은 4년 전 3억원 수준에서 지난해 7억원 수준으로 2배 이상 올라 유지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편의점에도 진출해 '추억의 바나나과자'라는 새로운 패키지로 선보여 소비자들과의 접점을 확대하고 있다.
바나나과자는 이름만 과자일 뿐, 사실 케이크류의 빵이다. 1972년 출시돼 구멍가게와 재래시장 등을 중심으로 판매됐다.
이 회사에서 생산되는 옛날꽈배기는 다음 달 미국 진출을 앞두고 있다. 어릴 적 고향에서 맛본 옛날꽈배기 맛을 찾는 이역만리 교민들의 그리움을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회사 관계자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 중에 옛날꽈배기 맛을 기억하는 이들을 위해 미국 수출을 결정하게 됐다"며 "옛날꽈배기 등 어릴 적 추억의 맛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꾸준한 수요가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우리가 기억하는 또 다른 구멍가게 빵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반달케이크'다. 오믈렛케이크가 생소하던 시절에 비슷하게나마 한국에 대중화한 것이 이 반달케이크였다.
요즘 들어 보게 되는 반달케이크는 한 제과회사가 24년 전 출시한 제품이다.
반달케이크는 바나나과자와 달리 거의 대부분의 매출을 구멍가게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구멍가게가 사라져 가면서 10년 전에 비해 매출의 70%가 날아갈 만큼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8년 전 창업주의 아들이 반달케이크 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제품명을 '신(新)반달케이크'로 바꾸고 쇄신을 노렸다. 과거에 비해 단맛을 선호하지 않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단맛을 줄였고, 케이크의 맛도 부드러움을 더했다. 다행하게도 추억의 빵을 찾는 소비자들이 먼저 온라인을 통해 반달케이크를 찾았다. 생산량 감소에도 판매가가 올라가면서 매출액 하락은 멈출 수 있었다.
이들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거나 매출 절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추억을 소비하는 소비트렌드의 변화 때문이다. 맛만 있다고 성공하는 시대가 아니다. 음식에도 감성이 필요하다. 추억은 감성을 일으키는 가장 좋은 소재다. 구멍가게 과자를 찾는 소비자들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했던 그 때의 그리움을 구매하는 셈이다.
"빵 하나에 오순도순 '행복', 앞으로도 계속되길"
소비자의 니즈에도 빵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면, 이제 그 빵을 맛볼 수 없을 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빵 만큼이나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한다.
바나나빵을 만드는 식품회사는 핵심 직원들의 나이가 60대다. 반달케이크를 만드는 제과회사 역시 직원들의 나이가 노년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이들 회사는 영세한 규모라 새로운 투자를 과감하게 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빵의 역사만큼 일하는 사람은 점점 늙어가고 신규 투자도 어렵지만, 빵을 찾는 이들이 남아있는 한 두 회사 모두 빵을 만드는 일은 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바나나빵 제조사 관계자는 "여전히 우리 빵을 기억하고 찾는 이들이 많다는 것에 감사하다"며 "고객들이 우리 빵을 계속 기다리고 있는 만큼, 장기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달케이크 제조사 대표는 "어릴 적 먹었던 그 빵을 기억하고 찾아주는 이들이 남아있는 한 빵을 계속 만들 것"이라며 "우리의 빵을 두고 가족이 오순도순 웃음꽃을 피웠던 그 때의 행복이 앞으로 계속되기를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