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크루아상은 혹한의 겨울을 이겨낸 봄꽃을 닮았다.
그야말로 꽃의 계절이다. 몇 차례 봄비가 내린 뒤 꽃망울은 꽃이 될 막바지 준비에 분주하다. 산수유를 시작으로 개나리·목련·진달래·민들레·벚꽃이 환하게 꽃잎을 펼친다. 주말이면 봄꽃이 만개한 곳 어디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모두가 봄꽃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요즘이다.
그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풀과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 했다. 겨울을 나지 않고서는 봄꽃은 피지 않는다. 봄꽃은 풀과 나무의 삶의 갈망이다. 꽃이 있어야 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극한의 상황에서 꿋꿋이 눈꽃을 지켜내고 더욱 많은 꽃을 만든다.
아이러니하게 많은 봄꽃이 사계절이 따뜻한 기후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한다. 겨울이 없어서다. 생존을 향한 갈망이 그만큼 사그라들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버터와 열과의 싸움…맛있는 크루아상의 길
크루아상이 봄꽃을 닮았다는 건, 그 역시 맛있는 빵이 되기 위해 반드시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봄꽃의 시련이 척박한 환경이라면, 크루아상의 시련은 미세한 환경의 변화에 생사가 결정되는 시련이다.
크루아상은 1839년 프랑스 파리에 문을 연 오스트리아 빈 풍의 빵집에서 탄생했다. 크루아상을 처음 먹은 프랑스인들은 그때까지 먹었던 페이스트리 계열에서조차 느끼지 못한 그 식감과 맛에 감탄했다고 한다. 순식간에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과 미국, 일본에까지 인기 몰이를 했다.
그런 맛있는 크루아상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버터·열을 극한으로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 이 때문에 크루아상은 빵 중에서도 만들기가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특유의 겹겹이 부풀어 오르는 질감을 살리는 게 핵심인데,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버터와 열을 잘 다뤄야 한다.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 크루아상은 사실상 죽은 빵이다. 많은 빵들이 공장에서 대량생산을 해도 일정 수준의 맛을 유지하지만, 크루아상 만큼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숙련된 제빵사가 만든 크루아상과 공장에서 뽑아내는 크루아상은 아예 다른 빵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맛의 차이가 현격하다.
시련은 밀가루 반죽부터 시작이다. 글루텐이 약 60~70% 정도만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버터를 넣고 접을 때 끊어지지 않고 수월한 작업이 가능하다.
그렇게 만든 밀가루 반죽 위에 사각형의 버터를 올려 접기에 들어간다. 이때 버터는 차갑지도 녹을 정도로 따뜻해서도 안 된다. 차가우면 버터가 갈라져 밀가루 반죽만 뭉친 부분이 생긴다. 따뜻해 녹아버린 경우에도 반죽이 뭉쳐 제대로 된 결을 살릴 수가 없다. 그렇게 접고 펴고를 반복하면 우리가 아는 크루아상의 결결이 찢어지는 식감이 나온다.
겹이 많을 수록 그 질감을 잘 살릴 수 있어 맛있어지지만, 너무 많이 접었다가는 버터가 끊기면서 층이 합쳐질 수 있다. 이 작업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눈으로 확인하면서 할 수가 없다. 오롯이 제빵사의 감각에 의존한다. 초보자나 기계가 제대로 된 크루아상을 만들기 어려운 이유다.
이후 반죽을 이등변삼각형 모양으로 재단을 한 뒤 돌돌 말아 우리가 아는 크루아상의 모습으로 성형한다. 그리고는 한 시간 가량 발효한다. 이때 온도가 너무 낮으면 빵을 발효시키는 이스트가 활동을 안 하고, 높으면 죽어버린다. 24~27℃ 정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190℃ 예열된 오븐에서 약 18분간 구운 뒤에야 비로소 크루아상이 탄생한다.
제대로 만들어진 크루아상을 반으로 갈라보면 층층이 풍성히 부풀어 오른 모습이 꼭 민들레를 보는 것 같다. 크루아상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겉바속촉'을 제대로 보여준다. 결결이 찍어지는 속살은 약간의 탄성도 지니고 있다. 뿜어져 나오는 버터의 풍미는 바게트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빵으로 손꼽히는 이유를 알려준다.
우리도 삶도 봄꽃과 크루아상처럼
"저는 날마다 꿈처럼 행복합니다."
봄꽃과 크루아상처럼 끔찍한 시련은 아이러니하게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예컨대, 이지선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의 삶이 그렇다. 시련을 겪은 그는 이전보다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어쩌면 일상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보다 더 빛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그는 2000년 7월 음주운전 차량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한다. 타고 있던 차가 불길에 휩싸였고, 극적으로 구조됐지만 전신 55%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양손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8개 손가락 마디를 잘라내야 했다. 30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았고, 의사들마저 장기간 생존이 어려울 것이라 고개를 저었다.
생사를 오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는 것이 좋으니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삶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뎠다. 기적적으로 병상에서 일어난 뒤 자신과 같이 화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미국에서 사회복지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
"사고 후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물을 마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마신 그 물의 시원한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죽음 같은 시간이 올 때마다 그 물 맛을 기억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맛볼 수 있는 그 작지만 어마어마한 기쁨을, 전에는 몰랐던 소소한 행복을 세어보며 살아가는 맛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평범했던 일상의 순간이 소중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주말 오후의 산책, 친구와의 시시콜콜한 대화, 저녁은 뭐를 먹을까 고민하는 순간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그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강한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일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마음은 곧 삶에 대한 집념이 되고 시련을 극복하는 힘이 된다.
맛있는 빵이 되기 위해 뜨거운 오븐 속을 견디는 크루아상처럼, 꽃을 피우기 위해 혹한의 겨울을 나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이 시련을 견디면 내일은 더 빛나는 삶이 시작되지 않을까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