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시스템반도체 1위’ 선언 5년
비메모리 불모지서 파운드리 성과도
TSMC와의 점유율 격차가 최대 과제
“지금까지 5년보다 앞으로가 더 중요”
‘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메모리에 이어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확실한 1등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굳은 의지와 열정, 그리고 끈기를 갖고 꼭, 해내겠습니다.”(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지난 2019년 4월 30일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이재용 회장(당시 부회장)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5년. 삼성은 그동안 2030년 ‘시스템반도체 1위’라는 꿈을 향해 느리지만 꾸준히 성과를 쌓아오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의 5년보다 앞으로의 5년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특히 AI 반도체의 부상으로 전례없는 격동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지금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1위’ 목표가 멀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재용 회장이 꼭 해내겠다고 다짐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삼성은 어디까지 왔을까요? 오늘 칩만사에서 중간 평가를 해보려고 합니다.
치열했던 5년, 조금씩 빛 보다…“파운드리 수주 잔고 최대”
2019년 삼성이 “2030년 시스템반도체 1위를 하겠다”는 목표를 잡았을 때만 해도,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는 출범 3년차에 불과했습니다. 점유율 기준으로 당시 업계 2위였던 글로벌파운드리(GF)와 엎치락 뒤치락 하던 때입니다. 그만큼 ‘메모리 반도체 1위’라는 타이틀에 비해 파운드리를 포함한 비메모리, 즉 시스템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미비했습니다.
이재용 회장의 선언과 함께 삼성전자는 착실하게 파운드리 기술 초격차를 이뤄왔습니다. 제일 먼저 GF와의 점유율을 크게 벌리며 2019년부터 확실한 2위 자리를 꿰차게 됐습니다. 7나노 이후 공정 개발을 무기한 중단한 GF와 달리, 연구개발(R&D) 분야에 공격적 투자를 이어오면서 초격차 기술력을 확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삼성 파운드리는 5년 동안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우선, 지난해 역대 최대 파운드리 수주 잔고를 달성했습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약 160억달러(약 22조원)로 추정됩니다. 그간 꾸준히 늘려온 고객사 덕분입니다. 현재 삼성의 파운드리 고객사는 100여개로 전해집니다. 주요 업체들로는 ▷미국 AI반도체 전문 기업 암바렐라의 5나노 자율주행 차량용 반도체 ▷AI 스타트업 그로크의 차세대 4나노 AI칩 ▷텐스토렌트의 차세대 4나노 AI칩 ▷테슬라 3세대 자율주행 칩 ▷모빌아이의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칩 등입니다.
특히, 지난해부터 시작된 AI 반도체 붐으로 다른 빅테크와의 협력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저커버그 메타 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삼성 경영진을 찾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업계에서는 2028년 삼성의 파운드리 고객사가 200여개를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삼성은 지난 2022년 3나노 양산에 세계 최초로 성공하면서, TSMC를 앞지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3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 싸움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입니다. TSMC보다 먼저 도입한 GAA(게이트올어라운드) 기술로 그간 상대적으로 뒤쳐져있던 수율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또, 내년부터는 반도체 공장에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트윈’ 기술을 시범 적용해 수율을 개선할 예정입니다.
5년전과 다른 격동기·여전한 점유율 격차…“앞으로가 훨씬 더 중요”
문제는 삼성 파운드리 사업이 자리를 잡고 커가는 동안, 반도체 업계 역시 너무 빠르게 변했다는 겁니다. 점차 좁혀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TSMC와의 점유율 격차는 여전하고, 삼성전자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강자까지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점유율은 61%, 삼성전자는 14%입니다. 양사의 격차는 47%포인트로, 5년 전보다 오히려 더 벌어졌습니다. 2019년 1분기에는 TSMC가 49%, 삼성전자가 19%를 차지하며 약 30%포인트 차이가 났습니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읍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2019년에 비전을 선포할 때만 해도 실현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좋았는데, 안타깝게도 파운드리 점유율 격차는 도리어 줄지 않고 늘어났다”며 “지금까지의 5년보다 앞으로의 7년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시점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AI 반도체 뿐 아니라 차량용 반도체 등에서도 성과를 내야하고,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 뿐 아니라 시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0나노 이상의 레거시 공정에서도 경쟁력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 역시 “지난 5년과 달리 주요국들의 반도체 생산시설 유치를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있고, ‘반도체 원조 강자’ 인텔이 경쟁자로 등장하고, AI 반도체도 변수로 등장했다”며 “시스템반도체 1위는 선언적인 목표라고 인정하고, 앞으로 현실적인 목표를 재수립하고 전략을 수정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삼성전자는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천문학적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파운드리 생산 거점으로 국내 평택캠퍼스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신규 라인을 건설 중입니다. 평택캠퍼스의 P3 파운드리 라인은 지난해 하반기 가동을 시작했고, 테일러 공장의 가동 시기는 2026년입니다. 평택캠퍼스는 P6까지 지어질 예정이고 테일러에도 제2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향후 삼성의 파운드리 생산능력(캐파)는 본격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됩니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점차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패키징 분야에도 매년 대규모 설비 투자를 집행하고 있습니다. 2022년 20억달러를 투자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약 18억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2030년까지 약 20조원을 투자해 기흥 사업장에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를 조성하고 있는데,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선도하는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