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꺾고 따냈다” 페이커 손에 쥔 20kg 트로피, 알고보니 명품?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19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3 리그 오브 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결승전 T1과 웨이보 게이밍의 경기에서 3-0으로 승리한 T1 페이커(이상혁) 선수. [연합]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NFL(미국프로풋볼), NBA(미국프로농구), 그리고 LoL(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의 공통점은 뭘까?정답은 티파니 트로피다. 2023 롤드컵(LoL 월드챔피언십) 우승팀 T1에서 이상혁 선수의 품에 안긴 ‘소환사의 컵’ 역시 장인의 손길이 스며든 예술품이다.

주류 사회의 주류 스포츠를 위한 트로피를 제작해 온 럭셔리 브랜드 티파니(Tiffany & Co.)가 최근 몇년 새 e스포츠 트로피 제작에 뛰어든 이유는 뭘까. 콧대 높은 명품들이 트로피 제작에 열 올리는 이유, 럭셔리 브랜드의 상부상조 전략을 알아보자.

“중국 꺾고 따냈다” 페이커 손에 쥔 20kg 트로피, 알고보니 명품?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찰스 루이스 티파니(Charles Lewis Tiffany)는 1837년 뉴욕에 티파니 1호점을 개설했다. 사진은 1960년대 초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속 오드리 햅번. 뉴욕 티파니 매장을 들여다 보는 모습. [파라마운트픽쳐스ⓒ]

여자들의 로망 ‘티파니’…언제부터 e스포츠 주목했나

티파니는 여성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는 쥬얼리 브랜드다. 다만, 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 섬세한 은 세공으로 쌓은 기술력을 앞세워 유수한 스포츠 대회 트로피 제작도 담당해왔다.

티파니 트로피는 비교적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 역사와 대중성을 두루 갖춘 구기 종목, 레이싱, 경마 대회 등에 국한돼 있었다. 콧대 높은 티파니가 달라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20년대 들어 다름 아닌 e스포츠 트로피 제작에도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 과거 ‘게임은 질병’이라는 수모까지 겪던 e스포츠의 위상이 그만큼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 꺾고 따냈다” 페이커 손에 쥔 20kg 트로피, 알고보니 명품?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공식 우승 트로피 서머너즈 컵 (Summoner’s Cup). 우승 트로피를 들어보이는 페이커 이상혁 선수. [티파니ⓒ, 이상혁 인스타그램]

가장 따끈따끈한 트로피는 ‘2023 LoL 월드챔피언십’ 소환사의 컵(Summoner’s Cup)이다. 이 트로피를 품에 안은 건 페이커 이상혁을 앞세운 한국팀 T1이다.

T1은 지난 19일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중국팀 WBG를 3대 0으로 완파하며 통산 네 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 지난 9월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초대 챔피언의 감동이 다 가시기도 전에 또 한번 국내 e스포츠 팬들을 울린 희소식이다.

티파니의 상징색과 같은 민트색 상자 속에 들어있는 이 우승컵은 무게 약 20kg, 높이 약 69cm의 웅장한 사이즈를 자랑한다. 티파니 스타일로 모던하게 재해석한 이 트로피는 미국 로드 아일랜드 주 컴벌랜드에 위치한 티파니 할로웨어 공방의 장인들이 4개월 간 277시간의 담금질로 만들어낸 완성품이다.

앞서 티파니는 2020년 일본 RPG게임인 ‘몬스터 스트라이크 그랑프리’ 트로피 제작을 시작으로 e스포츠 대회에 주목해왔다. 이후 2021년 LoL 프로 리그, 2022년 LoL 월드 챔피언십 우승팀을 위한 서머너즈 컵을 제작했다. 두 트로피는 중국 EDG와 한국 DRX가 사이좋게 가져간 상태다.

티파니가 만들면 다르다?…명품 트로피, 어떻게 생겼길래

1837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한 티파니는 1860년부터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 종목들의 트로피 제작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중국 꺾고 따냈다” 페이커 손에 쥔 20kg 트로피, 알고보니 명품?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왼쪽부터) 벨몬트 메모리얼 챌린지 컵, 사무엘 루딘 트로피, PGA 챔피언십 트로피. [티파니ⓒ]

티파니가 처음 트로피를 제작한 종목은 다름아닌 ‘경마’다. 미국 내 경마의 위상은 미국 내 최고 인기를 자랑하는 NFL의 아성에 도전할 정도다. 지난 5월 미국 3대 경마대회 중 하나인 켄터키더비의 시청률은 NFL 슈퍼볼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다.

물론 트로피의 유명세는 NFL의 슈퍼볼 챔피언십 팀이 받는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가 단연 1위다. 1967년부터 57년 간 제작해 온 이 트로피는 럭비공을 형상화한 단순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당시 풋볼에 문외한이었던 티파니 부사장이었던 오스카 리데너가 냅킨에 즉흥적으로 그린 디자인이 채택됐다는 후문이다. 100% 순은으로 만든 해당 트로피 가격은 1만5500달러.

별 중의 별이 모이는 MLB(메이저리그 야구) 우승팀과 홈런 더비 챔피언 트로피 역시 2000년부터 티파니가 제작한다. 러너들의 로망으로 꼽히는 ‘세계 6대 마라톤’ 가운데 뉴욕시티마라톤 트로피 역시 티파니 작품이다.

“중국 꺾고 따냈다” 페이커 손에 쥔 20kg 트로피, 알고보니 명품?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Palme d'Or) 트로피.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뽐내는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 [쇼파드ⓒ] [AFP=연합]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알고보면 스위스 럭셔리 ‘쇼파드’ 작품

예술계 주요 시상식에서도 명품 브랜드가 제작한 트로피를 볼 수 있다.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제작하는 쇼파드가 대표적이다. 종려나무 잎사귀를 형상화 한 우아한 디자인의 트로피는 1998년부터 26년째 스위스 럭셔리 브랜드인 쇼파드가 만든다. 쇼파드의 손이 닿기 전 초창기 디자인은 프랑스의 영화감독이자 시인인 장 콕토 감독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꺾고 따냈다” 페이커 손에 쥔 20kg 트로피, 알고보니 명품?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루이비통에서 제작한 트로피 보관 트렁크. 왼쪽부터 FIFA 월드컵, 럭비 월드컵, LoL 월드 챔피언십 서머너즈 컵을 위한 맞춤형 트렁크다. [루이비통ⓒ]

금속세공 기술을 가진 쥬얼리 하우스가 부러웠던 것일까. 루이비통은 각종 트로피 ‘보관 가방’을 제작하고 나섰다. 가죽 세공과 트렁크 가방으로 이름을 떨친 브랜드답게 FIFA 월드컵, NBA 래리 오브라이언, 데이비스 컵 등 트로피를 담을 수 있는 맞춤형 트렁크를 제작한 것. 트로피 형태와 크기에 따라 디자인도 천차만별이다. 프랑스에 본거지를 둔 루이비통은 2019년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열린 롤드컵을 위해서도 트로피 트렁크(사진 우측)를 제작한 바 있다.

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국제영화상을 받고 있다. [연합]

값어치 결정하는 건 결국…

티파니나 쇼파드 정도를 제외하면, 국내외 유수한 시상식 트로피 대다수는 명품 브랜드와 관련이 없다. 제작비가 약 100만원 안팎인 아카데미 시상식의 오스카 트로피도 그 중 하나다.

아카데미는 1950년 ‘트로피 판매금지 조항’을 도입해 돈으로 트로피의 값어치를 환산하는 행위를 원천 차단하고자 했다. 이에 아카데미 수상자들은 ‘임의로 트로피를 되팔지 않겠다’는 조항이 명시된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만 트로피를 손에 쥘 수 있다.

배우 양자경(양쯔충)이 아시아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소감을 말하고 있다. [로이터]

다만 이 조항 덕에, 1950년 이전 트로피들의 가치는 수직상승했다. 일부 억만장자들은 판매금지 조항 이전에 나온 트로피를 희귀한 수집품으로 소장하기도 했다. 일례로 빅터 플레밍 감독이 1939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로 받은 감독상 트로피는 1999년 마이클 잭슨에게 17억원에 팔렸다.

원가 100만원짜리 트로피를 17억에 팔게 하는 힘은 뭘까. 상의 무게와 가치를 결정하는 건 결국 그 의미와 스토리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물건일수록 비싼 값을 부르고, 팔지 못하는 물건일수록 더욱 갖고 싶어지는 세상의 이치가 여기도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