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27호
문화·예술·역사·사회 종횡무진 브랜드 스토리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동네 마트에서 일하는 30대 독신남 입니다. 키는 보통인데 장두형 머리라 훨씬 커보이고, 얼굴도 호감형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마트 식품 코너에서 일하는 또래 여자 분도 저에게 먼저 다가오더군요. 그런데 이 여자, 부모님이 이 마트 소유주라고 합니다. 예비 장인 성함이 정용진은 아니고요. 아무튼 난생 처음 만나본 이런 여자, 저랑 잘 될 수 있을까요?”
마트에서 썸 탄다고?…어디에도 없던, 이곳에선 가능합니다
브랜드피디아 27호는 김칫국 마시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사연 속 남자의 정체와 그가 일하는 특별한 마트를 소개한다. 이 남자는 ‘너의 모든 것 시즌2’의 조 골드버그(펜 배질리), 그가 일하는 드라마 속 마트의 현실판은 ‘에레혼’(EREWHON)이다.
조 골드버그는 미국 뉴욕에서부터 맘에 드는 여자를 스토킹하고 속옷까지 훔치는 기행을 벌이니 희대의 나쁜 남자다. 악행이 발각되자 신분을 세탁한 채 로스앤젤레스(LA) 식료품 가게에 취업했다. 그의 새로운 목표물은 LA 고급 식료품점 소유주의 딸, 러브 퀸(빅토리아 페드레티)이다.
두 사람의 로맨스가 벌어지는 식료품점 ‘애나브린’(ANAVRIN)은 LA에 실제로 존재하는 고급 식료품점 ‘에레혼’(EREWHON)을 컨셉을 그대로 차용한 곳이다. 악명 높은 연회비 200달러(약 27만원)를 자랑하고 미국 LA지역에만 매장이 있는 최고급 유기농 식료품점이 에레혼이다.
마트직원 조가 디톡스에 심취한 상류층 여자 러브 퀸(빅토리아 페드레티)와 우연히 엮이기에 이보다 적절한 곳이 있을까? 에레혼의 먹거리 가격은 웬만한 식당과 카페 음식을 뺨친다. 방목으로 기른 칠면조 요리의 가격은 30만원, 크림 소스에 버무린 시금치 요리 가격도 6만원이 넘는다. 누가 가나 싶은 이 식료품점은 어떻게 LA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드라마 속 이야기의 배경까지 됐을까?
“물 한 병이 3만 5000원”…부자들의 스타벅스, LA 랜드마크가 되다
1970년대 설립된 에레혼은 2011년 현재 최고경영자(CEO)인 앤토시 부부가 하나 남은 매장을 인수하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포브스에 따르면 10여 년 새 LA에 매장을 10곳까지 늘렸고, 매출도 10배 늘었다. 미국 대형 마트의 4분의 1 크기에 불과한 작은 매장이 대부분이지만, 1평당 매출이 1억원을 넘는다.
에레혼은 건강한 유기농 식습관을 추구할 수 있는 상류층 소비자를 공략했다. 명품 쇼핑에 나선 VIP 고객들을 대하듯 직원들은 높은 선반의 물건을 대신 꺼내주고, 음식과 식재료에 대해 정성껏 설명한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건 한 잔에 18달러(약 2만4000원)가 넘는 스무디 음료수다. 에레혼 카페 메뉴판은 스타벅스와 스무디킹을 가격과 재료 모두 업그레이드 한듯한 메뉴로 가득하다. 단백질, 콜라겐 등 영양 성분을 파우더로 옵션으로 추가할 수 있고, 단 맛은 자일리톨, 바닐라 스테비아 등 고가의 저당 성분으로 잡았다. 이름도 생소한 바다 이끼 젤, 코코넛 케피어(kefir·발효유) 같은 건강 재료도 들어간다.
‘방금 막 요가를 끝낸, 유복한 여자가 손에 들고 있을 법한 건강하고 고급스러운 음료’.
이 한 잔의 스무디야말로 에레혼이 추구하는 생활양식의 결정체다. 단순히 입고 걸치는 명품을 넘어, 나와 내 몸 속을 채우는 음식의 질까지 최상으로 끌어올린 삶의 양식 그 자체. 에레혼은 보통의 사람들이 쉽사리 따라할 수 없는 이러한 생활양식을 파는 가게다. 식품 업계의 또다른 ‘올드 머니’ 트렌드랄까. 할리우드의 유명한 금수저 헤일리 비버가 에레혼의 스무디 앰배서더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트 로고 박았는데 백만원?…‘발렌시아가X에레혼’ 뭐길래
에레혼은 미국에서도 LA 지역에만 매장을 둔 ‘동네마트’다. 그런 에레혼이 미국을 넘어 국내까지 이름을 알린 건 두 달 전 공개된 발렌시아가 패션쇼의 공이 컸다.
발렌시아가 FW컬렉션 런웨이에 선 모델 손에 들린 테이크아웃 잔에도, 브랜드 엠버서더인 킴 카다시안 손에 들린 종이백 모양 가방에도 모두 에레혼 로고가 박혔다. 발렌시아가가 에레혼과 컬래버레이션 한 모자, 앞치마, 가방 등은 낮게는 56만원부터 높게는 153만원에 판매됐다.
에레혼 역시 자신들의 로고를 담은 각종 굿즈(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유기농 코튼으로 만든 큰 사이즈 에코백의 가격은 18만원이다. 럭셔리 브랜드인 발렌시아가에서 내놓은 제품보다는 저렴하지만, 웬만한 패션 브랜드 뺨치는 가격이다. 에레혼은 온 힘을 다해 ‘우린 그냥 그런 마트가 아니다’라고 외친다.
“너네 결국 똑같잖아” 알고보면 더 재밌다…드라마 속 이스터에그
에레혼의 고급화 전략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도 받는다. 일명 ‘산소수’(산소를 충전한 물)로 불리는 1.9L 물 한 병을 25.99달러(약 3만5000원)에 팔고, PB상품인 500ml 물 한병조차 2.99달러(4000원)에 팔 정도로 대다수 품목들에 비싼 값을 매겨서다. 건강한 삶을 향한 생활양식의 탈을 쓴 채, 상류층의 과시욕과 허영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힐난이다.
에레혼을 향한 삐딱한 시선은 ‘너의 모든 것 시즌2’에도 드러난다. 조와는 다른 삶을 살 것 같았던 러브의 삶은 정서적 허기로 가득 차 있다. 매일 같이 빵을 구워 사람들에게 나눠주지만 그녀를 위해 식탁을 차리는 가족은 없다. 그의 쌍둥이 남동생은 마약에 중독돼 있고, 딸의 뺨을 때리는 모친은 인스타그램에 ‘#웰니스#이너피스’ 따위의 해시태그를 달기 바쁘다.
주인공 조(Joe)가 미국 대중들의 유기농 마트 ‘트레이더 조’(Trader Joe’s)를 상징한다면, 그보다 더한 러브일가의 삶은 덧없는 애나브린과 에레혼의 은유다.
“제발 죽었으면 좋겠어요, 제가요.”(배우 펜 배질리, 조 골드버그役).
시즌 4까지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너의 모든 것’은 올해 방영될 시즌 5를 끝으로 종영한다. 러브일가의 뒷이야기는 시즌3에 이미 공개돼 있다. 그렇다면 배우 펜 배질리까지 “(이제는) 죽었으면 좋겠다”고 치를 떨게하는 망나니 조의 결말은 어디로 향하고 있일까. 미국 상류층 사회를 넘어 이젠 영국으로 무대를 옮긴 조. 이젠 글로벌 재벌의 귀족 딸까지 눈독 들이는 중이다. 더 커진 스케일에 걸맞는 화려한 피날레를 기대해보자.