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AI vs. 엔비디아, AI 반도체 둘러싼 세기의 대결
삼성·SK 고부가가치 D램 영향력 확대 기대
파운드리 TSMC·인텔에 뺏겨선 안돼
‘1경원’ 펀딩 야망, 비현실적 계획은 아니란 분석도
‘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38세 올트먼과 61세 젠슨 황의 대결, 삼성·SK에는 호재다?”
요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보다 핫한 38세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 입니다. 올트먼은 자체 AI 반도체 개발을 위해 최대 7조 달러(약 9300조원) 규모의 자금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엔비디아가 거의 독점하고 있는 AI 반도체 시장의 판을 뒤집겠다는 야망입니다.
엔비디아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AI의 대부’라 불리는 미국계 대만인 젠슨 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황은 올트먼의 도발에 ‘맞춤형 AI 반도체 설계’라는 새 사업으로 맞불을 놓고 있습니다.
둘의 경쟁이 갈수록 흥미로워지는 이유는 이들의 관계가 여전히 ‘공생’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오픈AI의 챗GPT 성공은 엔비디아의 폭발적인 매출 성장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트리거가 됐습니다. 챗GPT를 필두로 생성형 AI 열풍이 불면서 이에 필요한 AI 반도체 시장이 급격하게 커졌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엔비디아 주가는 최근 1년간 246% 급등했고, 14일(현지시간)에는 구글 모회사 알파벳을 제치고 시가총액 3위(1조8250억 달러)로 올라섰습니다. 오는 21일 4분기 실적발표를 앞두고 있는데 시장에서는 분기 매출이 590억4000만달러(79조원)로 전년 대비 118% 늘어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올트먼이 자체 AI반도체 네트워크 구상을 발표하며 사실상 엔비디아와 경쟁 관계로 바뀌는 형국이 되고 있습니다. 공생에서 대결로 바뀌는 구도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내심 이런 변화가 반갑기만 합니다. 오픈AI의 공격적인 투자는 여러모로 이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AI 반도체 시장 대격돌 속 삼성·SK의 복잡한 셈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경원 모으는 법 알려줘” vs. “AI, 그렇게 돈 안 든다”
샘 올트먼 CEO는 13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린 2024 세계정부정상회의(WGS)에서 열린 대담에 화상으로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오마르 술탄 알올라마 UAE AI·디지털경제부 장관이 “어젯밤 잠들면서 7조 달러(약 9300조원)를 모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함께하는 데 관심 있느냐”고 농담 섞어 묻자 살짝 웃으며 “모으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제발 알려달라. 호기심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앞서 제기됐던 올트먼의 ‘약 1경원 펀딩설’ 때문입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올트먼 CEO가 자체 AI용 반도체 개발·제조를 위해 5조∼7조 달러(약 6600조∼9300조원) 규모의 펀딩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약 1경원인데 가늠하기도 힘든 천문학적 규모입니다.
하루 전날인 12일(현지시간)에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WGS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제조하는 칩(반도체) 산업 덕분에 AI 비용이 크게 낮아질 것으로 자신한다.”
올트먼의 1경원 펀딩설을 의식한 듯한 발언이어서 화제가 됐습니다. WSJ의 보도에 따르면, 올트먼은 중동의 ‘오일머니’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목표는 확실합니다.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독주를 막겠다는 겁니다. 현재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오픈AI는 자체 생성형 AI인 챗GPT 서비스를 시작할 때 엔비디아의 AI 가속기를 약 1만개 활용했습니다. AI 가속기는 생성형 AI에 필수인 대규모 데이터 학습·추론에 특화한 반도체 패키지로,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처리장치)에 HBM(고대역폭메모리) 여러개를 붙여 제조됩니다. 엔비디아의 가장 큰 고객사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자사 생성형 AI에 꼭 맞는 자체 칩을 만들겠다는 의지입니다.
일각에서는 올트먼의 ‘1경원’ 펀딩설에 대해 비현실적인 규모 아니냐고 하지만,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 개발 및 제조는 워낙 장기간이 소요되는 플랜”이라며 “올트먼이 1경원의 펀딩을 몇년에 걸쳐 투자할지 구체적인 기간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을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9300조원을 20년에 걸쳐 투자한다면, 1년에 약 450조원 가량인데 AI나 반도체 시장의 성장률을 보면 완전히 비현실적인 투자 금액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엔비디아 이어 오픈AI도 삼성·SK의 초대형 고객?
그렇다면 이런 세기의 대결이 삼성·SK에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단은’ 여러 모로 이득이 될 전망입니다.
오픈AI가 자체 AI 반도체를 설계하려면 최소한 4~5년은 걸릴 것으로 전망되는데, 그때까지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시장 선두는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는 HBM이 필수적으로 필요합니다. HBM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중요한 메모리 반도체 파트너로서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오픈AI가 자체 칩 설계에 성공하면 HBM 이후 고부가가치 메모리 격전지로 꼽히는 CXL(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 PIM(프로세싱인메모리) 시장도 넓어질 수 있습니다. 오픈AI가 개발할 AI 가속기에도 HBM처럼 데이터 처리를 높여줄 고성능 메모리가 필요할 겁니다. 삼성·SK로서는 엔비디아에 이어 오픈AI 라는 큰 고객사가 추가되는 셈이어서 판매량 확대를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협업도 가능합니다. 오픈AI가 자체 반도체를 개발하면 이를 제조해줄 파운드리 협력사가 필요합니다. 앞서 올트먼은 지난달 말 한국을 방문해 삼성전자 경영진과 인공지능(AI) 사업 관련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다만, TSMC와 인텔이라는 복병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현재 최첨단 AI 반도체를 제조할 수 있는 곳은 삼성을 포함해 이 세 곳입니다. 오픈AI가 TSMC나 인텔과 손을 잡을 경우,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점유율은 더욱 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점유율은 12.4%, TSMC 점유율은 57.9%입니다. 삼성으로서는 오픈AI가 경쟁사와 손잡을 경우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올트먼은 삼성 뿐 아니라 TSMC와 인텔과도 접촉하며 저울질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직접 반도체 공장을 지어 제조까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방안도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